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장에서는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 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임했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동적인 신앙(서론)[행 1:1-3]
행 1:1-3까지를 보면 사도행전이 어떤 목적과 어떤 목표로 쓰였는가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나온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요즘 교회들의 큰 흐름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그 때와 같은 순수한 신앙과 열정과 그리고 참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승리를 다시 한 번 더 구가하자는 것이 초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사도행전에 있었던 내용들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가장 조심해야 될 것은 이 기록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 행한 기적들, 승리로운 업적들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1:1을 보면 알 수 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 1:1-2)"
누가복음 1장에 가면 전에 쓴 글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눅 1:1-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동일인이 썼다. 처음에 쓴 것은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심을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그 후의 일이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해 받으신 후에" 지금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끝이 아니고 그것은 어떤 큰 일의 한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께서 아직도 남겨 두신 일이 있기에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사도들에게 명하셨다. 또 사도들에게 그 일을 확신 속에서 하게 하기 위하여 부탁했었노라 여기 서문에 쓰고 있다. 그 나머지는 그 일이 어떻게 진전되어 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행전 서두의 말씀으로 우리 신앙의 아주 중요한 부분 하나를 조금 수정해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정적인 신앙으로 가지고 있다. 정적인 신앙은 '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으니 주께 무엇이든지 기도 하면 응답받고 문제 해결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라고 생각하는 신앙의 스타일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신앙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을 설명해 나가는 시각이 어떤 시각인가 하면 '내가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나의 모든 필요와 위기와 곤란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면 응답받는 자가 되었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으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 일의 궁극적인 목적 중의 하나가 우리를 죄에서 꺼내서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완성해 나가는 일에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다는 사상이다.
두 신앙은 확실히 다르다. 정적인 신앙을 가지면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내가 요구하는 목표가 있고 그 일에 하나님이 도우시는 이로 등장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그에 반해 동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며 사랑의 대상인 것과 함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계획 속에 우리가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목표와 방법과 필요가 내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결정되고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서 나의 변화라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싸움거리가 된다. 3절을 다시 보자.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심을 증거하시는데 그러니까 부활하셨다는 것을 무엇의 근거로 삼으시며 무엇에 대한 증거로 삼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기 위해서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과 십자가의 부활이 결국 이제 도래할 하나님이 이루시고야 말 영원한 목적, 궁극적인 목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부분일지언정 '그것이다'라고는 이야기 안 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은 우리 구원에 대해서는 완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 꺼내 놓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전부라고 하지 않으신다. 아직 남아 있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육체적 부활이 있으며 영원한 나라가 있으며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어야 할 것이며 거기서 그리스도와 우리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살아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을 하나님이 혼자서 다 하시지 않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구원해 낸 우리들과 함께 이루어 가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지금 완성하고 계시며 그 나라에 우리를 부르신 것과 같이 또 더 많은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그 일을 우리가 가서 전도해서 불러오게 하신다. 우리에게 우리 피를 흘리며 우리가 무릎 꿇어 기도하게 함으로써 그 나라를 만들어 가신다. 우리는 물론 실력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왜 그토록 많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구약 성경은 거의 모두가 역사서이다. 신약도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쓴 전기이면서 일종의 역사서이다. 사도행전이 역사서이고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관한 역사서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목표를 가지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가 그렇게 멋지게 등장하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는지 그의 끝이 설명되어 있지 않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논쟁을 벌이며 잠자다 떨어져 죽은 청년을 살려 놓고 뱀에 물렸는데도 죽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가 또 잡혀간다. 그러다가 사도행전 28:30을 보면 끝이 시시하게 끝난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것이 엄청나게 시작했던 사도행전의 끝이다. 성령강림으로 엄청나던 장면들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용두사미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사도행전에서 그리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도 아니고 바울도 아니고 스데반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어떤 거대한 작품의 일부분을 조명하는 중에 어느 한 부분을 보이면서 그 일에 쓰임받는 사람들을 그 장면에 비춘 것에 불과하다.
베드로를 추적하고 바울을 추적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 나라를 만드시며 그 나라에 우리를 복된 시민으로 부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시키시며, 그래서 불러들인 그의 백성과 함께 그 나라를 확장하사 또 부르신 자들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하여 더 넓고 더 크고 완전하게 하나님 나라를 키워가고 있느냐를 보이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내 남은 생애 속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가를 봐야 한다. 내가 세상에서 취하고 싶은 목표와 계획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도와주셔야 하는가가 아니라 내 남은 생애를 통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영광, 뜻을 위하여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에 대해 늘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에 들어 있는 사도들의 신앙을 추적해 보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공통적인 핵심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목표를 두고 역사를 진전시켜 가시며 일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는 역사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 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면면이 이어 오시며 확장하시며 언제나 역사를 주도하고 끝내며 영원한 거룩한 역사로만 종결지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그 역사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고 함께 몰입하고 둘을 접붙여 버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사도들이 가졌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는 그들이 이제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요 자녀요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그 나라가 도래한 다음에 황금 보석으로 꾸민 집에서 죽은 다음에 받은 것으로만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시니까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고 꼭 봐야 하는 것이다. 거기는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도 가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황금 보석 집이 아니고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해함도 상함도 없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짓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그 자리에 부름 받아 벽돌을 나르고 삽질을 하고 모래를 나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기쁨이다. 그 기쁨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바울이 이것을 기뻐함은 나를 대접해 줘서가 아니다. 남보다 낫다고 인정해 줘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에 붙여줬다는 것 때문이다. 사도행전 5장에 가면 실패로 이런 식의 설명이 나온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0-41)"
하나님이 이 일에 붙여주는 것으로 해서 매를 맞는 것도 기뻐한다고 했다. 이 완성될 나라, 꼭 생겨질 나라에 우리를 붙여줬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다. 그 나라에 소속하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완성하는 일에 붙여준 것이다. 그것을 기뻐했다.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내가 어떻게 남과 다른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롭고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그가 이루어내실 이 나라는 얼마나 확실한 나라인가,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 나라를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 나라를 만드는 일에 우리를 붙여줬다는 것이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관은 이렇게 바뀐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지금 사도 바울은 죽고 사는 문제에 전혀 개인적인 차원에서 욕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삶이 자신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주께 유익하면 죽는 것이고 사는 것이 유익이면 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들어보니 앞을 못 가리는 양이 너무 많아서 사는 것이 주께 유익이므로 산다고 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사도들의 행적,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근거, 신앙, 목표 원리의 전부이다. 사도행전의 원래 기록 목적이 저들이 주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 나라를 준비하고 계신다. 거기에 우리를 시민으로 자녀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그 복된 나라의 건설에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능력이 많아서,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이 그 일을 못하시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대접해 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동등히 대접해 주고 계신다. 놀라운 대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신다는 것과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사도들이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높고 전지전능하심과 그가 준비하시는 그 엄청난 영광과 계획을 보고 놀라는 동시에 그 일에 부름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과 고난을 감당하게 했으며, 하나님 앞에 부름 받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이 기쁨에서 그 무엇도 저들을 실족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깨우치기로 하자. 그리고 사도행전은 결코 베드로나 스데반이나 바울을 높이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방불한 사람들이 그렇게 멋있게 변화되었다는 증거이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가능한 얘기라는 것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이 축복들이 특권들이 이런 자리에까지 성숙되어 열매 맺기를 기대하며 이 말씀을 대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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