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여러 지역에 흩어져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부활하셔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말세를 살면서 주님이 부활하신 것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환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부활에 대한 소망(벧전 1:1-6)
1절 페트로스 아포스톨로스 이에수 크리스투 에클레크토이스 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 폰투 갈라티아스 캅파도키아스 아시아스 카이 비뒤니아스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는 베드로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다. 이 호칭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사도로서의 베드로 자신의 권위와 존엄을 나타낸다(마 16:18,19; 막 3:16; 요 1:42; 21:15-19). 한편 '베드로'는 아람어에서 '바위'를 의미하는 '케파'를 헬라어로 명명한 별명이다. 베드로의 히브리 이름은 '시므온'이었을 것이며 헬라어로는 '시몬'이었다(행 15:14; 벧후 1:1).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 본문에 언급된 다섯 지역은 모두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재는 터어키 타우루스 산맥)의 북쪽에 해당하는 로마 지역이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보다 많은 지역에 그리스도인이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행 16:6-8) 본서에서 다섯 지역만 언급되었으며 '본도'와 '비두니아'가 동일 지역에 대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 언급된 것에 대해 혹자는 이 편지를 소지한 실루아노(5:12)가 심방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이 견해에 따르면 실루아노가 배를 타고 흑해를 지나 본도에 입성하여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를 거쳐 비두니아를 통과해 로마로 항해해 갔기 때문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지명이 각기 따로 언급되었으며 본서 수신자들이 사는 지역도 이 다섯 곳만 언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추정에 불과하며 본문에 특별히 다른 언급이 없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 한편'흩어진 나그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에는 관사가 없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틴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의미하며 '파레피데모이'는 '어떤 지역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당시 네로 황제(A.D.54-68)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임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또한 '나그네'라는 표현은 수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니는 입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안식처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임을 인식하고 순례하는 자임을 암시한다.
2절 카타 프로그노신 데우 파트로스 엔 하기아스모 프뉴마토스 에이스 휘파코엔 카이 란티스몬 하이마토스 이에수 크리스투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플레뒨데이에
=====1:2
본절에서 베드로는 앞절에 '흩어진 나그네'로 지칭된 수신자들을 삼위일체적인 신앙과 사역에 입각하여 묘사하고 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택하심을 입은 자들 -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클레크토이스)은 개역성경에는 본절에 나타나나 헬라어 본문에는 1절에서 나타난다. '에클레크토이스'는 1절의 '파레피데모이스'('나그네들')와 대비된다. '에클레크토이스'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묘사하는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며, '에클레크토이스'가 하나님 앞에서 특권을 소유한 그룹인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그룹을 나타낸다(Michaels). 이러한 '에클레크토이스'는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대상 16:13; 시 105:6; 사 65:9,15)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집합적인 칭호이다(2:9; 5:13). 한편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목적, 선택, 부르심, 섭리와 연관된 것으로 단순히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신다는 의미 이상으로 개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다(1:20; 암 3:2; 행 2:23; 롬 8:29,30; 11:2, Cranfield, Stibbs). 이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섭리를 가리킨다(Blum).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 '거룩하게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관된 것으로(살전 4:7) 한편으로는 부르심 그 자체와 동일한 실제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하여 구별됨을 시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즉 인간의 책임을 의미한다(롬 6:19,22; 살전 4:3,4; 딤전 2:15, Michaels).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의해 거룩한 삶 즉 성화의 삶을 살게 된다(Cranfield).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에이스 휘파코엔 카이 란티스몬 하이마토스 예수 크리스투). '휘파코엔'('순종함')과 '란티스몬'('피뿌림')이 비록한 전치사 '에이스'('위하여')와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예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는 '란티스몬'에만 연결된다(Michaels).
본절에서 '휘파코엔'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인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해석하며(Blum, Cranfield, Stibbs) 혹자는 믿음의 순종(롬 1:5; 16:26)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Michaels, 22절).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복음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순종이 뒤따라야 하며 그것을 통해 성장해 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은 구약 시대의 제사 의식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매개체로서(출 24:3-8; 히 9:18-21) 이 피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구속함을 받았으며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유대인의 전통적인 인사법으로 목회 서신을 제외한 바울의 다른 서신에도 똑같이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 서신과 베드로 서신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 문법상 바울의 인사는 '소원에 따른 간구' 형식으로 표현된 반면(롬 1:7; 고전 1:3; 고후 1:2) 베드로의 인사는 '부정 과거 수동태 회구'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벧후 1:2). (2) 내용상 바울은 그리스도인 전체에 대해 목자적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간구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도록 간구하고 잇다(Michaels).
3절 율로게토스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호 카타 토 폴뤼 아우투 엘레오스 아나겐네사스 헤마스 에이스 엘피다 조산 디 아나스타세오스 이에수 크리스투 에크 네크론
=====1:3
찬송하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는 동사 '율로게오'에서 변화된 형용사이다. 문법적으로 본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술어 동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토'('하게 하다')나 '에스틴'('...이다') 혹은 '에이에'('...지어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대인의 송영에서는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 술어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표현하였다. 베드로는 아마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 표현한 듯하다(Robertson).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에서 '퀴리우'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다. '주'는 승귀 된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칭호로서 초대 고회의 신앙 고백이었다(롬 10:19; 고전 12:3; 고후 4:5; 빌 2:11, Cranfield). 성부 하나님은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하시는 대상이며,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Michaels). 한편 '그 많으신 긍휼대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고 아버지가 되시는 근원을 시사한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긍휼'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은혜'(카리스)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나 '은혜'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나타내는 반면에 '긍휼'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동기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신 것은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의 헬라어 '디 아나스타세오스 예수 크리스투'에서 '예수 크리스투'의 속격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주격 소유격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를 의미한다. (2)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의미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 전체가 하나님이 주체로 언급되기 때문이다(Michaels). '아나스타세오스'는 '산 소망'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게 하사'와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거듭나게 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겐네사스'는 동사 '아나겐나오'의 부정 과거 능동태 분사로 거듭남의 사건이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구체적인 사실로 중명됨을 시사한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듭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대해 일반적으로 '팔링게네시아'를 사용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팔링게네시아'가 아니라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혹자는 베드로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교의 영향을 받아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당시 신비주의나 스토아학파에서는 '깨달아 거듭난 삶'을 아는 자를 '아나겐네사스'란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같은 이유로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했다기보다는 본서에 강하게 비치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려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ichaels).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거듭나다'를 '겐네데 아노덴'으로 표현하셨으며(요 3:3) 이것은 '아나겐나오'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겐네데 아노덴'에서 '아노덴'이 '다시'(again)라는 의미로 사용되든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의미로 사용되든 모두 '아나겐나오'와 같은 의미가 된다. 따라서 베드로는 본서에서 예수께서 이미 사용하신 단어를 다시 사용하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고자 했던 거듭남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요 3:3-8).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소유하신 생명과 같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Stibbs).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산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 결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새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으로 4절의 '기업'이나 5절의 '구원'을 가리킨다(Michaels). 이 '산 소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이미 마련한 것이다(Blum).
4절 에이스 클레로노미안 아프다르톤 카이 아미안톤 카이 아마란톤 테테레메넨 엔 우라노이스 에이스 헤마스
=====1:4
석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 '기업'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로노미안'에 대해 혹자는 구약성경에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소유물'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는 '현재에 이미 누리는 소유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ort). 그러나 '클레로노미안'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정리해 보면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 나라(마 25:34; 엡 5:5). (2) 영생(마 19:29; 막 10:17; 눅 10:25). (3) 구원(히 1:14). (4) 약속(히 6:12). (5) 축복(3:9). 이러한 기업은 '산 소망'과 연결된 것으로(3절) 거듭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Michaels, Blum). 따라서 본절의 '기업'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서 현재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롬 8:18; 갈 4:7) 미래에 주어질 것을 가리키며 이때 성령은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롬 8:11,18-23; 엡 1:14, Michaels).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기업의 온전함에 대해 부정 접두어 '아'로 시작하는 세 단어, 즉 '아프다르톤'('썩지 않고'), '아미안톤'('더럽지 않고'), '아마란톤'('쇠하지 아니하는')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미래에 완전히 소유하게 될 '기업'이 지상의 것과는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임을 시사한다(Lenski, Robertson).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하늘에'는 복음서에서 '하늘나라'와 연관될 뿐만 아니라 예수의 특정한 말씀, 즉 마 5:12; 6:19,20; 눅 12:33과 연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기업이 영원할 뿐만 아니라 전혀 손상되지 않으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함을 시사한다(Lenski, Robertson). 한편 '간직하신 것이라'의 헬라어 '테테레메넨'은 완료 시상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업을 마련해 두셨음을 시사한다(Blum).
5절 투스 엔 뒤나메이 데우 프루루메누스 디아 피스테오스 에이스 소테리안 헤토이멘 아포칼뤼프데나이 엔 카이로 에스카토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 '말세에'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온전하게 성취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곧 파루시아를 가리킨다(롬 8:18-25; 빌 3:20,21; 골 3:4; 요일 3:2). 파루시아 때 성취되는 '구원'은 앞서 언급된 '산 소망'(3절), '기업'(4절)과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얻어 향유하고 있는 구원의 실현 혹은 종말론적 차원의 완성을 의미한다(Stibbs, Blum)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보호하심을 입었나니'의 헬라어 '프루루메누스'는 '프루레오'의 수동태 분사 현재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프루루메누스'는 본래 군사 용어로써 순례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을 막아주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나타낸다(Stibbs, Leighton). 종말에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할지라도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므로 믿음 안에 거하여야 하며,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누릴 수 있게 된다(Michaels, Stibbs).
6절 엔 호 아갈리아스데 올리곤 아르티 에이 데온 에스틴 뤼페덴테스 엔 포이킬로이스 페이라스모이스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이스'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시험으로 상위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시련(test)을 의미한다(약 1:2, Bigg, Michaels). 그런데 베드로가 언급한 '여러 가지 시험'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암시하는가에 대하여 혹자는 '포이킬로이스'('여러 가지')가 고전 헬라어에는 나타나지 않고 마카비 시대와 신약 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마카비 시대에 일어났던 고난이나 신약시대의 예루살렘 멸망(A.D.70)을 예고한 듯하다고 주장한다(Selwyn, Hort). 그러나 이러한 추측이 정확한 지는 분명하지 않다(Michaels).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개역성경에는 '엔 호'('이 가운데')가 생략되어 있다. '앤 호'는 '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5절, Michaels, Blum)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암시한다. 비록 현재에 고난을 당하여 근심에 빠진다 할지라도 그러한 고난은 '잠시 동안만' 있을 것이며 그 후 종말론적 구원이 완성되는 파루시아 때에는 현재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업이 기다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산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게 된다.
[헬라어 성경 야고보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약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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