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헬라어 성경 강해 요한일서] 새 계명의 명령 형제 사랑(요일 2:7-11)

엘벧엘 2022. 4. 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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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에서는 새 계명의 핵심인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새 계명의 명령 형제 사랑(요일 2:7-11)

 

7절 아델포이 우크 엔톨렌 카이넨 그라포 휘민 알르 엔톨렌 팔라이안 헨 에이케테 아프 아르케스 헤 엔톨레 헤 팔라이아 에스틴 호 로고스 혼 에쿠사테 아프 아르케스

=====2:7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나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 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약 2:8;벧전 2:17).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엔톨레'는 단수이다. '엔톨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8절 팔린 엔톨렌 카이넨 그라포 휘민 호 에스틴 알레데스 엔 아우토 카이 엔 휘민 호티 헤 아코티아 파라게타이 카이 토 포스 토 알레디논 에데 파이네이

=====2:8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 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셨다(4:9;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으로 옛 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치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9절 호 레곤 엔 토 포티 에이나이 카이 톤 아델폰 아우투 미손 엔 테 스코티아 에스틴 헤오스 아르티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우네 있는 자요. - '...하는 자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 레곤'은 문자적으로 '말하는 자'를 의미한다. '호 레곤'은 '하나님을 아는 자'(6절;요 15:4), 그리고 본절의 '빛 가운데 있는 자'(요 12:46)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세 가지 주장이 하나의 주장,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빛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는 윤리적인 계명에 대해서만 아니라 복음 전체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않는다는 것은 모순된 주장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편 본절의 '형제'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신자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본서를 쓰면서 기본적으로 수신자 공동체의 문제와 관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형제'를 일차적으로 수신자 공동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고 있으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을 배제시키지 않고 있다(8절, Barker, Smalley).

10절 호 아가폰 톤 아델폰 아우투 엔 토 포티 메네이 카이 스칸달론 엔 아우토 우크 에스틴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두운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과는 반대로 진정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빛 가운데 거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절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 '사랑하라'는 윤리적 계명에 순정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 '자기 속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토'에서 대명사 '아우토'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빛 가운데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 속에'를  의미한다(Barker, Haas). (2) 빛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빛  안에'를 의미한다(Schnackenburg, Smalley).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될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며,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는 사람들로 걸림돌이 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한편 '거리낌'의 헬라어 '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서 배교나 범죄토록 하는 유혹을 가리킨다(고전 1:23).  이러한 '스칸달론'의 대상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빛 가운데 거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 자신이며(Brooke, Westcott,  Barker)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이다(Stott). 본문은 두 종류의 대상을 모두 내포하는 듯하다. 빛 가운데 거하며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뿐더러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 다. 

11절 호 데 미손 톤 아델폰 아우투 엔 테 스코티아 에스틴 카이 엔 테 스코티아 페리파테이 카이 우크 오이덴 푸 휘파게이 호티 헤 스코티아 에튀플로센 투스 오프달무스 아우투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본절은  9절에 언급된 진술의 부연 설명이다.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눈이 멀어서 스스로의 실체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자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구분하는 분별력을  상실하여 어두움에 속해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함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였으며,  실상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두움 가운데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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