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복은 구원받은 백성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거룩한 성화 구원을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마 5:4)
설교자 : 김서택 목사
우리는 최근 우리 주위에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거나 힘들어하는 많은 분들을 보게 됩니다. 사실 구조조정이나 실직이라 하는 말을 들어도 남의 말처럼 생각했는데 막상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미래를 많이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었거나 사업이 부도났다고 해서 애통해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속으로 아주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어떻게 이를 악물고 참으려고 하지 그렇다고 해서 통곡을 하거나 비통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애통해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자식을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잃게 되었을 때 그때에는 더 이상 슬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울부짖게 됩니다. 얼마 전
어느 청소년 수련장에서 어처구니없는 화재가 나서 십 수명의 유치원 어린이들이 불에 타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아이를 잃은 부모는 물론이고 온 국민이 이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비통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일어날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나서 아까운 목숨을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속으로 힘들어하거나 괴로워하는 것과 도저히 그 슬픔을 참을 수 없어서 겉으로 표현을 하면서 울부짖고 몸부림치는 애통 사이에 그 강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위 천국 백성의 특징인 팔 복을 말씀하시면서 두 번째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이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슬픔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 고통의 감정이 겉으로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애통해하는 이유.
우리가 애통하는 사람을 보려면 어디를 가야 할까요? 아마도 병원 영안실이나 수술실을 가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도저히 그 슬픔을 참을 수 없어서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환자실이나 응급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나면 일단 그 환자는 죽은 것입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환자가 호흡을 멈추었는지 전기로 충격을 줍니다. 몇 번 충격을 주었는데도 가망이 없으면 결국 산소 호흡기를 떼는 것입니다. 그때 가족들은 통곡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가족을 잃었기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눈으로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기 때문에 충격을 받고 놀라서 결국 애통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첫 번째 특징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자신의 영적인 결핍 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그의 영혼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만족할 수 없는 빈 공간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족함을 발견하는 것은 오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런 가난한 마음은 결국 엄청난 애통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선 애통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를 때 세상적인 눈으로 자신을 봅니다. 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뜨면서 어느새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너무나도 기가 막혀서 눈물로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충격과 심한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인간에 대하여 진정으로 애통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최초로 우리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셨을 때에는 우리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손색이 없는 당당한 모습이었고 우리의 몸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였습니다. 사실 구원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불쌍히 여기시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너무나도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들을 봅니다. 도대체 병이 무엇이길래 사람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습니까? 머리는 빡빡으로 밀었으며 온 몸은 사람을 알아볼 수 없게 부었고 코와 입에는 고무호스가 연결되어 있고 옆에 누가 불러도 사람을 알자 보지 못합니다.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면 도저히 눈물이 나지 않으려고 해도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이 어느 한순간 그런 모습으로 중환자실에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애통이 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병원 중환자실외에도 너무나도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그것은 깡패 세계와 사창가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부터 이상하게 인생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결국 인생 밑바닥까지 흘러가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막가는 인생들’입니다. 만일 내 여동생이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윤락 여성이 되어 있거나 내 형이 깡패 세계에서 주먹질이나 하고 다른 사람의 돈을 터는 소매치기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면 속에서 비통한 눈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보신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도 파괴되어 있고 너무나도 망가져 버린 우리의 모습들을 보신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에게서 도무지 처음 모습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면 우리가 자신의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파멸에 빠져 있으며 자기 안에 얼마나 무서운 죄성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수양이 부족하고 마음을 먹지 않아서 그렇지 수양을 더 쌓고 노력을 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완전히 죄의 세력의 노예가 되었으며 자기 안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으며 속으로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죄를 많이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면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면서 부르짖게 됩니다. ‘이 사망의 몸’입니다. 자기 자신이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서 썩은 냄새가 코를 진동하고 구더기가 들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두 번째는 이 절망의 상태에서 도움을 구하기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애통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자기 연민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구덩이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바닥에 누워 있다고 합시다. 그때 만일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냥 절망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 제발 나를 이 무서운 절망과 갈등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그때 무엇이 눈에 보이게 됩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내가 그대의 죄를 위하여 이렇게 손에 못을 박혔노라. 사랑하는 자매여, 네가 그렇게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죄 때문에 내가 이렇게 옆구리에 창으로 찔렸노라’
그때 어떻게 하게 됩니까? 필사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느슨하게 붙잡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엄청난 절망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되어 갔을 때 그는 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은 이 여인의 행동을 불쾌하게 생각했으며 그 여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의심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은 그 동네 사람들은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에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존경의 키스도 하지 않았으며 감람유도 바르지 않았는데 이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으며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그 엄청난 절망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그를 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오직 예수님 한 분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조롱하든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세 번째로 애통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이 무서운 죄에서 건지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천 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죽은 사람과 오늘 이 현대를 사는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한 순간 그것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라는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이천 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과 오늘 나의 죄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하여 너무나도 귀한 분이 고초를 당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을 나무에 못으로 박아 놓고 세워 놓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런데 그 수치 그 고통이 얼마나 엄청난 것입니까? 사람들은 그 십자가 밑에서 조롱하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을 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사실 내가 달려야 했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그 십자가 위에 박으시고 우리에 대한 모든 진노를 그 위에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는 진노나 심판이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부으신 진노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마실 진노의 잔까지 모두 다 마시셨습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는 너무나도 감사해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 애통하는 자에 대한 위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약속을 하십니까?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신의 죄성을 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자를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고 반드시 위로하십니다. 어떻게 위로하여 주십니까?
우선 첫째로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것은 의롭다는 법적인 선언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심정으로 나아온 자를 의롭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없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는 이제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기 전까지 무엇엔가 쫓기는 심정이고 특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죄를 지은 자의 심정은 늘 무엇에 쫓기는 심정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은 가인은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를 위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언제 누가 자기에게 보복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용서를 받으면 더 이상 하나님이 두렵지 않고 심판이 겁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법원에서 법정 구속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판결을 받으러 법정에 서는 피고인은 불안할 것입니다. 풀려날 줄 알고 아무 준비 없이 법정에 섰다가 법정에서 바로 구속되는 사람은 아주 당황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판사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법정에서 나에게 무죄를 선언했다고 합시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습니까? 이 세상 어디서 무엇을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쫓길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며 무엇을 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에게 존귀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전까지는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학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술을 마시거나 일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할 수 있는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보려면 거울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자아상은 다른 사람이 대해주는 태도가 나의 자아상이 됩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잘생겼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를 구박하고 학대한다면 그에게는 그런 자아상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못생긴 사람이라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모두 존귀하게 대하면 그에게는 그런 자아상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은 어떤 자아상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을 정도로 자기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어줄 정도로 존귀한 자라면 도대체 얼마나 존귀한 자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존귀함으로 옷 입혀 주십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압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유치한 농담이나 지저분한 즐거움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쉽게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존귀한 자의 자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존귀함은 돈을 잘 쓰는 것이나 좋은 옷을 입는 것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존귀함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옷을 좋은 것으로 입지 않아도 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만족감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의 존귀한 것은 죄를 거부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존귀한 사람은 쉽게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병든 사람은 너무 쉽게 자포자기하고 너무 쉽게 유혹에 무너집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를 그가 연약하다고 해서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 뒤에는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하시며 인도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완전한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자주 육신의 정욕에 져서 넘어지기도 하고 범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다고 해서 우리를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늘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나 혼자서 안갯속을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지나고 나서 보면 너무나도 정확하게 지름길을 온 것을 알 수 있고 가장 방황했다고 생각했던 기간이 가장 정확하게 바른 길을 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후 여러 번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방황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방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해서 버리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언제나 성령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처음에 애통할 때에는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자기만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위로 받은 후에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위로가 얼마나 엄청난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3. 위로 받은 자가 다시 애통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가 다시 애통할 수 있을까요? 다시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그 애통과는 많은 성질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를 믿음 생활을 하면서 과거의 죄를 생각하고 더 치를 떨면서 애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는 자신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아는 상태에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알지만 사실 죄가 자기에게 미친 그 모든 영향들을 상세하게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씩 하나씩 성경을 알아가면서 과거에 자기가 죄에 빠져 있던 때의 상태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더 심한 부끄러움이 생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영적으로 침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 대하여 몰랐던 사실들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도대체 자기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상태에서 구원받았는지 깨달으면서 다시금 죄에 대하여 치를 떨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환자가 중한 병에 걸려서 장시간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환자는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그 후에 의사는 환자의 수술 받기 전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어떤 부분을 어떻게 수술을 했으며 만약 수술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 환자는 자신의 이전 상태에 대하여 놀랄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것이 심한 슬픔이 되어서 다시 애통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여러 번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초의 애통과는 다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죄 용서 받고 난 후에도 수치스러운 과거의 죄의 습관을 청산하지 못해서 다시 그런 죄에 빠지게 되었을 때 과거보다 더 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고 또 이렇게 알고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용서받았다고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까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일한 죄에 빠지기도 하고 그 결과 무서운 영적인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침체이지 과거처럼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번 범죄하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로 죄 용서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원수 된 상태에 빠지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성령이 소멸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용서를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용서해 주시며 바로 성령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지혜롭지 못한 것이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어 봐야 덕 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간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바로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나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영적으로 침체된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감정이 회복될 때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냥 침체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바로 회복할 수 있는데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슬퍼하고 애통하면서 침체되어 있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부르짖기만 하면 우리에게 은혜를 회복시켜주시고 부어주십니다. 이것이 애통하는 자에 대한 위로입니다. 우리가 다시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전의 애통과는 다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의 애통이며 그들은 이 애통을 통하여 더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더 깊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속으로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밀려드는 부족함을 그냥 참거나 다른 것으로 채우는 것은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상태가 너무나도 비참한 것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원하십니다. 내가 죄인이며 나의 상태가 죄로 인하여 너무나도 비참하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나의 상태를 표현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애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인자도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이었으며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 용서받은 것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또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위로와 은혜를 주십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 설교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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