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13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무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의무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로마서 13: 1-7)
설교자 : 이동원 목사
마태복음 22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아주 미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선생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마 22:17)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백성을 배신하는 매국노라고 규탄할 속셈이었고, 혹은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로마 정부의 국법을 어기는 반역자로 고발할 속셈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은전 하나를 내 보이시면서 이 은전에 누구의 형상이 그려져 있느냐고 물어보셨고 그들은 가이사의 형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의 의무, 즉 지상의 정부를 향한 의무와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의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복음은 국경을 초월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국경은 없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넓은 시야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지만, 동시에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우리의 생명의 젖줄이 된 조국을 향한 발전에 기여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몇 가지로 논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질서 유지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라”(1절).
이 말씀은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많은 독재자들에 의해서 남용되어 온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피하려고 하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성경에 나온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굴복’이나 혹은 ‘복종’이라는 단어보다는 ‘반항’이라든지 ‘저항’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매력적인 단어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종이나 순종을 즐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특성 중의 하나가 반항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있어서의 저항의 합법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삶의 자세로서 복종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가르침들을 살펴보십시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라고 가르치고 있고,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라고 가르치며, 종과 상전과의 관계-이것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고용인과 피고용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전들에게 복종하라”라고 계속해서 이 복종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있습니다. 그것은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질서유지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권세자’라고 말합니다. ‘권세자’라는 단어를 들을 때 조금은 저항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말 가운데 세도가라는 말과 비슷한 느낌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세력을 잡은 사람들이 자기의 힘을 남용하는 역사적 실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 단어에서 어딘지 모르게 저항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가 이 질서유지의 책임을 가진 사람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권세자라는 단어 대신에 그 말을 바꾸어서 질서 유지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사용했습니다.
권세는, 즉 모든 힘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정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것을 강조하면 즉각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나올 수 있는 또 하나의 반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히틀러 같은 악한 지도자에게도 복종해야 합니까?”, 혹은 “김일성이나 김정일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까?” 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신학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에 두 가지의 종류로 구별을 합니다. 첫째는 ‘최선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본래 원하시고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최선의 뜻을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의 뜻은 ‘허용적인 뜻(의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인간의 타락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타락은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신학자들까지도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한 것을 본래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락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타락을 하나님이 허용하셨습니까?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허용하셨을 때 그것이 당장은 우리의 눈에 불합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온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것이 최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다 혹은 허용적인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히틀러나 김일성을 세우신 것이 본래 하나님의 의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선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하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시고 승인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악을 허용하심으로써 선의 중요성을 배우게 하시고, 불의를 허용하심으로써 의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궁극에 가서는 사람과 역사에 이 모든 것이 유익이 되도록 섭리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승인하셨다면 질서 유지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악한 제도도 그 제도나 그 정권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가 나쁜 정권을 경험하게 되다 보면 차라리 이런 정권이나 법 자체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무정부주의적인 쪽으로 우리의 생각이 극단적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없는 세상이나 일체의 법이 폐기된 사회를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회는 극도로 무질서해지게 되고, 이런 혼란이 오면 제일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완전한 제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도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정과 사회의 질서 유지의 차원에서 정부나 제도를 허용하고 승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사람의 공의를 위해서 질서 유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실제적으로 한 나라를 향해서, 사회를 향해서 우리 자신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권세라는 말을 할 때 비단 최고의 통치자만 연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종류의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 전체를 포함시킬 수가 있습니다. 저는 크리스챤들의 삶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이런 실제적인 사회생활 속에서도 반영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얼마큼 우리는 우리가 살아오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이것을 협조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지키려는 신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4절에서는 모든 종류의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사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의도해서 세우셨든, 아니면 하나님이 허용해서 세우셨든 우리의 복리와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셨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래 이 하나님의 사자란 말은 보편적으로 목사들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영적인 지도자를 가리킬 때뿐만 아니라 본문에서는 법을 집행하는 모든 관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세우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유익과 한 사회의 안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을 세우셨다면 그들에게 협력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운전을 잘못해서 경찰에게 걸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경찰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믿습니다. 제가 한국에 나와서 보니까 한국의 경찰들이 아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고가 나면 사고를 조사하는 경찰에게 삿대질을 하고 어떤 때는 경찰과 싸우는 경우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장 민주적인 사회라고 하는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경찰한테 불순종하면 당장에 수갑을 채우고 땅에다가 밟아 놓습니다. 그래도 반항을 하면 쏘아 버립니다. 법 집행을 위해서 일단 순종하고 나중에 법정에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순리이지 반항은 일체 허용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단, 자기가 잘못했을 경우에 경찰에 걸렸다면, “참 수고하십니다. 저는 걸려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얼마입니까? 처벌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크리스천입니다. 억울한 경우라고 생각이 들면, “제가 별로 위반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판단하신다면 할 수 없지요. 제가 나중에 항의하겠습니다. 일단 주십시오. 그러나 어쨌든 참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최대한으로 협조를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5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벌금을 많이 내는 것을 인하여서가 아니라 내가 잘못했다면 스스로 자신의 양심 때문에 시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또한 한 사회를 살아가는 공시민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한 삶이기 때문에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것이 애국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제일 먼저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선한 국가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지도자를 세우는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을 통해서 이 땅의 우리의 사회속에 선을 이루시고 의를 성취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 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4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선’이라는 단어와 ‘악’이라는 단어입니다. 왜 그들을 세우셨다구요? 선을 집행하기 위해서 혹은 의를 집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사회 속에 지도자를 승인하시고 세우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사회가 보다 선해질 수 있도록 참여할 수가 있습니까? 이 선을 집행하는 도구로 세워주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이것을 적극적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선과 공의가 증진될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신령한 크리스챤이 되면 이 사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신앙이 좋은 사람일수록 사회나 역사로부터 도피하는 현상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치가 오염되고 그동안 잘못된 정치의 현장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정치를 한다고 하면 왜 그런지 그 사람을 잘못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치적이란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정치는 삶의 방식이고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정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크리스천들이 되도록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일까요? 이 땅에 의가 진행되고 그리고 선이 증진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협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회 속에서 증진되어야 할 의의 문제를 보았을 때 우리는 얼마큼 참여하고 있습니까? 환경보호 운동, 신체장애자를 돌보는 운동, 정당하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자신의 표가 도둑맞지 않도록 감시하는 공명선거운동 등 이런 일들을 크리스천들이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 도피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할 사실은, 시민으로서 적극적으로 선을 증진시키는 일에 참여해야 하고 소극적으로는 악을 방지하는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신 목적이 그들을 통해서 선이 증진되고 악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면 이 땅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악이나 부조리나 제도적인 모순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고치고 예방하며 악이 발을 부치지 못하는 사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칼을 잡고 법을 집행하는 정부가 만약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집행하는 도구로서 변신한다면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들의 딜레마입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역사 속에서 이런 딜레마 앞에 직면하는 역사적 정황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경우에 이런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전통은 그리고 이 사상은 본래 성경을 읽은 크리스천들에 의해서 이 땅에서 선포되었던 소중한 시민의 권리이며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나간 시대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시민 불복종의 권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시민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중요한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전제는 더 높은 권세자요 궁극적인 권세자이신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눈앞에 보이는 그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경우를 보십시오. 느부갓네살왕은 그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것에 순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풀무불 속에 들어갈 각오를 하고 왕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더 높은 권위, 모든 권세의 궁극적인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시면 관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도하지 못하도록 금했습니다.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입니다. 만약 그들의 명령을 따르면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명백한 거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양심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노”를 선언했습니다. ‘시민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는 첫 번째 전제는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눈앞에 보이는 권세자들의 어떤 요구나 명령을 향해서 우리는 “노”를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시민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할 또 하나의 전제는 폭력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왕들의 명령을 불복종하고 거절하고 우리의 권리를 요청하고 주장하는 모든 상황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폭력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윤리적인 전통이 가져온 이 세계 속에 기여한 가장 놀라운 선언이 있다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올바른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수단이나 비합법적인 수단, 성경이 승인하지 않은 수단을 가지고 올바른 목표를 추구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노조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수단은 적어도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는 용납될 수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교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위대한 성경적 원리를 끄집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폭력 저항운동의 원리’입니다. 내가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고 주장하는 그 순간으로부터 철저하게 끝까지 폭력이 아닌 정당한 수단과 과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시민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할 때 두 번째의 중요한 전제는 폭력이나 그릇된 수단이나 방법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저항이 우리의 삶의 자세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저항을 하다 보면 어느 경우엔 우리가 저항을 위한 저항을 할 수가 있고 또 저항이 체질화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할 수 없다”라고 명백한 선언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저항을 위한 저항을 체질화시키다 보면 우리의 생리가 체질적으로 생리적으로 부정적인 인간이 될 수가 있고, 이 사회나 역사 속에 아무런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저항이 필요한 순간에서 조차도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권세자들을 향한, 그리고 우리의 삶 그 자체를 향한 순복의 자세가 상실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기의 자식에게 “이웃집에 가서 무엇인가를 훔쳐오라”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가난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때에 크리스천의 아들이라면 그 명령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순종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도적질을 금하셨기 때문이고 또한 나의 양심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자기의 의견을 관찰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너 이렇게 먹고 살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니? 이웃집에 가서 하나만 들고 와라”라고 했을 때 이 아들의 태도가 “당신이 인간야? 나 오늘부터 이 집에서 안 살아”라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올바른 크리스천의 아들이라면, “아버님, 저는 지금까지 아버님의 명령을 거스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적질은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버님에게 모든 것을 반항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님이 명령하시는 어떤 것도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 사건 앞에서 “노”를 선언하는 순간에 있어서 조차도 아버지를 향한 복종의 자세는 상실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시민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자칫 잘못하면 그 저항이 우리의 체질화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증진되는 것이며 우리의 사회가 선한 사회가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크리스천들의 궁극적인 삶의 자세로 첫째는 세우신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의 국가가 선하고 의로운 국가가 되도록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납세의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6-7).
성경은 나라를 향한 우리들의 의무 가운데 하나가 세금을 잘 바치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애국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세금을 내는 목적의 하나는 국가라는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며 또 하나는 세금을 통해서 온 국민에게 혜택을 분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이웃사랑의 실천의 길인 것을 아시나요? 그 세금이 잘 쓰임으로써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낼 때는 정직하게 내야 하며 또한 기쁨으로 내야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세금을 낼 때 좋아하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사람들도 세금을 잘 내기는 하지만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심지어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미국 국기를 보면 색깔이 빨강과 하얀색과 파란색의 세 가지의 색깔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세금을 낼 때에는 그 얼굴이 세 가지의 색깔로 된다고 합니다. 먼저 세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두 번째 고지서를 받게 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그다음에 세금을 막상 낼 때에는 파랗게 된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세금을 많이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더 많은 이웃들에게 축복을 나누어 준다는 것인데 그것이 왜 싫습니까? 이것은 마치 십일조를 더 많이 드리게 되면 수입이 더 많아졌다는 것인데 그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만 미국의 아주 순진한 청년 하나가 목사님의 십일조 설교를 듣고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내 한 평생 저도 십일조를 내기로 결심합니다.”라고 작정했습니다. 그 당시에 10불이 있어서 1불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얼마 후 그의 한 달 수입이 100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0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해서 한 달 수입이 1,000불이 되었습니다. 100불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장사가 너무 잘되어서 한 달 수입이 10,000불이나 되었습니다. 그러자 1000불을 십일조로 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워지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순진한 청년은 십일조를 설교하던 목사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십일조를 내기로 하나님과 목사님 앞에 약속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드려 왔습니다. 10불 중의 1불이 어렵지 않았고, 100불 중의 10불도 낼 수가 있었고, 심지어는 1,000불 중의 100불도 낼 수가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10,000불 중의 1000불은 못 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혹시 하나님과의 약속도 취소라는 것을 할 수가 없을까요?”하고 묻자 목사님께서는 머리를 극적 극적 긁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취소는 안되네. 그러나 이렇게는 할 수가 있네.
여러분, 내가 많이 벌고 많이 공익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인지요? 하나님의 사역에 그 축복을 나눌 수가 있고 또한 이웃들의 축복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인지요? 세금을 내셔야 합니다. 아주 정직하게 내셔야 하고 기쁨으로 내셔야 합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의 사무 회의를 하면서 우리 교회가 아직 조직이 제대로 안 갖추어져 있지만 교회의 사역자들로부터 세금을 정확하게 내는 일을 자진해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추상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이웃을 축복하면서 살 수 있는 놀라운 삶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이요, 기쁨일까요? 그리고 우리의 사회가 보다 더 의롭고 선한 사회가 되어감을 바라보는 것, 비록 어떤 나라도 완전할 수는 없지만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소금이 되고 빛의 삶을 추구할 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통치는 한 나라 안에 확장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이 온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넘치고 평화가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는 이 세계를 보고자 하는 이 목적 때문에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가장 정직하게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국가를 향해서 우리가 이 지상에 사는 동안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주께서 세우신 권세자들에게 복종하십시다. 그리고 선한 국가가 되도록 힘쓰고 참여하십시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일부를 정직과 기쁨으로 나누는 납세의 의무 앞에 충성하십시다.
[구약성경인물 강해설교] 발람 - 하나님의 계획과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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