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마태복음 산상수훈 설교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마 5:1-3)

엘벧엘 2022. 5. 13. 16:29
반응형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내 안에 세상 것으로 채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서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마 5:1-3)

 

설교자 : 김서택 목사

 

 제가 대학 생활을 할 때에는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기숙사에서 제가 보기에 틀림없는 ‘진짜 크리스천이다’는 생각이 들었던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대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학생들은 거의 대개가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인데 보통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신앙생활도 잘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면서 놀기 쉬운데 그 학생은 주일 아침마다 일찍이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에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마도 교회 주일 학교에 교사를 맡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거의 농담도 하지 않고 언제나 진지한 모습으로 생활하였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개 얼굴은 홀쭉하게 여의었고 검은 테의 안경을 썼으며 늘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는 바람에 목소리가 항상 좀 쉬어 있어서 허스키하며 늘 진지하고 농담도 하지 않는 그럼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뚱뚱한 사람으로서 신앙이 깊은 사람은 좀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신앙이 좋은 사람의 개념이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모두 다 가진 사람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즉 우리나라에서도 최고로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도 좋은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으며 직장도 최고의 직장에 다니면서 교회에서는 신앙도 좋고 성경도 많이 알고 헌신적인 그런 사람의 이미지로 변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좋고 열심히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도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업도 변호사나 의사이나 교수나 국회의원이고 집도 가장 부자들만 사는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유명하고 큰 교회의 장로나 집사로서 열심히 봉사하고 명성이 있는 그런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대개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신앙적으로도 뛰어나고 세상적으로도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정이 뛰어나서 율법도 잘 지키며 세상적으로도 성공해서 아주 부자이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그런 사람들을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복있는 자’라고 하면 그런 사람들을 생각했으며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저 천국에서도 복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머리도 뛰어나고 돈도 많은 부자였으며 거기에다가 신앙적인 열심까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교수들의 성경 공부를 몇 년 동안 성공적으로 이끈 한 교수는 저에게 말하기를 역시 교수는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해를 잘하고 또 성경 공부 그룹 같은 것을 맡기면 너무나도 열성적으로 그 일을 감당을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은 몇 번씩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한꺼번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받은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워낙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하는데 신앙도 뜨거운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도 최고로 좋은 대학을 나와서 최고로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도 교회에서도 열심히 주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대개 교회가 너무 무대가 좁아서 교회 밖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머리도 나쁘고 가난하기도 할 뿐 아니라 신앙심도 별로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진정으로 복 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마태복음 5장부터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산상설교라는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산상설교는 너무나도 그 담고 있는 사상이 아름답고 숭고해서 어떤 사람들은 ‘천국 복음의 대헌장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팔복’을 통하여 진정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며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하는 정의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팔복에 해당되는 자들은 우리가 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혀 복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이 좋은 종교의 모습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을 선포하시면서 무엇보다 먼저 그 나라 백성된 자들의 특징을 ‘이러이러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으로 정의를 내리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해당되는 자들은 검은 안경테를 기고 쉰 목소리를 한 종교적인 성향의 사람도 아니고 신앙도 좋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복 있는 사람’을 통하여 자기 스스로 천국 백성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믿고 있는 자들은 점검하게 하셨습니다.

 

1. 전체적인 조망.

 

 우리는 세부적인 부분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적인 그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세부적인 부분에 파 뭍혀 버리면 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중요한 것이 마태복음의 구조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서두에서 밝힌 바 있지만 마태복음은 마치 천을 짜듯이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번갈아 가면서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적어도 마태 사도는 하나님 나라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뗄 수 없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마치 천에서 홀실과 날실이 떨어져 버리면 더 이상 천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에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뗄 수 없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이러한 생애가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나라 백성들인 우리로 하여금 그가 가르친 이러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 받으심과 시험받으신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그러한 삶을 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부터 그가 말씀하시는 산상수훈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공부나 연구만을 위한 산상수훈의 공부는 전적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말씀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마태복음에서 ‘의’라고 하는 것은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의’와는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법정적인 개념입니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의미의 ‘의’이며 대단히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의 ‘의’를 보고 율법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가진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을 더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로마서의 ‘의’를 너무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의의 개념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를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저 사람은 ‘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오직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반쪽짜리로 만드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드는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들로 하여금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가 더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절대로 예수님의 ‘복 있는 사람’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두 번째는 십계명과 팔복 사이의 관계입니다.

 1절,“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여기에 보면 대단히 히브리적인 표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산에 올라가 앉으니까’ 제자들이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랍비들이 자리에 앉아서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은 서서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있습니다. 회당에서는 랍비들이 앉아서 가르치는 의자를 ‘모세의 자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라는 것도 유대적인 표현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가르치려면 입을 열어야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어떤 중요한 가르침에 대하여 청중들의 기대감을 주려는 목적으로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무엇인가 엄청난 말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오직 그의 입만 주목해서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것이나 그 후 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능히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할만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마태 사도도 은근히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해서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로 시내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아 온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신 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 맨 앞에는 십계명이 나오는데 이 십계명은 하나님 백성 된 자들의 특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정의를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이나 혹은 할례를 받은 자나 애굽을 탈출한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십계명에 나타난 신앙과 윤리를 가진 자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나아왔다’는 것은 열두 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특징을 먼저 제시하십니다. 즉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종교성이 강한 모든 사람이거나 혹은 회당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팔복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 자라고 단정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으로 정의를 내리지 아니하셨을까요? 십계명도 하나님의 백성의 정의이며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지 않습니까? 사실 십계명이나 팔복은 같은 것입니다. 단지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하나의 조항으로 지키는 것을 통하여 자기들은 다 잘 지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 말씀을 하시면 ‘이것은 우리들이 다 아는 것 아니냐?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을 달달 외웠는데?’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진정으로 소화했다면 ,즉 십계명을 진정으로 자기의 것으로 믿고 순종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특성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신앙을 점검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팔복은 십계명의 적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적용이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들었다면 그는 바로 적용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씀을 적용하고 그 결과 나타나는 삶이 바르다면 그는 그 말씀을 바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열심히 들은 후에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혹은 말씀을 열심히 적용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기대한 그런 태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말씀을 잘못 알아들은 것입니다.

 

2. 참으로 복이 있는 자.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시작하시면서 ‘이러 이러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복을 받고 또 그 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행복은 쉽게 우리들의 손에 들어와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이러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러이러한 자들에게 예비된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나며 풍성한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개 ‘복’이라는 개념을 ‘소유’의 양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즉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하는 것으로 복을 따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역시 많이 소유하면 많은 것을 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냥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그것이 심리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개념은 ‘사용’의 개념입니다. 단지 어떤 것을 얼마나 많이 붙들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면 가장 바르고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복의 개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자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입니다. 3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기서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가난한 자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역시 가난한 자를 싫어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이 가난하냐고 물으면 그들은 무능하고 게으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생각하는 것이 아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물을 복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무능하고 게으르며 복을 받지 못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보통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면 마음이 약해서 남에게 의존적이고 자기 스스로 아무 것이나 잘 결정하지 못하는 심약한 사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할 때에도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과연 잘 결혼하는지 자꾸 물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자립성이 있어서 웬만한 어려운 일을 닥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혼자서 잘 처리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이야기해 주기까지 그 사람이 그런 어려움에 처했는지 조차도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것은 재물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나 혹은 마음이 심약해서 늘 다른 사람에게 의존적인 그런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물질적인 궁핍이나 혹은 질병이나 사고 등을 통하여 육체적인 고통 이상의 어떤 것을 본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상당히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고가 닥쳐서 그 많던 재산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많은 재산의 상실이나 갑작스러운 가난은 그의 마음을 대단히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물질적인 상실을 통하여 가난 이상의 문제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의 교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자신이 교만하게 살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했으며 자기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자기가 교만하게 살아온 것을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보고 계셨으며 만일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그대로 갚으신다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심령의 가난이라는 것은 단순한 가난이 아닙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통하여 더 속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대개 자기들의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안에 있는 더 본질적인 고통의 원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안에 있는 죄성이요 하나님께 대한 교만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이 하나님께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이 말 보다 더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되면 그는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천국이 열릴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최초의 사역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의 운명은 바로 여기서 갈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는 자꾸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워서 자신감을 잃게 하느냐고 반발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어려운 이 세상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어도 모지랄 판인데 왜 자꾸 모든 것을 죄로 몰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하면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을 바에야 자기 주먹을 믿으라’고 하면서 큰소리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얼마 후에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눈물을 주룩 주룩 흘리면서 자기는 이 세상에서 제일 교만한 자이며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인이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크리스챤이 되는 것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보면 참으로 복 받은 자이었습니다. 그는 머리가 뛰어나고 학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뛰어난 가말리엘 문하 출신의 랍비였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열심히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요 늘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길에서 환한 빛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는 눈이 멀었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들이 무너져버리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죽어 있어야 할 예수는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당당했던 자기는 그리스도의 원수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자기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전에 자랑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학벌을 자랑합니다. 어떤 분은 차에다가 미국에서 자기가 다녔던 학교의 이름을 붙여서 다닙니다. 과거에 자기가 탔던 상장들은 방에 쭉 붙여 놓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오면 자랑을 합니다. 북한의 장성들은 얼마나 많은 훈장을 붙이고 다니는지 앞면은 훈장인지 갑옷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런 세상의 자랑들이 유효합니까?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입니다. 한번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자랑하던 모든 것이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올림픽 금메달이나 영웅이라는 칭호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합니까? 그 모든 자랑들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 붙듭니다. ‘오, 주 예수여, 내가 이전에 자랑하던 것으로 나의 그 무서운 죄를 조금도 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의 그 보혈로 나의 죄를 씻어주소서’ 이것이 시작입니다. 아직 내가 이 세상에서 유능하며 아직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십 년만 젊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직 전혀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며 그는 거의 대부분의 성경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거의 대부분 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불쌍히 여깁니다. 특히 걸식 아동들이나 노숙자들을 걱정하면서 교회가 그들을 구제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때만 졸지 않고 다른 때는 늘 좁니다. 가룟 유다는 한 여인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을 때 화를 내면서 왜 이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책망을 했습니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구제 받아야 할 대상이 자신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직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불행을 통하여 자기 안에 있는 죄성과 끝까지 하나님께 머리 숙이기 싫어하는 교만을 보게 되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자신감에 차 있으며 자기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에 차 있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을 느끼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최초로 하시는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최초로 행하시는 일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최초의 신적인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도 많은 선한 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위험에서 지켜주시기도 하시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초의 신적인 일을 행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철저한 죄성과 부족을 보게 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전혀 그런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부 사이에서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아는데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다릅니다. 자식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난함을 아는데 부모는 그런 아들이나 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똑같은 조건에 있는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는데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철저한 무력함 그리고 죄성을 느끼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뒤에는 그의 정해진 순서처럼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나가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 8:30,“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일단 하나님의 손에 한번 걸려든 이상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을 발견하는 것을 ‘부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는 반드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용서함을 받게 되어 있고 그 순간까지 반드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결국 영화롭게 되는 자리까지 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번 붙드신 자를 결코 중도에 포기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 자체가 바로 구원은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게 하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영적인 갈등이 수년에 걸쳐 계속되는 분도 있습니다. 존 번연 같은 경우에는 이런 영적인 갈등이 18개월 이상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는데 어떤 경우에는 코에서 지옥의 유황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저도 수년에 걸쳐서 심한 영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얼마나 그 번민이 컸는데 대학 기숙사 생활하면서 한 번도 다리를 뻗고 잠을 자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그런 고민과 갈등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심한 영적인 갈등을 겪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그 죄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귀에 들리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귀에 듣는 것보다 더 생생한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습니다. 마음속에 자신의 죄 문제로 인하여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손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는 도저히 그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무엇이라고 말을 했습니까? “주께로 돌아오기까지 내 영혼에 참된 안식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할 수 있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영적인 고민과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붙들고 쓰러지기 전까지 그에게는 영혼의 이 고민을 끌 수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기에 모인 모든 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에 걸려들어서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는 영적인 궁핍과 무능함과 죄성으로 고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무릎을 꿇지 않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수양이나 다른 방법으로, 아니면 할 수 있는 대로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간섭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되었으며 결코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약속을 하십니까?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은 너무나도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하게 사는데 자기만 이상하게 심각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혹시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신기하고 놀라워하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신약성경공부] 성경 말씀의 능력(딤후 3:16)

 

[디모데후서 신약성경공부] 성경 말씀의 능력(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간이 저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저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

el-bethel.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