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송구영신 예배 원어 설교말씀] 담대한 새해를 맞이하자(요 16:25-33)

엘벧엘 2021. 12. 2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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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 해를 열심히 살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시간을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올 한 해를 보내면서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았던 날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지 못했어도 시간은 흘러왔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담대하게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교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시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코로나와 싸워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코로나를 종식시킬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신이며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가 담대하게 나가서 하나님과 함께 새해를 승리하는 성도의 삶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담대한 새해를 맞이하자(요 16:25-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저녁 제자들에게 주신 모든 교훈의 결론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그 교훈의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입니다. 여기 평안’이라는 말은 헬라어 단어로 에이레네입니다. ‘평화, 번영, 하나가 됨, 조화, 질서, 화평, 고요, 안식, 안녕, 복지’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제일 갈망하는 것이 이 평화, 화평일 것입니다. 가정의 평화, 사회의 평화, 국제 간의 평화, 마음의 평화입니다. 여기 평화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 때에 평화는 자연히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없는 평화와 안정을 원합니다. 이 평화와 안정도 또 평화로운 사회도, 다툼이 없는 가정도 오직 그리스도께 순복 하여 그 말씀만 따를 때에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최후로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담대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다르세오입니다. ‘용기를 갖다, 원기를 차리다, 두려워하지 않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리라고 미리 경고하시면서 그러나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환난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들립시스입니다. 압박, 고난, 고통, 괴로움, 박해, 곤고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내어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정직하다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는 야샤르입니다. 곧은, 공정한, 올바른, 공평한, 진실한, 적합한, 옳은’의 뜻입니다. 꾀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샤본입니다. 고안, 계략, 술책, 책략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가 받은 놀라운 자유의지와 선택권(신 30:15)을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범죄 하였고 이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에(롬 5:12), 이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구원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이것이 끝이 있는 인간의 역사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딤전 2:4)과 계획에 따라 악한 자도 내버려 두시고(롬 1 :28) 사탄까지도 정하신 때까지는 택하신 자들의 단련에 사용하시기 위하여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허용하심으로(욥 1:6. 12),지금 온 세상은 악한자 안에 처하여(요일 5:19)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딤후 3:12).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 마귀들이 정하신 때까지는 활동을 허락 받음으로 성도가 환난을 당하고 아무리 악한 자들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마음대로 택하신 자들을 박해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신 주님이 세상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심으로 십자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셔서 온 세상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마귀의 간계를 물리치시고 이기셨으므로 주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의 공로로 사탄을 이길 수 있으므로 담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이 어려운 세상을 통과하는 동안에 환난을 당할 것을 미리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사탄을 완전히 물리치는 종말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아무래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소위 인생의 네 고난 곧 생로병사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기 전에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천재지변 기타 불의의 사고가 종종 일어납니다. 이것들 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가지 환난이 더 있습니다. 곧 선한 생활에는 언제나 악의 박해가 있습니다. 성도의 수난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용감하고 활기 있게 살아라 왜냐하면 우리의 주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새해 첫날 첫 시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새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담대한 용기는 여러 면으로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여러 방면으로 우리를 공략해 오지만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우리를 피합니다. 익 4 7) 대적한다는 말은 헬라어 단어로 안디스테미입니다. 대항하다, 반대하다, 저항하다, 반항하다’의 뜻이고 피한다는 말의 헬라어 단어는 퓨고입니다. 도망하다, 피신하다, 사라지다, 없어지다’의 뜻입니다. 

첫째로 먼저 우라는 자기반성과 죄를 회개하는 데에 용감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고 죄를 회개하는 데는 언제나 큰 용단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이럴 때에 우리를 조롱하며 포기하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 안의 부패와 부정과 죄악은 언제나 우리를 비겁하게 만들고 변명거리만 찾으려고 합니다. "양심이 다 우리를 겁쟁이로 만든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속에서 일어나는 비겁한 마음이 사라지도록 주께서 머리를 밟아 이기신 사탄에게 물러가라고 명하고 나 자신을 용감히 솔직히 비판하여 죄와 허물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할 때에 마음의 평화가 회복되고 마음이 평안할 때에 우리는 더욱 용감히 의를 위하여 싸울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혹 다른 사람이 우리를 비판할 때 그것이 사실이면 우리는 용기를 내어 받아들이고 시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전에 다윗 왕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은 후에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 지적하자 곧 원통히 회개하였고 그 마음이 시편에 자세히 나옵나다. 여기에 다윗의 용기가 다시 나타납니다. 그가 거인족 골리앗과 싸울 때는 청소년이었는데 그때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를 다윗이 낸 것을 압니다. 오히려 그 용기보다도 왕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솔직하게 내가 범죄 하였노라고 자기 죄를 시인한 용기는 사탄을 이긴 더 큰 용기입니다.

반면에 헤롯 왕은 같은 죄를 지은 후에 세례 요한의 충고를 들었으나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 죄를 더하고 결국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여기에 그가 얼마나 비겁한 자인가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데에 용감합니다. 

둘째로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는 데에 용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하신 후 마귀로부터 많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용감히 물리치신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배가 고플 테니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여기에 궁핍할 때에 들어오는 물욕의 시험이 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천사가 너를 보호한다고 시편에 되어 있지 않느냐" 여기에 허영의 시험이 있습니다. "나에게만 절하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여기에 권력과 명예에 대한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유혹을 담대히 물리치셨습니다.

전에 요셉이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를 통하여 들어오는 정욕의 유혹을 어떻게 담대히 물리쳤나 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반면에 성경에서 유혹을 담대히 물리치지 못하므로 일생을 그르친 비겁한 이들의 이야기도 많이 읽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 곧 식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장자의 특권을 빼앗겼습니다. 아간과 가룟 유다는 황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일신을 망쳐버렸습니다. 삼손은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의 나실인이요 이스라엘의 사사인 그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환경도 변하지만 옛날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육신을 가진 인간들은 그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유혹들이 있습니다. 곧 물질을 통하여 오는 유혹 그리고 정욕, 권세욕, 명예욕, 허영 등입니다. 이 모든 유혹은 에덴동산에서 교만한 하와에게 다가왔던 사탄의 유혹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심과 사탄의 유혹의 합작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는 데에 용감해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용감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데만 용감하고 사탄을 대적할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데에 용감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사탄은 이것을 제일 싫어하여 어찌하든지 방해를 하려고 할 것이지만 주님이 사탄을 이기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힘입어 이러한 사탄의 방해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정병이 돼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절대다수가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 사회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데 담대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작은 일에도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전에 세례문답을 할 때에 들어보면 어떤 학생은 눈뜨고 식사기도를 해도 되느냐고 묻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집에서는 식사기도를 하지만 밖에서는 못한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의 그 심정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다 기도 안 할 때 나 혼자 머리를 숙여 눈감고 기도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작은 일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으로서 술, 담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위기에 의해 넘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작은 일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개인 전도에도 언제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중 전도에 용기가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다가 로마 천부장에게 구원을 받아 영문으로 들려갔는데 층대에 이를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허락을 받아 자기를 박해하는 무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한 후 그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여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장면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바울이 얼마나 용의주도했고 또한 용감했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전도의 기회를 노렸고 기회가 오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감하게 전한 것입니다. 전도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늘 듣는 예이지만 마틴 루터가 웜스 국회에서 종교개혁의 교리를 취소하라는 위협을 받았을 때에 그는 황제 앞에서 ‘나는 여기 섭니다. 나는 그 교리를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역사의 일화입니다. 마틴 루터가 얼마나 용감하였나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진리 수호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이고 하나님의 뜻하신 것이 분명할 때는 어떠한 손해가 와도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위험해도 담대히 나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넷째로 그리스도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에 저항하는 데도 담대하여야 합니다.

모든 악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과 온갖 악의 각축장입니다. 그러한 싸움을 통하여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와 버리신 자를 가르시고 걸러내시고 구원받을 자는 단련하십니다. 이 세상은 빛과 어둠의 싸움터입니다. 정과 부정, 의와 불의,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대결은 어디나 있습니다. 사회에도 국제 간에도 이 대결은 종말 때까지는 계속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무슨 문제를 당하든지 사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게 판단하고, 항상 진리의 편에 서야 하고, 언제나 정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담대하게 싸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계실 때에 광야에서 뿐만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인간으로서 당하실 수 있는 모든 시험과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모든 고통과 부끄러움을 이기셨습니다. 드디어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권세까지 이기셨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담대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우리도 우리 앞에 있을 어떠한 어려움이나 사탄의 유혹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37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넉넉히 이긴다는 말의 헬라어 단어는 휘페르니카오라는 말입니다. 넘치게 이기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다,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다, 대승을 거두다의 뜻입니다. 또한 빌립보서 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능력 주신다’는 말의 헬라어 단어는 엔뒤나모오입니다. 권능을 부여하다, 힘세게 하다, 강하게 하다, 강건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굳게 믿으면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데에 담대하고 유혹과 시힘을 물리치는 데에 담대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의 생활을 하는 데에 담대하고 악에 저항하는 데에 담대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기기 위한 담대한 용기를 얻는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므로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말의 헬라어 단어는 메노입니다. 머물다, 체재하다, 계속하다, 남아있다, 존속하다, 살다, 거주하다,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만용이 아니라 참된 용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신앙에서 나옵니다. 용기는 의심 없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담대한 용기는 우리가 참 말씀 안에 거할 때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생활화될 때에 나옵니다. 신앙의 힘은 위대한 것입니다. 반신반의하거나 잘못된 신앙을 가졌을 때에는 어쩐지 두렵고 자신이 생기지 않고 비겁해지고 타협을 하려고 하게 되지만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구원과 동행을 확신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때는 천하에 두려움이 없고 담대해질 수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는 그때그때 필요한 지혜를 주님이 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담대할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지혜까지 갖추게 되니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새해 첫 시간 이 엄숙한 시간에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십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도 세상을 이깁니다. 유혹을 이깁니다. 마귀의 간계를 이깁니다. 마귀를 대적하기만 하면 마귀가 피합니다. 담대하게 새 용기로 새해를 출하여 금년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 각자가 한걸음 한걸음 성큼성큼 나아가 나 개인과 가정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평안을 누리며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는 귀한 한 해가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일 대표 기도문] 송구영신 주일 예배 대표 기도문

 

[주일 대표 기도문] 송구영신 주일 예배 대표 기도문

올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게 됨을 감사합니다. 올 한 해 계획했던 일들이 잘 마무리되었는지요. 못 다했던 일들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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