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백성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백성을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제목: “율법과 죄로부터 해방” (롬 7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로마서 7:1~25
요절: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므로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4-25)
주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과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고 성화되자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 송년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주현절(主顯節, Epiphany ‘주님이 나타난 날’ 동방박사들의 경배 기념)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세계적으로 이번 주간에 가장 널리 부르는 노래는,
“1)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3X) and a Happy New Year!
축하하오 기쁜 성탄(3번) 또한 복된 새해
Good tidings we bring to you and your king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큰 기쁜 소식 전해 드리오 축하하오 기쁜 성탄 또한 복된 새해!
2)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3X) and a Happy New Year!
축하하오 기쁜 성탄(3번) 또한 복된 새해
Glad tidings to you whenever you are
good time is for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어디에 있든지 기쁜 소식. 기쁜 성탄과 복된 새해는 좋은 시간!”
입니다. 송년, 망년, 연말, 송구영신의 단어가 이번 주 용어입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 Eben-ezer”(삼상 7:12)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하나님의 눈이 우리 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신 11:12).
성탄절과 연말 연시에 두 편의 동화와 단편소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덴마크의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나폴레옹 군대와 싸우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일찍 돌아가시자 어머니 홀로 자식을 키우느라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연극배우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일로 자살까지도 생각했으나, 그가 글솜씨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안 국회의원 요나스 콜린의 충고로 라틴어 학교에 뒤늦게 입학하여 문학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30살인 1835년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1843년에 발표한 “미운 오리 새끼”가 대성공하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이 안데르센의 동화에 빠져들었습니다. 안데르센의 유명세가 대단해서 심지어 그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고, 말년에는 정부로부터 특별 연금까지 수령하는 등 국내외적인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안데르센을 애호하던 유명인사 가운데서 찰스 디킨스는 그와 여러 번 만나 친분을 쌓기도 했습니다. 이후 1840~60년대까지 유럽이나 미국, 터키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기행문 책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1875년 8월 4일,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8월 11일에 거행된 장례식에는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9세와 루이세 왕비까지 참석했답니다. 그가 남긴 <성냥파는 소녀 The Little Match Girl>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 삼아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합니다. 줄거리를 보면, “19세기 어느 12월의 마지막 날 저녁, 찬바람이 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성냥을 팔던 누더기 차림의 한 소녀. 이름도 성도 알려지지 않는 가난한 소녀이다. 하지만 아무도 성냥을 사주지 않아 돈을 벌지 못했고, 그 상태로 귀가했다간 알코올 중독의 아버지에게 또 맞을까봐 선뜻 집에 돌아가지도 못해 소녀는 매우 난감했다. 눈이 내리는데 그나마 신고 있던 신발의 한짝은 마차를 피하다가 눈속에 파묻히면서 분실했고 또 다른 한짝은 지나가던 어느 양아치 소년들이 훔쳐갔으니 발이 꽁꽁 얼게 되었다. 결국 추위를 피해 인적 드문 골목길에 앉은 소녀는 손이라도 녹이려고 성냥불을 켰다. 그런데 성냥 하나를 켤 때마다, 소녀가 마음속으로 늘 바라던 따뜻한 난로, 화려한 만찬, 크리스마스 트리 등의 환영이 차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Where the light fell upon the wall, it became transparent. 소녀는 그것들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도중에 성냥불이 꺼지자 그 풍경도 곧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하늘에서 별똥별이 하나 떨어졌는데, 소녀는 그 별을 보고 "별똥별이 떨어지는 건 누군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뜻이라던데... 누가 죽은 걸까?"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소녀가 네 번째 성냥을 켜자 생전에 소녀를 무척 아껴주셨던,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나타났다. 소녀는 행여나 할머니마저 사라져 버릴까봐 필사적으로 남아있는 모든 성냥을 다 꺼내서 불을 붙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마저도 불이 꺼지자, 소녀는 점점 흐려지는 할머니의 환영을 붙들려 애쓰며 울부짖었다. ‘할머니, 할머니! 제발 절 두고 가지 마세요! 저도 데려가주세요!’ 그러자 할머니의 환영이 따뜻하게 웃으며 소녀를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고, 소녀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할머니의 품에 안겼다. 이제 소녀는 더 이상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온몸에 눈이 쌓인 채 하늘나라로 간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의 주변에는 소녀가 몸을 녹이려고 켰던 성냥이 다 탄 채로 흩어져 있어 모두들 안타까워했지만, 소녀가 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유성식(兪盛植, 1966년생, 서울대 학사, 동국대 석사)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씁니다.
“성냥 사 주세요 성냥/ 눈보라는 날리고/ 가로등은 꺼져 가요
성냥 좀 사 주세요 성냥을/ 예전엔 당신도/ 누군가의 언 발을 녹여 주었죠.
여름은 뜨거웠고/ 가을에 우리는 노래 불렀죠.
그래도 우린/ 성냥을 계속 만들었어요/ 서쪽 하늘이 자꾸 어두워지기 때문에
성냥 사 주세요/ 춤추는 성냥/ 싸우는 성냥/ 눈물 흘리는 성냥
자꾸자꾸 꺼지는 성냥/
성냥 좀 사 주세요 성냥을/ 밤은 깊고/ 외투는 얼어붙었어요.
이 할미의 한 갑 남은/ 마지막 성냥이랍니다.”
이 동화에 대해 심리학자는 엄마와 할미의 동일화 이야기를 하며, 정신의학자는 소녀가 본 환상들을 분석하며, 경제학자가 사회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며, 정치학자는 당시의 정치가들을 비평합니다. 연세대 신과대를 다닐 때 졸업을 앞두고 설교학을 김호식목사님(향린교회)에게 배울 때 이 동화를 예를 드시면서 지나가던 행인들 중 한 사람이 자고 있던 소녀를 깨워 “얘야 집에 가서 자거라”고 하였다면 이 소녀는 죽지 아니했을텐데라고 가르침은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이 코로나로 고통중에 있는 이웃들에게 구체적인 사랑과 관심을 가지며 돌봐주어야 합니다. 성탄절의 선물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 5:24).
둘째, 일본에는 <우동 한 그릇>이 연말연시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겟세마네 신학교가 개교하던 1988년에 나온 구리 료헤이(栗良平)의 단편소설로 섣달 그믐날 삿포로에 있는 우동집 <북해정>을 배경하고 있습니다. 2시간이면 새해가 시작되는 12월 31일 밤 10시에 찾아온 한 아주머니와 두 아들이 우동 한 그릇만 시킵니다. 주인은 싫어하지 않고 한 그릇 반 정도의 분량을 주어 셋은 맛있게 먹고 갑니다. 만 1년 후 또 같은 시간에 찾아온 이들은 같은 좌석 2번에서 한 그릇을 가지고 셋이 나눠 먹고 갑니다. 우동집 주인 내외는 순식간에 비워진 우동 그릇과 대견스러운 두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세 번째 연말 같은 시간에 어김없이 찾아온 세 사람은 2인분 우동을 시켜서 먹으면서 아주머지가 고생담을 나누었는데 우동집 주인 부부는 주방에서 엿듣게 됩니다. 이 아이들의 아빠가 교통사고를 내어 여덟명을 부상입히고 현장에서 돌아가셨답니다. 일부는 보험금으로 보상했지만, 나머지는 빚을 내어 갚고 그 빚을 갚기위해 밤남 일을 해 왔답니다. 그날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었답니다. 큰 아들 시로도는 아침 저녁으로 신문배달을 하며 알바를 했고 동생 쥰이는 장보기와 저녁 준비를 매일 해왔기에 나머지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음을 고마워했습니다. 시로드가 동생 쥰이가 지난 두 해 동안 이 집에서 먹었던 경험을 쓴 글 ‘우동 한 그릇’이 북해도 문예작에서 당선되어 전국대회로 나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나누면서 이 글을 읽게 됩니다. 한 그릇 밖에 살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주인의 사랑으로 꼽배기로 주셔서 맛있게 먹고 한해를 보낼 수 있었던 행복을 담은 글이었습니다. 그도 이담에 자라면 우동집 사장이 되어 가난한 사람에게도 풍성히 음식을 제공하며 작별하면서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인사를 친절히 하겠노라는 내용으로 두 페이지에 빼곡이 기록하여 읽어내려 갔습니다. 어느새 주인 부부는 주방 바닥에 주저않아 눈물을 펑펑 쏟아냅니다. 그 다음 해 연말에도 이들이 찾아올 것을 기대하며 2번 탁자를 “예약석”이라 비워두었지만 이들 모녀와 두 아들은 오지 아니했습니다. 북해정이 입소문 나서 많은 손님들도 연말에 찾아와 이들을 기다렸지만 10여년 세월 동안 오지 아니했습니다. 어느 해 연말 양복 정장 차림의 두 청년이 들어와서 우동 3인분을 시켰습니다. 이들이 바로 14년 처음 찾아온 그 어머니의 두 아들들인데 금년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내년 4월부터 삿뽀로 종합병원에 근무하게 되었고, 동생 쥰이는 교토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1년째 손님을 기다린 예약석 2번에 앉아서 식사하게 될 때 주인도 손님들도 이들을 환영하며 맞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당시 일본 열도를 눈물로 강타하며 국회 회의장에서까지 감동의 눈물바다를 만들었답니다.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가까워지면, 북해도의 찬바람 같이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을 마치, 한 그릇 우동 국물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김처럼 녹인답니다.
오늘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송년주일이며, 우리 교회에서는 올해의 표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하고 복음의 말씀 전파에 힘써 왔습니다. 요절 말씀은 로마서의 주제 말씀인 롬 1:16-17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 복음 안에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으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였습니다. 새해 표어를 “주님께로 더 가까이”로 정합니다. 요절 말씀은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내게 좋으니, 내가 주 하나님을 신뢰하여 주의 모든 역사를 전파하리이다.”(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도 너희에게 가까이 다가가시리라. 너희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너희 두 생각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정결케 하라.”(약 4:8)을 실천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은 롬 6장을 통해 세례[침례]를 통해 새로운 생활을,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병기로서 무궁한 생명으로 성화됨을 살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성화 말씀으로 롬 7장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으로 율법과 죄로부터의 자유”를 묵상하겠습니다.
1.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롬 7:1-13)
(1) 형제들아, (내가 율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율법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주관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이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한 그에게 법으로 매여 있으나 그가 죽으면 그녀는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와 혼인하면 간음한 여인이라 불리지만 그녀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해방되므로 다른 남자와 혼인하더라도 간음한 여인이 아니니라. (4) 나의 형제들아, 이런 연유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하여 율법에는 죽었나니, 이는 너희로 다른 사람, 즉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와 혼인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니라. (5) 이는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에는 죄들의 정욕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지체 속에서 역사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나 (6) 이제는 우리가 붙잡혔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부터 구제되었으니, 우리가 영의 새로움으로 섬길 것이요 법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할 것이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정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잡아 내 안에서 온갖 색욕을 일으켰느니라.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임이라. (9) 내가 전에는 율법없이 살았으나, 계명이 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느니라. (10)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도다. (11)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잡아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12) 그러므로 율법도 참으로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러면 선한 것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다만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 선한 그것으로 인하여 나에게 사망을 이루었으니, 이는 계명에 의한 죄가 심히 죄 많게 되게 하려는 것이라.
1-3절. “형제들아, (내가 율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율법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주관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남편이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한 그에게 법으로 매여 있으나 그가 죽으면 그녀는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와 혼인하면 간음한 여인(淫婦)이라 불리지만 그녀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해방되므로 다른 남자와 혼인하더라도 간음한 여인이 아니니라.”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남편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란한 여자(淫婦)라고 불리겠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란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부관계를 벗어난 남녀의 행위가 음란이지만, 이 경우는 한쪽이 죽었으므로 이전의 부부의 관계 자체가 이미 끝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 “나의 형제들아, 이런 연유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하여 율법에는 죽었나니, 이는 너희로 다른 사람, 즉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와 혼인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시고 율법의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저주를 이미 당한 것과 같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즉 율법의 저주와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목적은,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에서 자유케 된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의와 선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5절. “이는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에는 죄들의 정욕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지체 속에서 역사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나” ‘육신 안에 있었을 때 when we were in the flesh’는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죄들의 정욕이 율법을 통하여 the motions of sins, which were by the law’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죄의 정욕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의 정욕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의 기관들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성이 우리의 본성 전체를 지배하였습니다. 간혹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무시되고 변명으로 무마되었습니다.
6절. “이제는 우리가 붙잡혔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부터 구제되었으니, 우리가 영의 새로움으로 섬길 것이요 법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할 것이라.” ‘붙잡혔던 것 wherein we were held’은 율법의 규례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롬6:14에서도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합니다. 또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서 감시를 받았으며, 나중에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갇혀 있었느니라...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더이상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고 하며(갈 3:23, 25), 또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니 자유 안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밝히 증거하였다(갈 5:1). 그러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죄와 방종에 떨어지게 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 자유는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의와 거룩을 행하게 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의롭고 거룩한 삶, 이것이 구원의 방향입니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어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롬 6:15에서도 “그런즉 어떻게 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또 그는 갈 5:13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에로 부름을 받았으니 그 자유를 육신을 위한 계기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합니다. ‘영의 새로움으로 in newness of spirit’라는 말에서 ‘영’이라는 말이 언어적으로는 사람의 영이며, 또 법문 혹 의문(儀文, the letter) 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으로 율법의 조문을 말합니다. 고후 3:6에서도 영과 글자가 대조됩니다: “또한 그 분은 우리로 새 언약의 능력있는 일꾼이 되게 하셨는데, 이는 법문으로 한 것이 아니고 영으로 한 것이니, 법문은 죽이고 영은 살리기 때문이라.”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옛날처럼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깁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성도에게 성화를 위한 근본적 원동력이 됩니다. 때때로 성도에게 죄와 연약이 있으나 그가 낙심치 않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의와 거룩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이 자유의 힘 때문인 것입니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정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제까지 말한 내용이 율법을 정죄하는 인상을 줄지 모르기에, 바울은 ‘율법이 죄냐?’라고 질문하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사람은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규정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탐심이 죄인 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죄를 죄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 죄일 수는 없습니다.
8-9절. “그러나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잡아 내 안에서 온갖 색욕을 일으켰느니라.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임이라. 내가 전에는 율법없이 살았으나, 계명이 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느니라.” 율법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지만, 죄가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우리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룹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 같고 죄가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된 성질과 행위들이 드러납니다. 전에 율법이 없을 때는 죄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나 자신의 존재가 살아 있는 것 같았으나, 율법이 이를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죄로 인해 죽은 자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10-11절.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도다.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잡아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조건적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율법을 통해 생명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다 행할 수 없고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이 심히 죄악됨을 깨닫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율법과 계명이 실제로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죄는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짓게 하였고 그를 죽게 하였습니다.
12-13절. “그러므로 율법도 참으로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러면 선한 것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 다만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 선한 그것으로 인하여 나에게 사망을 이루었으니, 이는 계명에 의한 죄가 심히 죄 많게 되게 하려는 것이라.” 율법 자체는 죄악이 되지 않습니다. 12절 말씀대로 율법은 실상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and the commandment holy, and just, and good. 율법은 심지어 신령합니다(spiritual, 14절). 사도바울은 구약성경도 매우 소중함을 밝힌 것입니다. 딤전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합법적으로만 사용하면 율법이 선한 것인 줄 아노라.” 율법은 바른 정신으로 사용하면 구원받은 성도에게 선하고 유익합니다. 율법의 속성에 대한 이 정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속에 율법이 있고, 율법속에 복음이 있지 이 둘을 분리하면 안됩니다. 루터교에서 이신칭의를 강조하다 보니 구약의 말씀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델성경공부(집필자 구약학자 폰 라트 G. von Rad)를 통해 구속사적으로 율법을 공부시켜 보충하고 있습니다. 장로교의 신학자 칼빈은 성화를 강조했습니다. 말씀의 실천이 수반되는 성화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생활화, 기도의 생활화, 믿음의 생활화, 예배의 생활화가 저의 연중 설교집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신약과 구약을 함께 읽어야 믿음의 균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 우리에게 사망이 되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 그 선한 율법으로 우리를 죽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죄가 심히 죄악됨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롬 7:1-13절을 요약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의와 거룩을 행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도는 율법 조문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제는 성신님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추운날 밤 성냥파는 소녀에게 관심을 가지며 소자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가 주님을 대접할 수 있습니다(마 25:31-46). 율법과 복음은 사랑안에서 융합이 됩니다.
2. 내면적 죄성과의 싸움에서 승리(롬 7:14-25)
(14) 우리는 율법이 영적인 것인 줄 알고 있노라. 그러나 나는 육신적이어서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음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면 내가 율법이 선하다는 것에 동의하노라. (17)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 (19)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20) 이제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것은 더이상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리하여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그것은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라. (22) 내가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들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 (25)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므로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4-15절. “우리는 율법이 영적인 것인 줄 알고 있노라. 그러나 나는 육신적이어서 죄 아래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음이라.”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속에는 선악간의 싸움이 있습니다. 바울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체험한 내면적 싸움을 표현합니다. 성도에게는 누구나 육신의 연약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두발을 이 땅에 붙이고 사는 동안 이 연약성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행치 못합니다. 율법은 영적이지만, 나는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입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있고 때때로 원하는 것을 행치 않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16-17절.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면 내가 율법이 선하다는 것에 동의하노라.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율법을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는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7:6절이나 8:1에도 쓰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를 말합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범죄의 주체는 참된 자아가 아님을 증거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속사람’(22절) 혹은 ‘새사람’(엡 4:24)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생명 안에서 살려 하지만, 성도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어서 율법을 거슬러 죄를 짓게 합니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참된 자아의 행위가 아니고 자신 속에 남아있는 죄성의 행위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성도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18-20절.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이제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것은 더이상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육신’이라는 헬라어(사르크스 sarx)는 ‘몸’(소마 soma)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특히 로마서 7장에서는 사람의 죄악성의 장소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성도의 남은 죄성은 몸에 있다고 봅니다. ‘원함이 내게 있으나’는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선을 원함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새 사람의 소원이요 중생한 혼의 지배적 성향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만 이러한 소원을 가집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이런 소원이 없었고 단지 때때로 양심의 가책 정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후에도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남아 있는 죄성과 연약성인 것입니다. 선을 원하는 것은 참된 자아요, 선을 원치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성입니다. 그것이 우리 몸에 남은 옛사람의 성질입니다.
21-23절. “그리하여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그것은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라. 내가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들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성도는 자신 속에 두 가지 모순된 원리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는 참된 자아의 소원으로서 선을 행하려 하는 원리요, 다른 하나는 옛 죄성의 잔재로서 악을 행하려는 원리입니다. ‘속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의 참된 자아를 가리킵니다. 중생한 참 자아는 ‘마음’(누스 nous) 곧 생각(mind)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다른 한 원리가 있어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옵니다. 성도 속에는 이 대립된 두 가지 원리 혹은 법이 있어 항상 내면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24-25절.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므로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것이 성도의 현실적 탄식과 신음입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O wretched man that I am!).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의 내적 싸움으로 성도는 피곤하여집니다. 성도는 당연히 이 죄와 사망의 몸으로부터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과 성화는 이와 같은 내적 싸움과 탄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는 죄에 대해 점점 죽고 의에 대해 점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효력이 있고 승리합니다. 비록 구원받은 성도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지만, 성도가 탄식과 신음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칭의(稱義)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성도는 때때로 죄에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의를 이미 얻었고 최종적 구원과 영생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 구원은 영육의 완전한 구원입니다(빌 1:6).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승리를 얻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에 집중할 수 있음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성도 속에는 남은 죄성으로 말미암는 내면적 싸움이 항상 있지만, 성도는 탄식과 신음 속에서도 점점 거룩해져 갈 수 있습니다. 또 성도는 하나님께 이미 받은 의와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의 보장으로 인해 탄식과 신음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의와 영생과 자유 속에서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실천합시다.
[오늘의 기도]
역사를 섭리하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올해 한해도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밝아오는 임인년 한해도 승리의 한해가 되실 줄 믿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준비하며 철저히 회개하며 새해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게 하옵소서. 코로나와 백신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의 가족을 위로해 주시며, 전염병으로 입원 치료하거나 자가 격리하시는 환우들에게 속히 회복의 은총을 주시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과 함께 나눔의 은총을 주시며, 3살 자녀를 먼저 천국에 보낸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로해 주시며, 토네이도로 교회와 가정과 목숨을 잃은 우리의 이웃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옵소서. 새해에는 새로운 생명으로 늘 함께 해주시고 형통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애굽기 히브리어 성경 강해] 고통중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출 2: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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