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말씀 강해

[설교학 시편 성경 연구] 시편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엘벧엘 2022. 2. 1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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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시간입니다. 150편의 시편을 어떻게 하나님의 의도대로 설교할 것인지를 생각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시편 설교를 한다는 것은 마치 지리산을 오르는 것 같다.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산이고, 누 구나 한번 올라가고 싶은 산이 지만, 막상 지리산을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산은 너무나 큰 산이기 때문이다. 지 리산을 오르기 전에는 미리 알 아야 될 것이 많고, 또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쉽게 생각하고 올라가다가는 큰 어려움을 당한다. 그러나 잘 준비되어 올라가면 , 큰 감동을 받고 "지혜를 얻는" (지리) 체험을 하게 된다.

시편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해 보인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우리는 교독문을 통해 시편의 언어에 어느 정도 익 숙해 있다. 또한 우리가 가장 좋은 하는 신앙의 고백들이 시편 속에 담겨 있다. 그렇나, 우리가 좋아한다고 해서 정말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좋아서 뛰어 들어가지 보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보고 깜짝 놀라서 물러 나오는 경우도 많이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오히려 우리가 잘 모르는 것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애를 써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편 설교를 하려면, 먼저 시편을 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이미 자신이 시편과 융화되었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편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시편과 우리 사이에는 역사적이며,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거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시편은 지금으로부터 2500-3000년 전에 쓰였다.

문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이해하는 시의 형식이나 특징과는 다른 형태로 쓰여졌다.

신학적으로 볼 때, 시편은 시온산 (성전)과 다윗 왕과 주님의 통치를 중심으로 쓰여졌다. 시편과 우리 사이의 신학적인 거리는 구약 신학과 신약신학만큼 먼 거리를 가진다. 게다가 시편은 신약신학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고, 이후 교회사의 중요한 인물들 이 거의 다 시편과 씨름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우리는 시편과 연속성을 늘 가지면서도, 싸여진 신학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우리는 이 삼중적인 거리를 하루아침에 다 극복할 수 없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주석 몇 권으로 쉽게 극복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과 우리 사이에 있는 거리감부터 인식해야 한다. 이 거리를 느낄 때, 우 리가 어떻게 조금씩이라도 매울 수 있는지 노력해 갈 것이다. 아마 우리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시편의 세계에 점점 익숙해져서, 시편 설교를 보다 정 당하고, 나아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보다 성숙한 시편 설교를 위해, 우리는 몇 개의 준비단계를 세워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한 번에 한편을 설교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물론, 긴 시편은 몇 번씩 나누어서 할 수 있을 것이 다.

 

제1단계. 시편 설교를 위한 기초 연구단계

전통적으로 시편 설교는 시편의 표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시편의 표제 중 대부분이 "다윗의 시"로 소개되며, 상당수의 시들이 다윗의 생애 중 한 때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표제를 붙들 고 단번에 시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표제에 나타난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기 위해, 사무엘서나 역 대기로 넘어가 다윗과 연관된 이 야기들을 끄집어내고 거기에서 메시지를 찾아내어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다 보면, 설교 본문은 시편에서 읽고, 설교는 역사서에서 하는 식이 되어 버린다. 이리하여 우리는 시편 자체가 전하고자 하는 독특한 메시지를 찾아내지 못하 게 된다. 우리는 결국 익숙한 역사서의 이야기로 시편 이야기를 아주 서툴게 하는 셈이 된다. 시 편의 표제는 이 시편을 보는 하나의 창이지, 전체를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므로, 이 표제는 출발점으로나, 혹은 설교 중 필요할 때 예증으로 사용하는 데 만 족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다윗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과 신자의 삶에는 고난과 승리라는 공 통적인 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 설교를 위한 입문적인 연구단계로서, 나는 시편의 형식과 배경을 먼저 찾도록 권하고 싶다. 거의 대부분의 시편들이 모두 히브리 시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라 쓰였으므로, 우리가 전할 시편이 어떤 형식으로 짜여져 있으며, 어떤 배경에서 쓰였는지, 혹은 사용되었는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우리의 설교는 마치 지혜자가 한 말처럼,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처 럼 경우에 합당해야 하므로"(잠 25:11), 우리가 전할 시편이 찬양인지, 감사인지, 애가인지 를 결정해야 한다.

추수감사절에, 애가를 부른다거나, 혹은 초상집에 가서, 찬양 시나 감사 시를 읽는 것은 전혀 어울 리지 않을 것이다.

보통 1월에는 시편 1편을 많이 설교한다. 아마 그때는 우리 문화 속에서 "복"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을 때이므로,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토라 시편이 아주 어울린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최근에 친구 아버지의 추모예배에서 121편을 택하여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시편은 신뢰의 시로서 집을 떠나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노래" 이기 때문에, 아직도 고인이 천국에 갔을지 확신할 수 없는 유족에게 아주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으로 둘러 싸인 묘지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를 묻고 (1절),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라고 답하는 (2절) 시인의 고백은,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한 번은 어느 나라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예배에 참석하여, 시편 132편을 택하여 말씀을 전해 보았다. 이 시편은 다윗의 선택과 시온의 선택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으며, 다윗의 맹세와 서원이 주님의 맹세와 약속과 아름답게 짝을 이루고 있기 때 문에,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교회에 아주 적절한 은혜를 주었다.

한 번은 내가 돕는 한 선교회에서 현지 사역자 신학교육을 마치는 졸업예배가 있었는데, 시편 115편을 선택하였다. "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1절)에서 계속 "돌리다"는 말씀이 반복되며, 오직 영광은 주 님 만이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또한 이어 나오는 우상에 대한 조롱이 이념과 물질과 나아가 자신을 우상화시키는 천부적인 경향 이 있는 우리들을 때려주고, 오직 주님 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시인의 간절한 말씀이 우리에게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시편의 다양한 형식과 배경을 이해할 때, 우리도 다양한 목회 현장 속에서 우리 설교를 자유롭게 풀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한 해의 순환 속에서 살기 때문에, 여러 절기와 다양한 인간 상황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신년 설교( 1, 14, 19 , 90편)와 수난절 (22편), 부활절 (24편), 가정주간(127편)과 어머니 주일 (128편), 무더운 여름 (42 편)과 결실의 가을(104:14-2 4), 그리고 감사절(136편)과 성탄주일(96-98편)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므로, 의식적 배경과 그 배경에 어울 리는 형식을 찾을 필요가 있다. 시편 92편은 그 표제에 있어서 "안식일의 찬송 시 "라고 한다. 이 시편은 안식일 주제와 분위기에 아주 어울린다. 안식의 감격과 결단을 새롭게 필요할 때, 우리는 이 시편을 새롭게 들어 볼 수 있다. [1]

 

제2 단계. 주석 단계

어떤 설교도 튼튼한 본문 이해의 바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형식과 배 경을 결정한 후, 이제 주석 작업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설교의 최종적인 힘은 본문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에, 본문 분석에 시간을 쏟는 것은 결코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의 시편 주석을 보면, 한 절 한 절을 너무나 꼼곰히 설명해 나가고 있다(Nicene and Pos t-Nicene Fathe rs, vol 8, 700쪽). 카시오도루스의 시편 주석 역시 3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Ancient Christian Writers, 51-5 3권), 너무나 치밀하게 본문을 다룬다. 몹슈에스테의 데오도르, 종교개혁시대의 루터나 칼빈, 그 리고 근대와 현대의 많은 주석 가들과 설교자들은 시편의 원래의 의미를 찾는 데 상상할 수 없는 심혈을 거두었다.

스펄젼도 시편 설교를 엄청나게 많이 하였으며, 때로는 한 절 속에 두 시간 분량의 설교를 할 정 도로 많은 의미를 집어넣지만, 여러 곳에서 시편 전체를 강해한 사실은 아주 인상적이다. 스펄젼의 기발한 설교도 본문 주석의 바탕 없이 순전히 영적인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편 주석을 시작할 때, 우리는 선배들의 주석 작업을 일차적으로 참조할 수밖에 없다. 먼저 우리에겐 박윤선의 시편 주석이 있다. 이 주석은 시편 설교를 하는 데 기본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특별히 이 주석 은 설교의 관점에서 시편을 보 려고 애를 많이 썼다. 그러나 이 주석은 초판이 1957년에 나왔고, 제3판이 1966년에 증보되어 나왔기 때문에, 주석의 내용은 칼빈과 델리취를 따라 비교적 건실하나, 설교의 예화와 신학적인 토론이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시편 설교를 가장 잘 한 사람은 김정준이라고 생각한다.

1987년 한국 신학 연구소에서 출판한 만혜 김정준 전집 5권 <시편 명상>은 150 편 전체를 다 다루고 있고, 아주 멋있는 제목과 시편의 형식과 내용뿐 아니라, 그가 살고 싸우던 분위기를 잘 담고 있다. 그는 역사비평학을 성경해석에서 가장 과학적인 도구라고 믿고 신학을 한 사람이지만, 그의 역사비평학적인 분석이나 전제는 시편 명상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시편 자체가 역사를 넘어 우리에게 말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풍부한 신학을 담고 있는 시편에, 역사비평학이 적용이 안된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또한 이웃나라 사람인 내촌감삼의 시편 주석은 전권을 다 한 것은 아니 지만, 상당한 통찰력을 주고 있으므로 참조할만하다.

요즈음에 우리 주위에 시편 주석들이 많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최근에 미국에서 나온 가 장 권위 있는 시편 주석 중 하나인 WBC Series 주석 중 1권과 3권이 번역이 되었는데, 문제는 번역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칼빈과 델리취와 나이트(G. E. Knight)의 주석도 번역되었으나, 번역의 질이 높지 않아, 내용 확인을 위해서는 원문을 보아야 할 때가 많다. 시편 주석에서 독일 학자로서, 상당히 영적이며 높은 학문성으로 주석한 아더 바이져 주석 (<국제 성서 주석> 1992)은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의 기초 단계로 주석 작업을 할 때, 몇 개의 주석들을 원어로 참조하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2]

주석을 할 때에는 단어와 구의 의미를 하나씩 차근차근이 살피는 습관을 기른다고 하면, 시간이 갈수록 주석하는 힘이 많이 붙게 되고, 주석 자체가 재미있어질 것이다. 주석을 하는 과정에서 은혜를 받고, 그러는 사이에 뭔가 설교를 위한 힌트를 얻게 된다.

제3 단계. 구조 분석과 수사 분석의 단계

시편의 형식과 배경을 결정하고, 주석을 끝낸 후에 구조를 새롭게 짜 볼 필요가 있다. 시편의 구조를 짜는 이유는 이 시편 자체 속에 있는 시상의 흐름을 찾기 위함일 뿐 아니라, 우리 설교의 대지를 서너 개로 나누기 위함이다. 시편 자체가 핵심 단어를 통해 멋있는 구조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면, 우리 스스로 설교의 뼈대를 새로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고, 성경의 흐름을 따 라 자연스럽게 넘어가도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 분석은 분석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주로 내용과 시상의 전환), 우리는 좀 더 객관적인 구조 분석을 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 수사 비평의 필요성을 느낀다.

수사 비평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루터가 잘 말했다. [3] "나는 문학에 대한 지식 없이 순수한 신학이 전혀 설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학이 쇠퇴해질 때, 신학도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정말 이지, 하나님께서 언어와 문자 가 생기게 하시고 발전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없었던 것처럼....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시인과 수사학자가 나오길 소원한다. 이는 그 어떤 다른 방법 보 다도 이 연구가, 사람들로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적절하고 기쁘게 다룰 수 있도록 가장 잘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이 젊은 이들로 시와 수사학 연구에 애쓰도록 권해주길 간청한다 (이 간청에 무게가 있다면).

최근에 김지찬은 수사 비평을 새롭게 아주 잘 정의하고 있다. "성경 기자는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과 기교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설득 언어 장치를 우리는 흔히 수사법이라고 부른다. 수사법은 내용이나 메시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장식적 요소라는 통념이 많이 깔려 있으나 이는 큰 오해이다..

.. 결국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수사법이란 저자가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본문 가운데 깔아 놓은 의미의 단서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김지찬, <언어의 직공이 되라> 264).

우리는 수사적인 분석을 함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핵심적인 용어"들을 찾으며, 이것들이 어떤 사회적, 종교적 배경과 갈등 속에서 설득력 있는 의미를 전달하는지 찾으려고 한다. 예로서, 마틴 루터 킹이, "나에게 꿈이 있다, 나에게 꿈이 있다, 나에게 꿈이 있다"를 세 번이나 반복할 때,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며, 반복을 거듭할수록 무서운 힘을 가지며, 어쩌면 그의 온 생을 다 바쳐 꿈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의지와 청중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줄리어스 시저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내가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라고 말할 때, 그는 얼마나 자신 만만했으며, 그의 부하들은 얼마나 큰 힘을 얻었겠는가? 존 F. 케네디는 독일이 양분되었을 때, 베를린에 가서 "Ich bin ein Berliner"라고 말했다.

문법적으로는 틀린 말이었지만, 듣는 모든 청중들은 전율하였다. 시편의 시인들 역시, 핵심 단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 종교적인 레토릭을 사용하고 있다. 핵심 단어를 통한 수사 비평을 몇몇 시편에 적용해 보자.

(1) 시편 1편, "알곡"과 "쭉정이"

이 시편에 대해 서인석은 구조주의를 통한 분석을 하면서, "이 시편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율법 (토라)이 아니요, 인간인 것이다. 율법은 인간의 보조자에 불과하다.

인간은 율법 안에서 그의 낙을 얻고 그것을 끊임없이 공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인간이 그 중심부를 찾지 하고 있지, 결코 율법이 아니다. 율법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율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율법의 길을 따라 걷는 인간은 생명의 지혜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4:336)라는 독창적인 결론을 던지고 있다. 그는 구조 분석을 통해, "복 있는 사람"이 "율법" 보다 더 중심적인 자리에 있음을 간파해 낸 것이다.

또한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이 시편을 볼 때, 첫 소절(1-3절)에서 의인을 묘사하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ets)"의 은유가, 둘째 소절에 나오는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mots)"의 은유와 아름답게 연결되며 또한 강한 대조를 이룬다 .

히브리어로 겨 (mots)와 나무 ('ets) 사이의 음성학적 평행이 아름답다. 이 둘은 그 발음이 유사 하지만 그 본질은 너무나 다르다. 의인은 나무처럼 뿌리가 있어 든든하게 서서,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지만, 악인은 쭉정이처럼, 아무런 뿌리가 없어 바람 ( 역사의 심판과 종말론적 심판)에 날려가 버리고 말 것이다.

 

(2) 시편 19편, "피하여 숨을 수 없는 하늘의 태양과 양심의 태양 토라" 시편 19편은 그 주제와, 하나님에 대한 호칭과 문체에서, 태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전반부(1-6절)와 주님의 토라를 노래하는 후반부 (7-14절) 사이에 명백한 대조 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에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 두 소절이 한 시편으로 묶여졌을 때에는, 분명히 어떤 연결 고리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시인은 두 개의 대립적인 단어를 통해, 명백하게 잇고 있다. 첫째로 시 인은, "하나님의 계명은 순결하여 (밝아서, bara) 눈을 밝게 하도다(me'irat)"고 말한다. 시인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밝은 태양의 영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6절을 보면, "해는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율법도 우리의 "숨은 허물"을 드러낸다 (12절). 즉, 사람이 해를 피해 숨을 수 없듯이, 그는 주님의 율법을 피해 숨어 살 수 없다. 다윗은 모든 사람을 속이고 완전범죄를 했지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삼하 12:12).

따라서 시인은 태양이 창공을 주관하는 것처럼 토라가 우리의 삶을 주관한다고 말한다. 태양은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또한 혹독한 더위를 주는 것 같이, 토라도 생명을 줄 뿐 아니라 우리를 말린다. 태양 없이 이 우주에 생명이 존재할 수 없듯이, 율법 없이 참된 인생이 있을 수 없다.

 

(3) 시편 23편의 "푸른 초장"과 "상"

시편 23편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시편이기 때문에, 오히려 설교하기 어려운 시편이다. 뭔가 새로운 관점이 없으면, 다 아는 내용을 진부하게 전하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나는 "푸른 초장"(1 절)과 "상" (5절)의 두 영상을 통해, 이 시편을 새롭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시편 23편은 "신뢰의 시"로서 목자이신 여호와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알려져 왔으나, 5절에서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시는" 영상은 단순한 목자의 영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초장"과 "상"은 의미론적으로 연결되나, 배경(setting)은 다르다. 전자는 목장이지만, 후자는 잔치 집이기 때문이다. 즉,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듯, 잔칫집 주인이 자 신의 가장 귀한 손님에게 "상 "을 베풀어 준다. 목자가 양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처럼 (2절), 주인은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준다" (5절). 이리하여 시인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1절)고 말할 뿐 아니라, 나아가 "내 잔이 넘친다"로 마친다 (5절). 주제가 흘러가는 관점에서 볼 때에도, 목자로부터 잔칫집 주인으로 넘어가는 이 전환이 더 자연스럽다. 시인은 양처럼 긴 광야길을 다 간 후 (광야 연단), 이제 따뜻한 장막에서 영접받는다 (약속의 땅). 친절한 주인이 성대한 식사와 넘치는 잔으로 그에게 채워준다 (성령 충만한 삶).

 

(4) 시편 42편. "시냇물"과 "눈물"과 "폭포와 파도 " 시편 42편 보다, 우리 (인간, 성도)의 목마름을 강하게 부각시킨 시편이 없는 것 같다. 시인은 목마른 사슴처럼 간절히 "시냇물"을 찾는다(1절). 시편 23 편의 시인처럼, "잔잔한 물가"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잔잔한 물을 찾는 시인 에겐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물이 주어 진다. 주님은 그에게 "눈물"을 주셨고,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3절). 마치 선교지로 부름받고 나간 선교사가, 갑자스러운 아내의 열병으로, "울려고 내가 왔나"는 탄식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시련은 "눈물"로 마치지 않는다. 그에게 이젠 "폭포"가 덮치고, "깊음"과 그 "파 도와 물결"이 그를 삼켜버리는 시련이 따른다 (7절).

시인은 물을 찾고 있었으며, 드디어 발견했지만, 그 물은 생명을 주는 물이 아니라, 그를 파괴하는 물이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물을 보내시되, 생명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물을 보내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는 결심으로 넘어간다. 이 결심이 후렴처럼 세 번이나 나타나, 그의 확고한 결단을 강조해 준다 (42:5, 11, 43:5).

 

제4단계. 신학화의 작업의 단계

설교에 신학이 없을 때, 설교의 깊이가 없어진다. 아무리 본문 강해를 힘써도, 마지막에는 어떤 신학적인 강조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궁극적으로 내가 믿는 것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주 석의 깊이와, 수사학적 분석의 통찰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초점이 없다면, 성도들은 말씀을 다 들은 후, 무엇을 마음에 간직하고 갈 것인가? 나는 궁극적으로 신학적인 메시지를 형성하기 위해,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 어떤 신학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했는지 찾기 위해 애를 쓴다.

(1) 시편 자체의 신학

시편 속에도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의 소재가 많이 있다. 우리는 시편 안에서 창조와 타 락과 구속과 완성에 대한 깊은 명상을 보게 된다. 창조의 주제에 있어서 시편만큼 풍부하게 다루고 있는 성경도 없다. 우리의 창조신앙은 지나치게 창세기 1-2장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에, 시편 기자들이 이 두 본문과 창조 전통을 어떻게 새롭게 이해하며 해석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타락 문제에 있어서도, 시편만큼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심도 있게 다양한 맥락에 서 말하는 성경을 찾기 힘들 것 같다 (12, 14, 51). 바울이 인간의 전적 부패를 말할 때, 인용하는 본문들은 주로 시편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30:4). 하나님의 구원도 실존적이며, 제의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나타나며, 특히 거룩한 용사로서 주님이 친히 구원하신다.

시편의 신학에 있어서, 토라, 다윗 왕, 언약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김정우 시편 강해 1), 시온은 독특한 자리를 잡고 있다. 주님은 시온에 성육신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온에서 주님의 임재와 부재를 체험하였으며, 그들은 시온에서 창조 (48편)와 에덴 (46편)과 순례의 종착지 (84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122편)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87편)를 보았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장소로서 시온은 옛 시내산을 이어받으며,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늘의 시온성"을 가리키고 있다 (히 11:16). 우리는 시온의 모습 속에서 참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고,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기 다린다.

 

(2) 신약 신학에서 본 시편의 신학

시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신약의 시편 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신약은 다윗 시편을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다. (2, 16, 32, 69, 109, 110; 막12:35-37; 행 1:16; 2:25; 4:25; 롬4:6; 11:9; 히4:7). 시편 2편을 제 외하고는 이 모든 시편을 다윗의 시편이라고 한다. 신약에서는 다윗 저작권에 근거하여 기독론적이며 종말론적인 논증을 이끌어 가고 있다 (막12:35 -37; 눅20:41-44; 마22:41-45; 행2:22-35; 13:36-37).

이리하여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뿐 아니라 박윤선도 신약의 관점을 따라 시편을 종말론적이며 메시야적 방법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이 방법은 시편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방법들을 따른 시편 해석들을 보면, 구약 자체의 맥락이 사라지고, 마치 신약성경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즉, 신약의 의미를 구약에 덮어버리고 있다. 게다가, 신약이 인용하지 않는 본문을 신약신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할 때, 해석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3) 정경적 관점에서 본 시편의 신학

따라서 나는 정경적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고 본다. 정경적 해석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다. 누가복음 24:27에 따르면, 주님은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한다. 이 말씀을 볼 때, 신약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정경적 해석에 대한 한 샘플 혹은 패러다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은 완성된 구원사의 관점에서 구약 전체를 새롭게 보시는 눈을 가졌고, 제자들에게 이 관점과 예증들을 가르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을 볼 때, 최종적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인 신약의 관점, 특히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보고 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즉, 신약에 단지 인용된 시편만이 아니라, 시편 전체를 신약신학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 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의 정경적 해석은 전통적인 종말론적 메시야적 해석과는 다르다. 후자는 시편 자체의 지평과 역사 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전자는 인정하면서도 유기적인 연관성을 살핀다.

구체적으로 제왕 시들을 살펴보면, 그 시들은 너무나도 크고 위대한 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왕의 모습 은 역사적 왕의 모습을 넘어간다. 제왕 시에 나타난 왕복은 어떤 역사적인 왕에게도 맞지 않는다. 그 옷은 예수에게 와야 맞는다. 즉 시편 속에는 미래적 조망이 있으며, 사람들은 메시야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다(시 110편). 흐릿했던 메시야 대망 사상은 신약으로 나아가면서 아주 명료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정경적 해석은 신약의 눈 이전에 구약 자체에서 미래적 조망을 찾으며, 또한 신약의 봉우리에서 시편을 새롭게 보는 작업이다. 이것은 신약의 빛을 구약에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빛을 신약으로 끌고 오며, 또한 신약의 빛으로 구약을 새롭게 비추어 보는 작업이다. 그러나 먼저 구약의 발판에서 빛을 찾아 형성하는 것이다. 결국 구약 자체의 본문을 보고 나면, 최종적인 단계에서 신약으로 가는 빛이 생기게 된다.

구약을 어떻게 신약의 빛 속에서 정당하게 볼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지침으로서, 신약이 구약을 인용한 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 예수께서 기독론적, 종말론적, 신학적으로 해석했기에 신약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도 신약의 빛으로 조망해야 한다.

 

제5단계. 지평 융합의 단계.

이제는 우리가 여러 지평을 융합할 단계가 되었다. 크게 보자면, 이제 우리는 본문의 지평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을 떠나, 우리 현실의 지평으로 넘어와야 한다. 우리의 현실적인 지평 역시 본문의 지평만큼이나 만 만치 않다. 우리의 현장은 수많은 변화와 다양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까만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진 한국사람이며,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고, 다양한 삶의 환경 (연령, 지역, 배경, 직업) 속에서 살고 있다. 물론 우리의 영적인 오리엔테이션 (장로교, 침례교, 오순절 등)이나 기 호도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시편 설교는 결국 목회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가져야 한다.

나는 내 설교의 목회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위해 스펄젼의 설교집을 읽어 본다.

목회 현장의 소리는 주석이나 신학의 소리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스펄젼의 설교를 읽으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간절함을 느껴진다.

우리가 전할 말씀은 결코, 주석이나, 문학적 분석이나, 신학적인 메시지일 수 없다. 우리의 설교는, "오늘이라는 날을 살고 있는" 신앙 공동체 구성원이 개인으로 그리고 전체로 하나님 말씀 앞에 서도록 요청하는 선포이며 설득이다.

 

따라서 우리는 묵상과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설익은 설교는 설익은 밥만큼, 소화하기 힘들기 때문에, 원고를 정리하면서 계속 기도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단계에서 설교 원고를 새로 쓰도록 권하고 싶다. 원고가 정리되어야 큰 무리 없이 설교를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 도중에 지나치게 원고에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 은혜 주시는 대로 담대히 전할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마지막 단계. "복음을 전하라"

우리가 설교 준비를 마치고 "두렵고 떨림으로" 강대상에 올라갈 때, 우리의 최종적인 초점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우리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복음 전할 사명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복음 외에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과 힘과 희망을 주는 구원의 메시지가 없기 때문에, 어떤 시편을 전하든지 우리는 복음의 높은 고지에 서서 전하기를 힘써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 전하는 자는 힘이 나고, 듣는 자는 아멘으로 화답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성도들이 주님과 올바른 영적-언약 적 관계를 갖도록 격려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복음으로 새로워진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격려해야 할 것이다.

[말라기 히브리어 성경 좋은 말씀] 이방신의 딸과 결혼하는 유대인(말 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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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2장에서는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왔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여호와의 신앙이 퇴색해져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하여 우상을 숭배하게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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