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열심히 복음을 광야에서 전파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 한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의 사명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세례 요한(막 1:1-8)
1절 아르케 투 유앙겔리우 이에수 크리스투 휘우 투 데우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선언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간단한 구절은 아무 뜻 없이 상투적 표현으로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의식하에서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 격으로 자신의 책의 첫머리에 배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론적 문구가 본서 전체와 연관되는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만 국한되는 서론 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마가는 행 1:21에 나오는 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표현에서 착안하여 세례 요한에 관한 기사의 문두에 이 같은 문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편 마가가 70인 역(LXX)의 총서문이라 할 수 있는 창 1:1의 '태초에'(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아르케')이라는 말로 본서 기록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한 복음의 계시(revelation)가 시작됨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 문구는 본서 전체의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본서의 신적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휘우 데우) -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 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1:11;3:11 ;5:7;9:7; 12:6;13:32; 14:36,61;15:39). 특히 테일러는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창 6:1-4;욥 1:6;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렘 3:19;호 1:10;11:1)를 가리켰으나,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아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성삼위 중 제2위 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아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예수 그리스도 - 본문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그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예수아' 등의 헬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주석 참조).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를 밝히며 인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것이다(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에서 '메시아'가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아성 및 그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주석 참조).
복음 - 여기서 먼저 '복음'(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내용이 '케뤼그마'('선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가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a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Moul, Gospel of Mark, 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시작이라 -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마가는 70인 역(LXX)의 서론적 문구인 창 1:1의 '태초에'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에는 관사가 없으나 영역 성경에는 관사 'the'(즉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한층 부각시켜 주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중(暗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절 호스 게그랍타이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 이두 에고 아포스텔로 톤 앙겔론 무 프로 프로소푸 수 호스 카타스큐아세이텐 호돈 수 엠프로스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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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 저자 마가는 우리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먼저 출 23:20과 말 3:1을 인용하고 난 다음에, 3절에서 비로소 70인 역(LXX)에 의해 사 40:3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마가가 모세나 말라기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단지 선지자 이사야만을 거론한 것은 마가의 구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세한 기술을 피하고자 하는 마가의 저작 의도에 따라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사야의 이름만을 언급했다고 본다. 두 구절은, 2절의 사자가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임무를 말했다면, 3절의 '소리'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보다 강조점을 둔 것으로서, 서로 상관되며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에 대한 구약의 예언적 문구이다. 한편 마가는 이처럼 복음서 초두에 구약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사역과 본질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히브리어 성경 말 3:1에서 인용되었으나, 히브리어 성경과 70인 역은 '네 길을'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직접 개입을 강조하는 '내 앞에서 길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메시아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런 의도적 변용(變用)은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랍비들도 말 3:1의 엘리야와 출 23:20 의사자(使者)를 동일시하여 이 두 부분을 비슷한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이는 고대 근동에서 군주가 행차할 때 도중의 일반 백성들에 대한 교육, 군지 숙식을 준비하던 풍습 등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구야과 신약의 분기점이 되시는 예수의 등장에 앞서 지금껏 진행되어 온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심령을 먼저 준비시키기 위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완벽히 예언된 구절이다. 특별히 여기서 '예비하리라'는 뜻의 헬라어 '카타스큐아조'는 '준비하다'는 의미뿐 아니라 '돌이키다'는 뜻도 함의(含意)하고 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메시아 도래를 위한 준비 사역 중 사람들의 타락하고 부패한 심령을 돌이켜 오실 예수를 영접하도록 하는 회개에의 사역에 가장 큰 비중이 주어짐을 시사한다.
3절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헤토이마사테 텐 호돈 퀴리우 유데이아스 포이에이테 타스 트리부스 아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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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절은 사 40:3의 70인 역의 인용으로서, 70인 역과 본문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70인 역의 '우리 하나님의'라는 말 대신 여기서는 '그의'라는 말이 사용된 점이다. 이는 마가의 의도적 변용일 수도 있고, 마가가 참조한 사본의 원문이 이미 그러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여기서 '그의'라는 말의 선행사는 '주'(퀴리오스)가 되는데, 이 칭호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부르던 것이므로 본 구절은 분명 주 예수에 대한 기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광야에 - 여기서 '광야'(에레모스)란 문자적으로 반드시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버려지고 황량한 처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곳은 개간되어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활용되는 곳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한편 마 3:1에서는 이것을 '유대 광야'라고 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유대 산지와 동쪽으로 요단 저지대, 남쪽으로 사해, 북쪽으로 얍복강과 요단강이 합류되는 지점까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광야 지역은 석회질의 토양 위에 자갈과 바위가 널려 있었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복이 심한 황폐하고 메마른 불모지대로서 여기저기 뱀들이 기어 다니고 야수들이 출몰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곳 부근에는 쿰란(Qumran) 공동체의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쿰란 공동체의 영향력이 요한에게 어떤 양상으로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금욕생활과 엄격한 자제력 등은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 사역이나 복음 전파 내용과 종말론적 사고 등에 관해 전반적인 , 영향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눅 3:1-20 주제 강해, '세례 요한의 세례' 참조). 그런데 세례 요한의 활동무대는 이곳 유대 광야 지역뿐 아니라 요단강 동편 지역에까지 확장되었던 사실이 마 3:5에서 분명히 밝혀진다(요 1:28 주석 참조). 한편 출애굽 당시(출 23:2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사자(使者)를 앞서 보내심으로 그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받게 하셨다. 본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제2의 출애굽 때에 다른 한 사자(즉 세례 요한)을 광야에 앞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파하고 예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로 신령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게 하신다. 눅 7:24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질문하셨다. 광야는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운 곳이다. 실로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참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비로소 행복을 구가(謳歌)할 수 있을 것이다.
예비하라(헤토이마사테) - 이는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예비'하는 그 행위의 긴급성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듣는 즉시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예비하라는 것이다.
첩경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유데이아스...타스 트리부스'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말로서 고대 페르시아나 로마에서 왕들과 그의 측근들을 위해 건설해 놓은 특별한 도로망을 의미한다. 즉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와 죄악으로 일그러지고 구부러진 심령들이 회개함으로 그들 속에 쉽게 들어오시도록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마 3:2, 3;눅 3:8).
기록된 것과 같이 - 헬라어 원문에는 본 문장이 2절 초두에 제시되어 2, 3절에 언급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포괄하고 있다. 문장 어순이 다른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무시하고 3절 하반부에 서술적 형태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록된'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그라프타이'는 완료형 시제로서 어떤 행위가 과거에 완성되어 그 결과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본문은 '기록되어 현재도 효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약 기자들은 성경의 변함없는 권위에 대한 자신들의 강한 신념을 내비치기 위해 구약을 이용할 경우 이러한 어법(語法)을 자주 사용한다. 한편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게 된 것은 요한 자신만의 어떤 깨달음이나 또는 신비한 능력이 반영된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그대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는 또한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구속 사건 역시 우발적으로 일어날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예언되고 기록된 대로 전개되는 것임을 암중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특히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한다(마 2:5;4:4;11:10 등).
4절 에게네토 이오안네스 밥피존 엔 테 에레모 카이 케륏손 밥티스마 메타노이이아스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 마가는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세례 요한의 등장과 행적만을 말하나, 요한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란 사실을 요 1:6에서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누가는 세례 요한의 어린 시절에 그에게 주어졌던 예언을 언급함으로써(눅 1:76, 77) 앞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명의 신적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미 1장에서부터 마가복음은 예수 시대의 배경이나 그 시대의 사실보다 시대 자체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특징이다. 이에 많은 주경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가장 단순 명료하게, 즉 주관적 가감(加減) 없이 예수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 이 말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죄 사함에 관련된'이라고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취지에서 흠정역에서는 이것을 '죄 사함을 위한'(for the remission of sin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에이스'의 용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대부분이 목적격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전후 문맥상 마 10:41;12:41 등에서와 같이 그러한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에 관련된', '...때문에'(because of)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세례'자체가 죄를 사해주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통해 사죄를 받기 위한 하나의 공식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회개의 세례(밥티스마 메타노이아스) - 이는 회개를 중심으로 하여 베풀어지는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회개'(메타노이아)란 어원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로 사용되어 생각과 의지와 인격의 변화, 곧 전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신중한 전환'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진실한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은 죄사함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죄사함에 대한 예비적 단계로서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당시 극도로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일깨워 주고 그들의 몸의 외적 정결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깨끗함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8절 주석 참조, 행 1:4, 5;19:2에서 각각 '물세례와 성령 세례'의 주제 강해를 다루기로 한다)는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의 긍휼을 얻을 단계로 진일보(進一步)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례'(밥티조)는 '물속에 잠기다'는 의미로서 일종의 침례 예식을 뜻한다(마 3:6 주석 참조). 그런데 이 세례는 기독교에서 새롭게 창출해 낸 의식이라기보다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정착(定着)되어 온 것이다(G. F. Moore). 그러나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유대인들에 의해 전통적, 의식적으로 내려왔던 그 세례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죄의 고백에 관한 기본 원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울이 나중에 롬 6:4에서 설명한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일찍이 헬레니즘(Eleusinian cult), 이시스 숭배(Isis worship) 등 여러 밀의 (密意) 종교들 가운데서도 시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회개하고 죄를 자복함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일종의 이교도들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베풀어진 요한의 세례는 유대 민족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 행위로 그들에게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요한은 나중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그가 외친 '회개의 세례'에 대한 음성은 오늘날까지 살아 역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례는 단순히 의식적이고 형식적인데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교의(dogma)에 의해 세례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써 교인(church man)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신자(christian)는 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중심의 회개, 즉 세례 요한이 강조하였던 '회개의 세례'에 있다.
5절 카이 엑세포류에토 프로스 아우톤 파사 헤 이우다이아 코라 카이 호이 히에로솔뤼미타이 카이 에밥티존토 판테스 엔 토 이오르다네 포타모 휘프 아우투 엑소몰로구메노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아우톤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 마가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설교에 거족적(擧族的)이고 대대적인 호응이 있었음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었지만 마태와 누가는 이들 무리들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마 3:1-12;죽 3:7-14). 즉 그들 중에는 형식과 의식을 중요시하는 오만한 바리새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되어버린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일반 민중들을 노략하고 약탈하는 군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고 착취하다가 경멸받고 증오받던 세리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 세례 요한의 신선하고 생명력 있는 설교(즉 회개에 대한 설교)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즉각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본 구절에서 특별히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all)란 표현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와 같은 요한의 회개 운동은 예수 공생애 사역 이전에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수백 년 동안 진정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 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이 대망해왔던 메시아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눅 3:15). 특히 그가 전파했던 메시지의 내용이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였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휩쓸렸을 것이 자명하다.
나아가(엑세포류에토) - 원문상 미완료 시제로서 백성들이 요한에게 '계속해서 나아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마가의 이 같은 보고는 조금 과장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로도 세례 요한의 선포가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상당한 기대와 동요(動搖)를 초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6절 엔 데 이오안네스 엔데뒤메노스 트리카스 카멜루 카이 조넨 데르마티넨 페리 텐 오스퓐 아우투 카이 에스디온 아크리다스 카이 멜리 아그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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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털을 입고...가죽띠를 띠고 - 이는 마태와 마가, 두 기자가 동시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부분으로서 세례 요한의 의식주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마 3:4). 한 마디로 말해 그의 의식주 생활은 단순, 소박, 그리고 청빈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입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데뒤메노스'(having been clothed with )는 아직도 그 옷을 입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말로서 기자는 요한이 줄곧 그 약대 털옷을 입고 생활했음을 보여 준다. 성화(聖畵)를 그리는 화가들은 종종 요한의 광야 생활을 나타내고 그림으로 요한의 옷을 약대 가죽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옷은 길게 축 늘어진 약대 털로 짠 볼품없는 옷으로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입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러한 옷에는 자연히 허리에 가죽 띠를 맬 수밖에 없었다. 이 허리띠는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급히 달려갈 때에도 옷이 펄럭거리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특히 활동성이 요구될 때에 필요한 유대인 의상의 필수품이었다. 한편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때로 털옷을 입었는데 이는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신의 감정을 강력히 상징하기 위해서였으며 심지어는 거짓 선지자까지도 자신을 참 선지자로 가장(假裝) 하기 위하여 이 털옷을 입었다고 하였다(슥 13:4). 그리고 아하시야 왕의 사자들이 왕에게 엘리야를 설명할 때(왕하 1:8)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라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주된 관심인 의식주 생활에서 과감히 탈피(脫皮)하여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고 그들 자신이 청빈한 삶을 하나님 말씀의 '소리'가 되기에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있었다.
메뚜기 - 철저히 율법에 입각한 경건주의자였던 요한은 레 11:22에서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허용하신 곤충 중의 하나인 메뚜기를 먹었다. 이 메뚜기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사용했던 평범한 음식이었다고는 하나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소출(所出)이 줄어든 해에 먹는 일종의 대용 식품이었으나 이 메뚜기는 특별히 봄철에 많이 생겼으며 때때로 큰 떼로 몰려다니곤 했었다(출 10장;욜 1:1-12). 오늘날에도 아랍인들 사이에는 이것의 다리와 날개는 잘라버린 뒤에 굽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소금에 절여 두어 저장 식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은 원래 제사장의 아들로서 부요한 자였지만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가난한 자가 먹는 음식을 먹음으로 생명을 부지해 나갔다.
석청 - 어떤 주경 학자는 이 석청을 그곳에서 서식하던 여러 나무들에서 채취(採取)한 수액일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 말의 헬라어 '멜리'는 야생의 벌꿀을 의미한다. 팔레스틴 중에서도 특히 이 광야에서의 야생의 꿀은 달기로 유명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세례 요한의 생활양식은 철저한 자기 절제와 금욕을 지향하는 나실인(Nazirite)으로 특징지어진다(민 6:8;삿 16:17 주석 참조;눅 1:15). 실로 그는 오직 회개의 세례와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육적인 욕망을 절제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식주 생활에서의 극기의 삶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의 귀감(龜鑑)이 된다.
7절 카이 에케륏센 레곤 에르케타이 호 이스퀴로테로스 무 오피소 무 후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 퀴프사스 뤼사이 톤 히만타 톤 휘포데마톤 아우투
=====1:7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오시나니 - 마가는 여기에서 매우 장엄하고도 위엄에 찬 동사 '오사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케타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그 당시 극도로 고조되고 있던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 사상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표현 양식이다. 이런 표현 양식은 창 49:10에서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구약성경의 예언을 기반(基盤)으로 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동사 '에르케타이'는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서 그분이 지금 막 오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시각은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종말적 역사관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가는 이 동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위치시킴으로써 메시아 오심의 현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하지만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어법상 문장 끝에 나와 있음). 이 '오실'이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설명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라는 것인데, 이는 그분의 전지 전능성에 비추어 볼 때, 요한 자신은 그분의 종의 종이 되기에도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광야에 모여든 유대 백성들 사이에는 요한이 '능력 많은 자'(the mighty man)란 소문이 만연되어 있었을 것이며, 혹시 이 자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에(요 1:19, 20;3:25-36), 이러한 그릇된 오해를 간단한 이 한마디 말로써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탄생에서 뿐만 아니라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 뒤에 오셨다(눅 1:26,36). 하지만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 사이에는 무한과 유한, 영원과 순간, 그리고 태양의 원(源) 빛과 달의 반사광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요 1:15-17).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 세례 요한은 자신과 곧 임하실 '능력이 많으신 이' 사이의 강한 대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들 중에서 한 가지 실례를 사용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주인이 여행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종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먼지로 더러워진 주인의 신발끈을 풀어 신을 벗기고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 주는 것이었다. 마태는 단지 신의 끈(영어의 'latchet'는 오늘날의 구두끈에 해당하는 말임)을 푸는 데만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지만(마 3:11), 마가는 이것을 풀기 위하여서 굽히는 행위까지를 첨가하여 표현하였다. 이것은 곧 임하실 메시아의 위대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세례 요한은 가까운 미래에 임하실 그분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오실 메시아는 영원 전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역사 속에 오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조금도 자기 비하나 미사여구(美辭麗句)나 과장이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 충만한 한 선지자로서 절대 불변한 진리를 사실 그대로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8절 에고 멘 에밥티사 휘마스 엔 휘다티 아우토스 데 밥티세이 휘마스 엔 프뉴마티 하기오
=====1:8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성령으로...세례를 주시리라 - 여기에서 '물'과 '성령'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본질 상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즉 요한은 외적이며 성례전적 측면에서 그리고 성령 세례의 예비적 단계로서 물을 통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적이며 본질적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영혼의 정결과 중생과 사죄의 은총을 가능케 하는 구속의 완성적 측면에서 성령을 통해 각자의 심령에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다. 한편 물과 불, 이 두 단어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엔'은 도구격 조사'...로서'로 번역되지만 분명히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성령은 마치 물과 같이 세례에 대한 방편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두 경우 모두 '엔'을 사용한 것은 두 종류의 세례가 지니는 성례전적(聖禮典的) 의미와 그 각각의 효능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지만 세례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태는 여기에다가 흔히 성경 문학적으로 볼 때 정화, 정결, 심판 등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불'이란 대칭 용어를 사용함으로 성령 그 자체보다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본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마 3:11). 실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불과 같은 뜨겁고 강렬한 역사로서 믿는 자들에게는 내적인 성결과 열정을 제공하였고 불신자들에게는 종말적으로 임할 심판을 예고하였다(행 2:3). 어쨌든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요한은 단순히 거룩한 예식의 측면에서 물을 통한 세례를 집례(執禮)했지만 신적 권위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는 성령을 통해 각 심령에 당신의 내밀하고도 뜨거운 불 세례를 집례 하셨다(Lenski). 이 같은 성령 세례는 예수의 승천 이후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공적으로 활발히 시행되어 오고 있다. 한편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를 성령 세례와는 완전히 관계없는 단순히 물로써만의 형식적 예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형식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 요한의 세례는 예수의 불 세례를 준비케 하는 예비적 단계로서, 이 역시 성령의 확실한 조명과 후원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에 따른 불 세례가 있기 전에도 성령께서는 인간 구원과 진리 전파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셨고 또 그 일에 부름 받은 사역자들의 활동에 깊이 개입하셨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또한 한 가지 사실은 요한이 무리들에게 표현한 바 자신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에 대한 시제와 관계된 부분이다. 요한 자신의 세례에 대해 '세례를 주었거니와'(에밥티사)인 부정 과거형으로 언급한 데 비해, 예수의 세례에 대해서는 '세례를 주시리라'(밥티세이)인 미래형으로 언급하였다. 이 말에 대해 예수께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재차 확증해 주셨다(행 1:5). 이로써 우리는 인간 세례 요한의 단회성과 불완전성 및 한시성(限時性)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세례의 완전성과 영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예수의 이와 같은 신령한 세례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모든 심령들에게 성령을 끊임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요 16:7;행 2장).
[헬라어 성경 마태복음 강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마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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