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구약에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전체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 한다면 신약 성경은 오신 예수님과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다윗의 혈통에 나온 예수님을 증거(롬 1:1-7)
1절 파울로스 둘로스 이에수 크리스투 클레토스 아포스톨로스 아포리스메노스 에이스 유양겔리온 데우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 헬라 원어에서 “종”이란 말은 둘로스인데, 바울 당시, 로마 세계에 있어서 종이라고 하면 그 주인에게 일개의 가구와 같았던 것이다. 예컨대 어떤 역사가의 증거한 바와 같이, 가구 가운데 세 종류가 있었다. 그 하나는 말할 줄 모르는 것(낫이나 호미 같은 것)이요, 또 하나는 반벙어리(개와 같은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하는 노예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 책의 첫머리에 있어서 자기는 오직 예수님을 절대복종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복종은 은혜로 되는 것이다. 곧,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무서운 죽음의 세력에서 그의 피로 바울을 구원하셔서 그의 것으로 삼으신 은혜로 된 것이다.
사도. --- 이것은 헬라 원어로 “ 클레로스”라고 한다. 하나님의 모든 참된 종들이 이 클레로스의 경험을 가졌던 것이다. 예컨대, 아브라함(창 12:1-3), 모세(출 3:10-12), 기타 모든 선지자들(사 6:8-10; 행 1:4-5), 모세(출 3:10-12). 바울은 특히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이것을 받았다(해 9:3-5).
복음 --- 이 말의 헬라 원어 “ 앙겔리온”은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메시아를 보내셔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는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이 약속 성취의 방식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람의 형상(다윗의 자손)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것이다.
택정함을 입었으니.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아포리메노스”니 “갈라놓음이 되었다”는 뜻이다(레 20:26). 이것은, 그의 나기 전에 사도로 거룩히 구별함이 된 것을 가리킨다(갈 1:15). 이렇게 세움이 된 것은, 자기의 힘이나 혹은 자기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세움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은, ① 교만할 수 없고, ② 하나님의 대리자니 만큼 자행자지(字行自止)할 수 없고, ③ 오직 보내신 자의 뜻을 성취하려고 노력할 뿐이며, ④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이 보내신 자의 권능을 의뢰할 것이며, ⑤ 조심하여 그가 대리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의롭게 살아야 한다.
2절 호 프로에펭게일라토 디아 톤 프로페톤 아우투 엔 그라파이스 하기아이스
=========1:2
성경에. -- 이 말은 성경이 일반 문집(一般文集)과 다른 사실을 지적한다. “성”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미리 약속하신 것. --- “약속”하셨다는 말은, 허락하였다는 말과 달라서 인간의 청구가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솔선하여 구원 주시기를 약속하심이다. 이 “약속”은 구약 성도들에게도 하셨던 것인 만큼, 그들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다. 이 약속이, 우리도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15:4). “미리 약속”하셨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게 한다. 곧, ⑴ 하나님의 사랑이 그 택한 백성에게 대하여 어떻게 큼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현재에 복을 주심보다 미래에 더 많은 축복을 간직하여 주신다(시 31:19). 복음은, 아무런 예비나 계획한 바 없이 우연적으로 겨(糖)와 같이 날아왔다가 갈라져 버릴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약속해 오신 영원한 진리이다. ⑵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다가 그대로 이루어 주심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 자이신 하나님을 더욱 믿게 하려 하심이다(요 13:19).
3절 페리 투 휘우 아우투 투 게노메누 에크 스페르마토스 다비드 카타 사르카
==========1:3
육신. --- 이것은 헬라 원어로 “쌀크스”니 보통으로는 “몸”이란 말 “쏘마”와 달라서 인간의 부패성(腐敗性), 혹은 순전히 이성(몸과 영혼)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 대하여 이 말이 사용될 때에는 부패성을 의미하지 않을뿐더러(고후 5:21), 도덕적 연약성도 가리지 않고, 오직 자연적 연약성을 띤 인성을 가리킬 뿐이다. 히 4:15 ,16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 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성자(聖子)께서 육신이 되심은, 우리의 죄짐을 지시기 위하여 대신 욕을 보심이요, 우리와 같이 되심이다(히 2:17). 복음은 그리스도에게 관한 좋은 소식으로 두 가지 요소를 가진 것이니, 곧,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이다. 성경은 그의 중보 자격(仲保者格)을 말함에 있어서, 그의 인성을 역설(力說)하였다(딤전 2:5). 그 이유는, 그의 신성이 그의 인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啓示)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의 주체(主體)는 신성(神性)이다.
다윗의 혈통.---- 사도는 여기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한 구약의 예언을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구약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나시리라고 한 예언이 많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들며 이렇다. 곧, 사 53:1-3에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고 하였다. 이 예언과 같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줄기(왕손)면서도 왕궁에서 나시지 않고 베들레헴의 외양간 한지(마른땅과 같이 적막한 곳)에 나셨다. 그리고 사 11:1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서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 된 후, 다윗의 왕통이 오랫동안 끊어지고 그루터기로 있었다. 거기서 다시 왕손(王孫) 예수님이 나셨다. 위의 “가지”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네체르”요, “결실”이라는 말은 “이프레”이다. 네체르는 마태복음에 있는 나사렛을 생각게 하고(마 2:23), 이프레는 베들레헴 곧 에브라다를 생각게 한다(마 2:5-6 ; 미 5:2). 이것은 왕손 예수님의 생장하신 곳이 나사렛(네체르)과 베들레헴(이프레)이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사 4:2 ; 32:2 ; 겔 34:1-24 ; 렘 33:14-26 ; 마 22:42 ; 용 7:42 ; 행 13:22-23 ; 딤후 2:8).
4절 투 호리스덴토스 휘우 데우 엔 뒤나메이 카타 프뉴마 하기오쉬네스 엑스 아나스타세오스 네크론 이에수 크리스투 투 퀴리우 헤몬
=======1:4
성결의 영. --- 이것은 헬라 원어 “프뉴마 하기오쉬네스”니, “성령”이란 말 “프뉴마 하기온”과 구별된다. “성결의 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계(學界)의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⑴ 예수님의 영혼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이 의미를 취한다면, 이 구절에 말한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은 롬 8:11과 맞지 않는가. ⑵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도 합당치 않으니, 그 이유는, 다음에 말한 제5 학설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⑶ 그저 성령, 곧, “프뉴마 하기온”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학설, 그러나 “프뉴마 하기오쉬네스”란 말은 여기에 한 번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많은 다른 명칭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⑷ 창조 또는 개조의 능력 있는 신성(神性)을 가진 성령에 대한 칭호라고 하는 학설(H. N . Ridderbos). ⑸ “프뉴마 하기 오기쉬네스”는, 예수님이 받으시고 그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이 견해가 정당하다(Greijdanus).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 밖에서 새로 들어오시는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 아니요 이미 그에게 내재(內在) 하시는 성령님의 활동 결과였다.
죽은 가운데 부활하여.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죽은 자들의 부활로서”란 의미를 가진다. 이 말씀에 “죽은 자들”이라고 복수(複數)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여, ⑴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여기 이 말이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부활도 포함시킨 것이라고 하나,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⑵ 여기 복수가 쓰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성립 시키신 부활의 새 시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Nygren, H.N. Ridderbos).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 “하나님의 아들”이란 성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은 삼중 의미(三重意味)의 성호니, 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⑵ 메시아적 하나님의 아들. ⑶ 화육(化肉) 관계의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나뉠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영원하신 아들이 아니고는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가 되실 수 없으며(요 1:18),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메시아는 화육을 필요로 한다. 화육이 없이 어떻게 계시와 구속(救贖)의 메시아 사역을 행하실 수 있을까? “인정되셨”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호리스텐토스”인데, 그 의미에 대하여 ⑴ 바르트(Barth)는 말하기를 “인정함”은, 역사적 행동이 이니고 원 역사적(原歷史的) 행동이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계시(啓示)의 역사적 의미를 거의 무시한데 가까운 위기 신학(危機神學)의 사상이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역사 그것은 계시를 유효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에게 복속된 그 역사는 그리할 수 있다고 한다(행 16:14). ⑵ “인정되셨으니”란 뜻은,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부활이 후에야 인간의 인식에 완전히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⑶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인식에서 인정된 신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 앞에서 영광(人性을 취하신 후 없었던 영광)을 얻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 한다(행 2:36).
5절 디 후 엘라보멘 카린 카이 아포스톨렌 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 엔 파신 토이스 에드네신 휘페르 투 오노마토스 아우투
========1:5
우리가 .--- 여기 사용된 인칭(人稱)이 복수(複數)로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학설들이 있다. ⑴ 리츠만(Lietzmann)과 바이스(B. Weiss)는, 이것이 저작 권위(著作權威)의 복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나 옳은 것 같지 않고, ⑵ 산데이(Sanday)는, 이것이 바울의 동역자들, 예컨대 바나바, 혹은 디모데와 같은 이들을 포함시켜 말한 복수라고 한다. 그러나 디모데나 바나바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가 아니었으니, 이 학설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⑶ 데오도레 즈안(Zajn)의 말한 것과 같이, 이 복수가 모든 다른 사도들까지 의미하였다는 의견이 정당해 보인다(Greijdanus).
은혜와 사도의 직분. --- “은혜”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리스”인데 받을 만한 공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는데 쓰이는 말이다.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이 영생을 받은 것은 큰 은혜이다. 은혜는 사도직(使徒職)의 기초이다. 은혜받은 일 없이 사도가 되지 못할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고 하셨다(눅 10:20). 곧, 사도들이, 그 사도직 실행에 나타난 권능을 보고 기뻐함보다 차라리 그들의 구원받은 일에 대하여 기뻐할 만하다는 뜻이다. 사도직도 귀하지만, 영원히 멸망받을 죄인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한 것이 더욱 귀하다. 혹설에, 여기 “은혜”는 멸망에서 영생으로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기본 은총을 말함이 아니고, 사도의 직능적 은혜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 이름을 위하여.--- “그 이름”(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에게 대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도의 일을 한다고 함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믿어 순종케 하나니 ---“믿어 순종”이란 말은, 신앙과 순종을 분리 시켜서 말함이 아니고, 믿음이 곧 순종이라는 의미이다. 불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대한 반역이다. 믿음 곧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요 수고가 되나, 신앙 순종은 모든 무거운 짐을 그리스도에게로 옮겨 놓는 행동이니, 이는 고역이 아니라 도리어 안식이다.
6절 엔 호이스 에스테 카이 휘메이스 클레토이 이에수 크리스투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 여기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은, 택하심을 받은 성도를 가리킨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속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관계이다(고전 3:23).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자기의 보물, 곧 피 흘려 사신 보물로 사랑하신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야 된다. ⑴ 자기를 그리스도의 큰 사랑의 대상인 줄 알아 절망하지 말고 언제나 자기 존재의 가치를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느껴야 됨. 모든 절망자와 자살자들은, 자기들의 중요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자들이다. ⑵ 자기는 그리스도의 것인 만큼 겸손해야 됨. 고전 4:6-7에 말하기를,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하였다. ⑶ 자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하였다.
7절 파신 토이스 우신 엔 호메 아가페토이스 데우 클레토이스 하기오이스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아포 데우 파트로스 헤몬 카이 퀴리우 이에수 크리스투
=========1:7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고로 우리를 불렀고 우리를 부르신 고로 성도(聖徒)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어 그 백성을 세상에서 불러내심이다. 우리가 성도 된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에만 있다. 인간은, 구원 소망을 자기 자신의 의(義)에 근거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의가 전연 없다(3:10). 만일 누가 자기의 의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기대하며 지낸다면, 그것은 불붙는 집에 앉아서 잘 살기를 꿈꾸는 것과 어리석음이다. 인간의 구원은, 그 자신 밖에서 오는 것이니, 곧 하나님에게서이다.
우리 아버지, --- 구약에도 하나님의 부격(父格)에 대한 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은 신약의 그것과 다르다. 구약의 것은 이스라엘의 국부(國父)라는 뜻으로 씌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를 양자(養子)로 받아들인 고로 하나님을 우리 신자들의 아버지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에게 대하여 “아바 아버지”(8:15)가 되셨다.
은혜와 평강. --- 이것은, 사도가 교회를 축도하는 특별한 복이니, 헬라식 축도(행 23:26)와 히브리식 축도(삿 6:23 ; 삼상 25:6 ; 욱 10:5)를 겸한 것이다. 사도의 축복은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의 그것과 같이 권세 있는 것이다(창 27:1-42) ; 마 10:12-13).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好意)를 가지시고 사랑을 베푸심이다. 하나님의 호의를 얻음은, 온 인류에게 호의를 얻음보다 귀하고 요긴하다. 온 인류가 다 반대해도 하나님만이 “나”를 지지하신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쁜 일이다.
[헬라어 성경 강해 사도행전] 예수님의 부탁 성령세례를 받으라(행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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