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던 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예수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이 세상이 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며 빛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이 땅에 비치게 되었는데 어둠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빛을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5)
1절 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 카이 호 로고스 엔 프로스 톤 데온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1:1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 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 아르케의 의미' 참조).
말씀이 - 원어상 '말씀(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함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피스튜오), '사랑'(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 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데오스) 앞에 관사 '호'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 서론, '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에서 '말씀(로고스)이 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모습은 20:28의 도마의 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 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2절 후토스 엔 엔 아르케 프로스 톤 데온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 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출 13:9). 특히 시편의 반복적 찬양시들(시118편;136편)과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잠 1:8;4:1-4;6:20;13:1)은 이스라엘의 반복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방(피교육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3절;3:3, 5, 11등). 특히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에는 무려 25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을 주제로 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무척 늙어서 강대상에 올라갈 수 없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 강대상에 올려 줄 때마다 '어린 아들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늘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 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라고 하였다고 전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전파의 숭고성을 볼 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다운 태도이다(시 119:9, 105;살전 2:13).
3절 판타 디 아우투 에게네토 카이 코리스 아우투 에게네토 우데 헨 호 게고넨
=====1:3
만물이 - 원문상 '만물'(판타)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 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전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이라고 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라는 표현은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이러한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1) 창조(히 2:10)와 (2) 구원(10:9;롬 5:1, 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역할을 잘 드러낸다. 본절에서 이 전치사는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1절에서 언급한 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창조 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써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지은바 되었으니 - 헬라어 '에게네토'는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기노마이'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다'(constructed)의 뜻이 아니라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동사는 1절의 '계시니라'(엔)와 대조되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즉 본절의 동사는 피조 된 것을 1절의 동사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절에서는 '만물'(all things, NIV)이 주어인데 반해서 1절에서는 '말씀'이 주어이다. 이로써 (1) 말씀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이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의 현장이며, 수단임에 비하여,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다.
4절 엔 아우토 조에 엔 카이 헤 조에 엔 토 포스 톤 안드로폰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는 '영원한' (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 등장한다(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생명의 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조에)이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 임을 명시한다(14:6;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1:9). 그리고 본절의 두 개의 문장에서 '에이미'('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인 '엔'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생명과 빛은 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 한다.
5절 카이 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 카이 헤 스코티아 아우토 우 카텔라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스코티아)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 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고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카이토 포스 엔 테 스 코티아 파이네이)라는 뜻이므로, 본문은 이 죄악 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 된 세상인 이 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 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의 3인칭 현재형을 구사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 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6:12).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의 원형 '카타람바노'는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이기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닫다', '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 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 이러한 증거는 예수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4:5-26, 31-38;5:10-47;6:25-65;7:14-36;8:12-59;9:39-10:18, 22-39;12:20-36;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 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동사 '카테라벤'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 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이 죄악 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는 사실을 보여준다(히 11장).
[헬라어 성경 누가복음 강해] 세례 요한 어머니 엘리사벳 불임(눅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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