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야고보서 2장 헬라어 성경말씀] 교회에서 차별 대우하지 말라(약 2:1-5)

엘벧엘 2022. 3. 30.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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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에서는 성도 간에 서로 차별 대우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세상이나 교회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서로 육적인 가지고 차별 대우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차별 대우하지 말라(약 2:1-5)

 

1절 아델포이 무 메 엔 프로소폴렙시아이스 에케테 텐 피스틴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테스 독세스

=====2:1

   내 형제들아 - '내 형제들아'의 헬라어 '아델포이 무'는 수신자들에 대한 야고보의 사랑의 감정을 잘 나타내며, 또한 이는 새로운 주제로 전환시킬 때 사용하는 표현방식이기도 하다(5절; 1:19; 3:1; 5:7). 이제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경건한 삶을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권면한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케테 텐 피스틴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 테스 독세스'이다. '테스독세스'(영광의 주)와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다섯 가지이다. (1) 혹자는 '영광'을 '믿음'과 연결시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있는 믿음'이라고 해석한다(Schlatter, Zahn, Grotius). (2) 혹자는 '영광'이 '주'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해석한다(KJV, RV, Moo, Burchard).(3) 혹자는 '영광'을 '사회적 지위'로 해석하여서  본문이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Erasmus, Calvin) (4) 혹자는  '영광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독세스'를 형용사적으로 보아  '우리의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해석한다(Cantinat, Chai-ne, Ropes, Hooker, Luther, Mayor). (5) 혹자는 동격으로 보아 '영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Bengel, Lenski, Tasker, NEB). 이 다섯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테스 독세스'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지니신 '영광'이시다(눅 2:32;요 1:14; 17:5; 히 1:3). 한편 '받았니'의 헬라어 '에케테'는 시상이 현재로서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외모로'의 헬라어 '엔 프로소폴렘프시아이스'는 70인 역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경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본래 이것은 '한 사람에게 얼굴을 들다 '라는 의미로서 한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 즉 같은 상황에서 서로 차별을 두고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Manton).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며 그 중심을 보신다 (삼상 16:7; 행 10:34; 롬 2:11; 엡 6:9; 골 3:25).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유익을 취하기 위하여 외부적인 조건에 얽매이는 것은 잘못이며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걸맞지 않다.

2절 에안 가르 에이셀데 에이스 텐 쉬나고겐 휘몬 아네르 크뤼소다크튈리오스 엔 에스데티 람프라 에이셀데 데 카이 프토코스 엔 휘파라 에스데티

=====2:2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2-4절까지가 1절의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권면의 논중 임을 나타낸다. 본절과  3절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행위에 대한 예이다.

    만일 너희 회당에...들어올 때에 - '회당'(쉬나고겐)은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일(눅 12:11)이나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 (눅4:15,20,28)를 의미한다. 야고보가 본절에서 '쉬나고겐'을 사용한 것은 이 서신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모임, 장소를 자연스럽게 '쉬나고겐'이라고 부른 듯하다(Burdick). 한편 야고보는 회당에 들어오는 사람 중 두 부류의 사람을 예로 들고 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 '금가락지를 낀 사람' 본절에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본래 '금손가락의 남자', '금가락지 낀'이라는 의미로 '명예와 존귀를 소유한 사람'을 의미한다(창 41:42). 한편 '아름다운 옷'에 해당하는 '에스데티  람프라' '밝고 찬란한 옷'이란 의미로서 부유한 사람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옷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 지방에는 자신의 부와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반지나 아름다운 장신구를 달고 과시하는 풍습이 있었다(눅15:22).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 - '더러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파라'는 '불결한'을 의미하며 또한 '가난한 사람'(프토코스)은 '구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마 19:21, Mayor).  야고보는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과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을 대조시켜서 당시 수신자들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죄를 지적한다(Hort, Burdick).

3절 카이 에피블렙세테 에피 톤 포룬타 텐 에스데타 텐 람프란 카이 에이페테 아우토 쉬 카두 호데 칼로스 카이 토 프토코 에이페테 쉬 스테디 에케이 에 카두 호데 휘포 토 휘포포디온 무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 '돌아 보아' 헬라어 '에피블렙세테'는 '올려다 보다'라는 뜻의 '에피블레포'에서  유래한 단어로 '좋은 동기를 가지고 쳐다보다'라는 의미이다(눅 9:38, Burdick). 한편 '좋은 자리'는 특별히 마련된 좌석보다는 앉을자리를 권유하는 의미이다(Adamson). 따라서 본절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들을 존경하여 그 표시로 자리를 정중하게 권유함을 시사한다(Rope-s).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 먼저와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에 관해 언급된다. '섰든지'의 헬라어 '스테디'는 '배치하다'의 의미를 지닌 '히스테미'의  명령법이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자리를 차지하라는 것으로서 아마 회당의 맨 끝이나 구석진 한 곳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 한편 '네 발등상 아래 앉으라'는 '내 발아래 앉으라'는 표현이다.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발을 피정복자들의 목 위에 두었는데(눅 20:43) 본문에서는 그러한 의미보다는 발아래의 마룻바닥에 앉으라는 의미로 사람을 차별하는 모욕적인 행위를 암시한다.

4절 카이 우 디에크리데테 엔 헤아우토이스 카이 에게네스데 크리타이 디알로기스몬 포네론

=====2: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것이 아니냐 - 야고보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서  수신자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구별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크리데테'는 수동태로 서로 구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RV). 한편 '아니냐'의 헬라어 '우'는 부정 불변화사로 수신자들이 야고보 자신의 지적에 대해 충분히 긍정할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2,3 절에서 야고보가 예를 들어 지적했듯이  수신자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은 부한 자들과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자를 차별 대우했다. 이렇게 사람을 구별하여서 판단하는 것은 항상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으며 범죄가 된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 -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지음을 받은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상대방을  위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판단이다. 이러한 구별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서로 분리시키며 피차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에 악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요 8:15), 확고한 믿음이 결여된 것임을 시사한다(Ropes).

5절 아쿠사테 아델포이 무 아가페토이 우크 호 데오스 엑셀렉사토 투스 프토쿠스 투 코스무 투투 플루시우스 엔 피스테이 카이 클레로노무스 테스 바실레이아스 헤스 에펭게일라토 토이스 아가포신 아우톤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 야고보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앞절까지는 사람 외모로 판단했을 때 죄가  되는 것을 언급하였지만 본절에서 11절까지는 사람을 구별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교회 당시 사회에서 별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부류였다(마11:5; 고전 1:26-29). 그러나 그들이 돈이 없고 가난해서 사회에서 천대받는 자들이었다고 할지라도 믿음에 대해서는 결코 가난한 자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미래적인 영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에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잘못된 시각임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들이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는 소망을 품게  하셨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모두 다 믿음이 부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는 '가난한 자'의 헬라어 '투스 프토쿠스'에서 관사 '투스'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한정된 자들임을 나타내고 있다(고전1:26-28).한편 '택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셀렉사토'는 부정 과거 중간태 용법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친히 선택하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전 1:27).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신 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면 보상으로 인한 약속이 되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혀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부르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급으로 마련하셨다. 이러한 것을 믿고 바라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마 5:3;눅 6:20, Tasker). 한편 '아니하셨느냐'는 본절 상반 절에서 언급된 '택하사'와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냐'라는 의미이다.  이는 4절에서의 용법처럼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사용한 야고보의 표현 방식이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히브리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히 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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