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이 무너지고 문이 불탄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벽을 비밀리에 탐사하게 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느헤미야를 싫어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이런 자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 방해자들(느 2:9-20)
9절 바아보 엘 파하오트 에베르 하나하르 바에티나 라헴 에트 이기로트 하멜렉크 바이쉴라흐 임미 하멜렉크 사레 하일 우파라쉼
=====2:9
본절의 내용과 왕의 허락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 공백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요세푸스는 그 기간을 무려 5년으로 잡는다(Ant. X i 5). 그러나 몇 달 간의 기도(2:1)와 안타까운 마음의 간청을 했던 느헤미야가 5년씩이나 참고 기다렸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극히 짧은 기간 내에 페르시아를 떠났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군대 장관과 마병을 나와 함께 하게 - 이 같은 모습은,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거절했던 에스라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대조된다(스 8:22) 그러나 본절에서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의 귀환 길에 페르시아 군대를 대동한 것은 그가 에스라보다 불신앙적이어서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느헤미야의 역할이 에스라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즉,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이라는 자격(5:14)으로 예루살렘에 간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율법 교육을 목표로 했던 에스라의 신앙적 차원의 여행과는 표면적으로는 달랐다(스 7:10). 틀림없이 아닥사스다 왕은 (1) 느헤미야가 자신의 '술 관원'이라는 특별한 신분의 소유자이며, (2) 유다 지역의 총독이라는 중대한 직분을 부여받은 자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여 호위병들을 딸려 보냈을 것이다.
10절 바이쉬마 사니발라트 하호로니 비토비야 하에베드 하암모니 바예라 라헴 라아 기돌라 아셰르 바 아담 리바케쉬 토바 리비네 이스라엘
=====2:10
본절과 같은 이방인들의 반응은, 성전 재건 사업에의 참여 요청이 거부된 사건(스 4:1-6)이 있은 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냉전 상태가 매우 심화되었음을 잘 보여 준다.
호론 사람 산발랏 - 애굽 남부 지역인 '엘레판틴'에서 발굴된 문서에는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으로서 언급되며 또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이 문서에 나타나는 두 아들의 이름에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뜻하는 어미(語尾)가 달려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대의 대제사장 가문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점(13:28)에서, 이들은 나름대로 여호와를 섬겼던 자들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기 때문에(스 4:1, 2)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지녔던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여기서 '호론'은 윗 벨호론과 아랫 벨호론(수 16:3, 5)중 어느 하나를 의미한다. 이곳은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산발랏'은 바벨론식 이름으로서, '신(月神)이 생명을 주신다'의 뜻이다.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 - 여기의 '종'(에베드)은 '신하' 혹은 '부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산발랏'의 휘하에 있던 인물이었던 셈이 된다(6:17, 18). 한편 '암몬 사람'은 반드시 '도비야'가 암몬 지역 출신이었거나 혹은 암몬 땅에 살고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도비야'는 (1) 대제사장과 친밀하게 연락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자신을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되며(13:4), (2) 암몬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의미를 갖는 유대식 '도비야'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도비야의 조상이 '암몬 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무난하겠다.
심히 근심하더라 - 사마리아 총독의 이 같은 반응은 (1) 성벽 재건의 방해 공작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에 따른 두려움, (2) 예루살렘의 부흥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가 유다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상실할 가능성에 따른 염려 때문이었다.
11절 바아보 엘 이루샬람 바에히 샴 야밈 쉴로샤
=====2:11
거한 지 삼일에 - 이같이 예루살렘 도착 후 '삼일'을 쉰 까닭은 (1) 오랜 여행에 따른 심신(心身)의 피로를 풀며, (2) 예루살렘의 정확한 상황을 청취하며, (3) 도모하려는 사업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은 에스라에게서도 발견된다(스 8:15, 32).
12절 바아쿰 라일라 아니 바아나쉼 미아트 임미 비로 히가디티 리아담 마 엘로하이 노텐 엘 리비 라아쇼트 리루샬람 우비헴마 엔 임미 키 임 하비헴마 아셰르 아니 로케브 바흐
=====2:12
내가 말하지 아니하고 - 이것은 느헤미야 자신의 성벽 재건 계획이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알려질 경우 그 사업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거나 그 대적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해 올 것을 염려하여 취해진 조처였다. 느헤미야가 심지어 자신의 동족에게 까지 말하지 아니한 까닭은, 그들의 상당수가 '산발랏' 및 '도비야'와 결혼 등 이모저모로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6:18; 13:28).
밤에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 간접적인 보고로만 들은 예루살렘의 형편을 직접 확인 파악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느헤미야가 밤에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이런 확인 활동이 '산발랏'과 '도비야'와 내통하고 있던 유대인에 의해서 감지되지 않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의 '두어 사람'은 문자적으로 '소수'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등을 가리킬 것이다(1:2).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 오직 '느헤미야'만이 '짐승'을 탄 것은, 최대한으로 대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짐승'(베헤마)은 일반적으로는 '말'과 '나귀'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콧소리를 심하게 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느헤미야가 탄 '짐승'은 나귀였을 것이다.
13절 바에치아 비샤아르 하가이 라일라 비엘 피네 엔 하탄닌 비엘 샤아르 하아쉬포트 바에히 쇼베르 비호모트 이루샬람 아셰르 하미포바침 헴 피루침 우쉬아레아 이킬루 바에쉬
=====2:13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 여기의 '골짜기 문'은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한 문(門)이었다. 느헤미야가 하필 이 문을 택한 이유는 그 지경이 가장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용정(龍井)으로 분문(糞門)에 이르는 동안 - 여기서 '용정으로'는 문자적으로 '용정의 앞쪽으로'이다. 이 '용정'은 힌놈의 골짜기와 기드론 계곡의 합류점에서 남쪽으로 약 210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욥의 우물'(Jod's well)로 추측된다. 한편, '분문'은 '골짜기 문'에서 약 450m, 즉 1천 규빗의 거리에 있었다(3:13).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의 최남단에 위치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나온 온갖 쓰레기, 심지어는 성전의 희생 제사 때 나온 짐승의 똥까지 이문을 통해서 힌놈의 골짜기에 버려졌었다(렘 7:31, 32).
성벽이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 이같이 느헤미야가 직접 확인한 상황은 '하나니'의 보고 내용과 동일하다(1:3).
14절 바에에보르 엘 샤아르 하아인 비엘 비레카트 하멜렉크 비엔 마콤 라비헴마 라아보르 타히타이
=====2:14
앞으로 행하여 - 우측, 즉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보면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샘 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 '샘 문'은 '분문'에서 북쪽으로 대략 120m 정도에 위치했으며 그 바로 앞에는 '실로암 못'이 있었다(서론 도표, '성벽 재건의 모형도' 참조). 한편 '왕의 못'은 3:15에서는 '셀라 못'으로 지칭되고 있는 '실로암 못'이다.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 이는 그곳이 무너져 내린 성벽의 잔해 및 온갖 쓰레기 등으로 메워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통하여 본절의 이 기록이 실제 사실이었음을 증명하였다.
15절 바에히 올레 바나할 라일라 바에히 쇼베르 바호마 바아슈브 바아보 비샤아르 하가이 바아슈브
=====2:15
시내를 쫓아 올라가서 - 느헤미야가 나귀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간 것을 가리킨다. 즉 그가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기드론 시내 쪽으로 내려간 후 그 시내를 따라서 북쪽으로 향했음을 가리킨다.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왔으나 - 이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가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에는 생략되었으나 느헤미야가 성벽 탐사를 계속 진행하여 끝까지 다 돌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성벽의 북쪽과 북서쪽은 그다지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절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느헤미야가 성벽의 북동쪽 모퉁이까지 살펴봄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중도에서 돌아온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무난하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북쪽 성벽 지역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느헤미야 일행이 눈에 띌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추측 때문이다.
16절 비하시가님 로 야디우 아나 하라키티 우마 아니 오세 비라이후딤 비라코하님 비라호림 비라시가님 우리예테르 오세 하밀라카 아드 켄 로 하가디티
=====2:16
느헤미야의 조사 활동이 이처럼 비밀리에 진행됐던 까닭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벽 재건 계획이 누설될 가능성이 매우 큰 때문이었다(12절 주석 참조).
방백들(세가님) - 광범위하게 사용된 단어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 의미를 정의하기 곤란하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회중들에 의해서 선출된 백성의 대표들로 본다. 그런데 이 단어는 스 9:2에서는 '두목'이라 번역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방백'(사림)보다는 한 계급 낮은 신분으로 묘사된다(스 9:2). 한편, 이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유다 사람 제사장 귀인 방백 - 이들은 당시 유다 공동체를 구성했던 대표적인 네 계층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의 '유다 사람'은 반드시 유다 지파 사람만을 의미치 않는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유다 지파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구수에 있어서 가장 컸던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이처럼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포로 후 시대라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행정 및 경제의 측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중 종교적 세력을 대표하는 신분으로 암시되는 듯하다. 한편 '귀인'(호림)은 그 문자적 의미로는 '자유로운 자'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이었으며 또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알 수 없다. 다만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의 권세를 갖고 있던 신분 정도로 추측될 뿐이다. 또한 '방백'은 본절 초두의 '방백'과 동일하다. 이들은 '제사장'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행정 분야를 관장하던 신분이었던 것 같다.
그 외에 일하는 자들 - 성벽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한자들을 가리킨다
17절 바오마르 알레헴 아템 로임 하라아 아셰르 아나흐누 바흐 아셰르 이루샬람 하레바 우쉬아레하 니치투 바에쉬 리쿠 비니비네 에트 호마트 이루샬람 비로 니히예 오드 헤리파
=====2:17
본절과 같은 느헤미야의 발언(發言)이 암행 탐사가 있었던 때로부터 얼마의 기간이 경과한 후에 행해졌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후삼일 간 숙고할 기회를 가졌었고(11절), 직접적인 자신의 조사 활동을 통해서 모든 정황을 파악했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암행 탐사 그다음 날에 본절과 같은 발언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당한 곤경 - 여기서 '우리'는, 귀환한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느헤미야가 본토의 유대인들과 깊은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곤경'(하라아)은 1:3에서는 '환난'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성벽을 갖고 있지 못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이 이방인들의 상습적인 노략으로 인해 처하게 된 어려운 상황을 가리킨다(1:3).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수치를 받지 말자 - 유다의 다른 주요 성읍들은 나름대로의 방어용 성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오직 유다의 심장부이자,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만 방어용 성벽이 없어 노략을 계속 당한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주민뿐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백성들에까지 수치일 수밖에 없었다.
18절 바아기드 라헴 에트 야드 엘로하이 아셰르 히 토바 알라이 비아프 디비레 하멜렉크 아셰르 아마르 리 바요미루 나쿰 우바니누 바이하지쿠 이데헴 라토바
=====2:18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토록 한 신앙적 원동력이 되었다(스 7:6).
왕이 내게 이른 말씀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케 한 정치적 원동력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을 주저하고 있었던 현실상의 이유는 (1) '산발랏'과 같은 사마리아 관리의 방해(스 4:7 - 16), (2) 사마리아 관리의 참소에 따른 아닥사스다 왕의 성벽 재건 중지령(中止令 )등의 정치적인 것들이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벽 재건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느헤미야에 대해서 아닥사스다 왕이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은 상당한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2-9절).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 이는 문자적으로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들의 손을 스스로 강하게 했다'의 의미이다(삼하 2:7). 본절은 성벽 재건 사업이 미미하기는 하지만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해준다(JB).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성벽 재건을 시도했었다(스 4:12).
19절 바이쉬마 사니발라트 하호로니 비토비야 하에베드 하암모니 비게솀 하아리비 바얄리이구 라누 바이비주 알레누 바요미루 마 하다바르 하제 아셰르 아템 오심 하알 하멜렉크 아템 모리딤
=====2:19
산발랏 도비야 - 이들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라비아 사람 게셈 - '아라비아 사람'은 앗수르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단 동부 지역의 지배 계급이었다(본 단락 주제 강해, '아라비아 사람' 참조). 한편 '게셈'이라는 이름은 애굽 땅에서 발견된 B. C. 5세기 말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은 그릇에 그 아들 '카이누'와 함께 여신 '한-일라트'(Han-'ilat)에게 헌신한 자로서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아람어 비문에서는 '게달의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요단 동쪽 및 남쪽 지역을 다스리던 자였던 것 같다. 이처럼 '게셈'이 '도바야'와는 달리 '산발랏'의 휘하에 있었던 한 관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6:2에서 이 '게셈'이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함께 느헤미야에게 대면(對面) 요청을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자명해진다.
업신여기고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 대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 시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무기이다. 즉, 하나는 '조롱'이며 또 하나는 '협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업신여기고'(얄라구)는 '조롱하다'등의 뜻이 있는 '라아그'의 사역형으로서, 마땅히 귀중히 여겨져야 할 어떤 대상을 오히려 우습게 여기는 태도를 가리킨다(대하 30:10; 22:7; 잠 17:5). 한편,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일찍이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 관원들의 참소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복구사업을 중지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그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협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사업은 중지령을 내렸던 아닥사스다 왕의 새로운 허락과 명령에 따라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절 바아쉬브 오탐 다바르 바오마르 라헴 엘로헤 하샤마임 후 야칠리아흐 라누 바아나흐누 에바다이브 나쿰 우바니누 비라켐 엔 헬레크 우치다카 비지카론 비루샬람
=====2:20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산발랏 등의 적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사항(7-9절)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느헤미야의 이 같은 태도는 인간의 어떠한 훼방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반영한다. 아울러 산발랏 일당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느헤미야에게 허락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느헤미야가 이미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산발랏 일당은 도리어 왕의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성벽 재건을 방해하고자 기를 썼던 셈이 된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 이 같은 느헤미야의 확신에 찬 응답은(1)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보호하고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과 (2)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던 실제적 체험(1:11)에 근거하였다.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名錄)도 없다 -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할 하등의 명분이나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다(스 4:2,3). 여기서 '기업'(헬레크)은 이스라엘의 땅 분배와 관련해서 사용된 법정적 용어이다. 그런데 이 용어는 자신의 반역 의사를 표명할 때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삼하 20:1; 왕상 12:16) 볼 때, 여기의 '기업도 없고'는 산발랏 등이 이스라엘 백성의 일에 절대적으로 참여할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권리'(체다카)는 행정 구역으로서의 유다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리킨다. 앞의 '기업'이 시민권의 문제와 관련 있다면, 이것은 행정권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명록'(지카론)은 종교적 의식에의 참여권을 가리키는 듯하다.
[히브리어 성경 에스라 강해] 바벨론에서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인 명단(스 2: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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