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히브리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히 2:11-18)

엘벧엘 2022. 3. 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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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에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전에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성도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히 2:11-18)

 

11절 호 테 가르 하기아존 카이 호이 하기아조메노이 엑스 헤노스 판테스 디 헨 아이티안 우크 에파이스퀴네타이 아델푸스 아우투스 칼레인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 '거룩하게 하시는 자'(호 하기아존)는 모세 오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출31:13; 레20:8; 21:15; 22:9,16,32).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하신다(10:14;13:12). 또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비교와도 같다.

   다 하나에서 난지라 - 비록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양자는 모두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되어 있다. '다'의 헬라어 '판테스'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내포한다. 한편 '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노스'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헤노스'를 중성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2) 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아담이나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3) 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아들인 그리스도와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인간을 자녀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를 둔 영적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형제'는 영적인 의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를 의미한다(마12:49,50; 막3:33-35;눅8:21; 롬8:29).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형제 관계를 이루며, 가족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1:6). 본절의 이러한 확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준다(11:16).

12절 레곤 아팡겔로 토 오노마 수 토이스 아델포이스 무 엔 메소 에클레시아스 휨네소 세

13절 카이 팔린 에고 에소마이 페포이도스 에프 아우토 카이 팔린 이두 에고 카이 타 파이디아 하 모이 에도켄 호 데오스

=====2:12,13

 본문에서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영적인  형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 본절은 초대 교회가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한 시22:22의 인용이다(마27:26;막15:34;요19:34). 본절의 내용 중에서 1인칭 대명사는 인용문인 시 22편이 메시야 시편이므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영적인 형제들에게 선포하셨다. '이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속성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인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셨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선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의 증거 본문이다. 한편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클레시아스'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나(행 7:38;19:32,39,41)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를 나타내는 특별한 용어가 되었다. '여클레시아스'는 본절에서 '형제들'과 동일한 의미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을 시사한다.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 본문은 사8:17의 인용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로 사12:2이나 삼하22:3을 들 수 있다.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이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그리스도인들과 형제로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시사한다.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 본절은 사8:18의 인용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가 당시에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자들인 그의 아들 스알야숩과 마헬살락하스바스와 그의 제자들과 관해 했던 언급으로 저자는 이사야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그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자들의 모형으로 해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간의 친밀한 관계와 결속(結束)을 강조한다.

14절 에페이 운 타 파이디아 케코이노네켄 사르코스 카이 하이마토스 카이 아우토스 파라플레시오스 메테스켄 톤 아우톤 히나 디아 투 다나투 카타르게세 톤 토 크라토스 에콘타 투 다나투 투테스틴 톤 디아볼론

15절 카이 아팔락세 투투스 호소이 포보 다나투 디아 판토스 투 젠 에노코이 에산 둘레이아스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혈육'은 인간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이 '혈육'에 속한 '자녀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1) 혹자는 '자녀'가 '전체 인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자녀'가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본절의 자녀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였으매'의 헬라어 '케코이노네켄'은 완료 능동태로 인간의 본래적인 특질을 나타낸다. 반면에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심은'의 헬라어 '메테스켄'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해진 시기에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성'을 취하셨음을 시사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권세는 인류를 꼬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게 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다(창 2:17; 3:19; 롬 5:12). 한편 '없이 하시며'의 헬라어 '카타르게세'는 '무효화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가 끼치는 영향력을 제해버리셨음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마귀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신 방법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과 같이 반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속의 죽음이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무기력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사단의 권세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한편 '매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노코이'는 '붙잡혀 있는'이라는 의미로 노예 상태를 암시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생동감(生動感) 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16절 우 가르 데푸 앙겔론 에필람바네타이 알라 스페르마토스 아브라암 에필람바네타이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 - '붙들어'의 헬라어 '에필람바네타이'는 '...을 붙잡다' 또는 '...성질을 취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후자의 뜻을 받아들여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특성을 취하여 천사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성을 취하여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견해도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아브라함의 후손 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 (2) 혹자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두 가지 해석 중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첫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갈 3:29).

17절 호덴 오페일렌 카타 판타 토이스 아델포이스 호모이오데나이 히나 엘레에몬 게네타이 카이 피스토스 아르키에류스 타 프로스 톤 데온 에이스 토 힐라스케스다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투 라우

=====2:17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마땅하도다'의 헬라어 '오페일렌'은 '...할 의무가 있다' 혹은 '빚지다'라는 의미로 책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 즉 성육신 하심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스스로 떠맡으셨으므로(요3:16;10:17) 그의 성육신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 본절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 '대제사장'(아르키에류스)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타나는 칭호로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 속에 구약 시대의 속죄 행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수행하여 대속을 위한 제사 행위를 주관하며(민18:19; 렘33:20-26),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성결을 보존시키는 일을 하였다(출28:38; 민18:1). 한편 '자비하고 충성된'에서 '자비'가 먼저 나온 것은 강조의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음을 나타내며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충성을 시사한다.

18절 엔 호 가르 페폰덴 아우토스 페이라스데이스 뒤나타이 토이스 페이라조메노이스 보에데사이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예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과 유혹을 맛보셨으며(마4:1-11; 눅4:1-13) 그분의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었다(4:15; 5:2,7-10).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시험은 앞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대제사장'임을 입증하는 증거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앞절에서 제시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심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디도서] 목회자에 대한 성도 지도 훈련(딛 2:1-5)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디도서] 목회자에 대한 성도 지도 훈련(딛 2:1-5)

디도서 2장에서 바울은 목회자를 향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 장로와 권사와 집사님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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