마가복음 1장 신약 히브리어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면서 시험받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들어가서 사탄에게 40일 금식하면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시험이 끝난 후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40일 금식하며 시험받은 예수님(막 1:9-20)
예수님이 세례 받으심(9-11)
• 1:9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③ 모든 택한 백성을 대신하여 세례 받기 위함이다.
④ 모든 성도의 모본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 지켜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려면 세례 받는 일까지 순종하여야 된다. 이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주도록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하나님을 순종하여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례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고, 세례요한은 세례를 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것이다.
• 1:10-11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물에서 올라오실새 예수님께서 물(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없는 데(육지)로 올라오셨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물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물 위로 올라온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말이 없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물에 잠갔다가 꺼낼 수 있겠는가! 물을 떠서 끼얹는 것이 경건하고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세례의 원 뜻에 맞는다.
"세례주다“의 헬라 원어는 βαπτιζω(밮티조)로서 그 뜻은 "잠그다, 적시다, 씻다, 씻어서 정결케 하다"는 뜻이 있다. 침례교파에서는 "잠그다"는 의미로만 해석하여 침례를 주장한다. 그러나 "세례 주다"라는 헬라 원어 βαπτιζω(밮티조)는 변형되어 βαπτισμος(밮티스모스), βαπτισμα(밮티스마), βαπτιστης(밮티스테스)등으로 성경 여러 곳에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11:38에 "장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 하심을"의 손 씻지( εβαπτισθη)나, 요한복음 13:26의 “한 조각을 찍으셔 다가"의 찍는다(βαψας)의 의미가 모두 βαπτιζω(밮티조)라는 말이 변형된 말이다. 침례교파에서는 잠그다는 뜻에만 국한시키고 다른 뜻을 무시한 것은 헬라 원어를 올바로 해석한 것이 못된다. 물론 "잠그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원문의 뜻만 가지고는 잠그는 것인지, 씻는 것인지, 적시는 것인지 확실히 나타낼 수 없다. 그런데 침례교파에서는 일방적으로 "잠근다"는 뜻으로만 해석하여 침례만이 참된 세례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체를 무시하고 의식에 치우쳐 침례를 고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줄 때 사람들을 물에 잠갔다가 꺼냈을까? 아니면 물을 떠서 머리에 끼얹었을까? 세례의 기원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전에 있던 세례를 요한이 새로이 시행하였다고 하면 백성들이 당연히 세례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느냐고 물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세례는 구약시대부터 유래한 것인데, 세례 요한이 특별히 많이 행한 것뿐이다. 세례의 참된 근원이 무엇인가?
① 모세가 송아지의 피를 뿌려 성소를 정결케 하였다(출29:16).
② 에스겔36:25에 "맑은 물로 너희에게 부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라고 하였다.
③ 문둥병에 걸렸다가 정결케 된 자는 살아있는 새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제사장이 한 마리는 죽여서 그 피를 산 새의 날개로 찍어서 문둥병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게 하는 의식을 행했다(레14:5-6).
이와 같이 구약시대의 모든 정결케 하는 예식이 모두 물이나 피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도 뿌려서 정결케 하는 예식이 분명하다. 베드로가 하루에 삼천 명이나 세례를 주었는데, 그 삼천 명을 모두 물에 잠그었다가 꺼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는가! 물에 잠그었다가 꺼린다면 철야하여 24시간 동안 세례를 베푼다고 하여도 삼천 명을 다 세례 주지 못한다. 바울이 다메섹에 가서 금식 기도하다가 아나니아에게 안수 기도를 받고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고 했고 물에 나가서 바울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다. 이로 보건대 바울이 방에서 기도하다가 일어나 세례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행9:18).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16:33 참조). 강에 가서 세례를 준 것도 아니요, 목욕통을 만들어서 세례를 준 것도 아니었다. 즉시 머리에 물을 끼얹어 세례를 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고전10:1-2 참조).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물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왔는가?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고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그것을 곧 세례라고 하였다.
침례교파에서는 세례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즉 물 속에 들어간 것은 옛사람이 죽어서 장사지변 것을 상징하고, 물 속에서 올라오는 것은 새사람이 살아 올라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의 참 들쓴 "씻어서 정결케 한다"고 해야 성경 전체의 사상에 맞는다. 그러므로 세례 받을 때 꼭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적수(滴水) 세례가 옳다고 본다. 침례 교파에서 적수 세례를 받은 자라도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미 삼위의 이름으로 건전하게 세례를 받은 것은 피차 인정하는 것이 옳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은 취소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독선적인 의식주의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성령의 모양이 비둘기 같이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충만한 분이시요,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한 것에는 상징적인 뜻이 있다. 비둘기는 하나님께 제물로 이용되는 새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다. 그러므로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시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도록 역사하는 성령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내 아들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예수님이 아들로서 다 받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계시를 다 받아 은혜와 진리를 우리에게 전부 전달하여 주신다. 기뻐하노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완전히 다 이루어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다.
예수님의 금식과 시험받으심(12-13)
• 1:12-13 성령이 곧 예수를 황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계속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고 볼 수 있다. 이 시험 문제 때문에 예수님이 기도를 많이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는데 왜 시험을 받으셨을까?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 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이겨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꼭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죄는 없으시다(히4:15 참조). 예수님이 인성으로는 연단을 받아 자라나야 하므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을 힘입어야 했다. 이를 위해 광야에 나가 하나님 앞에 깊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셨고 사십일 동안 기도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시험받는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들짐승이 많이 왔으나 하나님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고, 모든 시험을 다 이길 수 있도록 하여 주셨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주신 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
"광야 생활"은 아무 의지할 데도 얼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 쓸쓸하고 거친 지경에 처하는 것이다. 성도가 시험받을 때에도 영적 광야가 된다. 그리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들짐승과 같이 된다.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모두 짐승과 같이 해하려고 하고 물어뜯고 잡아먹으려고 하는 때가 많다. 그때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손해 받지 않게 해 주시고 망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다. 그러므로 시험받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말씀대로 걸어가면서 그 시험을 이겨야 한다. 마귀가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했으나(마4:4-11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다 이기셨다.
예수님이 전도하심(14-15)
•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본절부터 갈릴리 전도의 시작이다. 요한이 잡힌 후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악행을 면책하였기 때문에 헤롯왕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막6:17-18).
•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가 찬 것을 가리킨다. 그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를 받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회개해야 하고 둘째, 복음을 믿어야 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을 가리킨다.
네 제자를 부르심(16-20)
• 1:16-20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의 성역 중 첫째는 제자를 택하여 연단시키며 길러 나가는 일이었다. 오늘날 복음 운동에도 일꾼을 택하고 연단시키며 길러나가는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은 제자를 택할 때에 제사장이나 학자 중에서 택하지 아니하고 무식한 어부들을 택하였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고전1:26-29 참조).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 네 제자는 본래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세례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요1:35-42 참조).
[히브리어 원어성경 열왕기상] 솔로몬 왕의 슬기로운 재판(왕상 3:1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