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어로 보는 사사기 중에서 사사 옷니엘의 드빌 정복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면서 땅을 정복했습니다. 문제는 가나안 족속을 모두 몰아내는 못했습니다. 유다 지파는 헤브론을 정복했고 옷니엘은 드빌을 정복했습니다.
사사 옷니엘의 드빌 정복 사건(삿 1:1-15)
1절 바예히 아하레 모트 예호슈아 바이쉐알루 베네 이스라엘 바아도나이 레모르 미 야알레 라누 엘 하케나아니 바테힐라 레힐라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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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 이것은 본서의 서론적 표현으로서 사사기의 시대적 배경을 나타낸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라는 말로 시작되는 여호수아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전에 모세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제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인해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여호수아는 110년을 향수하였는데(수 24:29), 그동안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 통치권과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나안 땅 분배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수 14-21장). 그로써 자신의 직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 대한 권면을 마지막으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수 23:1 - 24:31). 그런데 문제는 막상 여호수아가 죽고 나자 그를 이을 적당한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사기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여 기록되었다. 즉 여호수아 사후 강력한 통치자가 없던 이스라엘은 주변 열강들과 미처 정복치 못한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한 때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한 이들이 곧 사사인 바, 사사기는 이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서가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8,9에는 다시금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이와 관련, 학자들 간에서는 1:1 - 2:9에 기록된 사건들이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의 사건들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사건 들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나뉘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1-20 강해, '본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 사건의 발생 시기 문제'를 참조하라.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 이는 곧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사사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타난다(18:5;20:18,23,28:삼상 10:22;22:10;23:2). 구약시대에는 주로 대제사장들이 우림과 둠밈으로 여호와의 뜻을 구했는데(출 28:30;민 27:21;삼상 28:6), 아마 이때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여호와께 물었을 것이다(Keil, Delitzsch).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 사후 하나님의 뜻을 물은 이유는 여호수아가 남긴 유업을 마저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즉 비록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에 안식을 가졌다 주었지만(수 11:23;21:44;23:1) 아직도 가나안 땅에는 미정복지와 잔존 원주민들, 그리고 그들의 우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때문에 가나안 땅을 마저 정복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은 여호수아의 사후 이스라엘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다(수 24:22-24). 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였고 하나님께 그 뜻을 물은 것이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싸우리까 - '올라가서'에 해당하는 원어 '알라'는 단순히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대신 이는 수 8: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싸움터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Living Bible은 이를 '전쟁에 나가다'(go to war)로 분명히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질문 속에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던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아직도 여전히 미정복 상태로 남아 있는 많은 지역(수 13:1-7 등)을 정벌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민족적 대과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누가 먼저 가나안 족 속의 정벌에 나서서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가 선봉에 나서라고 일러주셨다(2절).
가나안 사람 - 정확히 얘기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당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아브라함 당시 가나안에 거주하던 '초기 원주민들'(창 2: 5, 6)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을 참조하라.
2절 바요메르 아도나이 예후다 아얄레 힌네 나타티 에트 하아레츠 베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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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즉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질문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먼저 여호와께 물은 행위가 옳았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사 시대 전반에 걸쳐 되풀이되던 극심한 타락상과는 달리 사사 시대 초기에는 그래도 여호와 신앙이 유지되었음을 보여 주는 일례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동안뿐만 아니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2:7)는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 여기서 '유다'란 '유다 지파'를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미정복지 정벌 전쟁에 이스라엘 여러 지파 둥 유다 지파가 먼저 출전토록 명하신 까닭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우선 이스라엘 지파들 중 유다 지파의 수효가 가장 많았기 때문(민 1:27 ; 26:22) 일 것이다. (2)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의 예언(창 49:8-12)을 통해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중 가장 탁월한 지위를 차치하리라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우선 출전 명령과 함께 과거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것(수 13:1)과 같은 승리의 약속도 함께 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 땅 - 이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해 주었으나 그들이 미처 정복하지 못한 탓에 아직 남아 있는 가나안 미정복지를 가리킨다(수 13:1-7). 그런데 혹자는 이를 유다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던 땅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 그것은 지나치게 의미를 축소시킨 견해이다.
그 손에 붙였노라 - '붙였노라'에 해당하는 원어 '나탄'은 '넘겨주다' 또는 '양도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미 하나님의 작정 하에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도록 계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경에는 비단 민족 간의 전쟁뿐 아니라(민 21:2) 개인의 생명(16:23)도 하나님께서 상대방의 손에 붙이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개인의 생명과 더불어 모든 국가의 장래도 곧 하나님의 주권 하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3절 바요메르 예후다 레쉬므온 아하브 알레 이티 베고랄리 베닐라하마 바케나아니 베할라케티 감 아니 이트카 베고랄레카 바옐레크 이토 쉬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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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함께...싸우자 - 이처럼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가나안 미정복지 정벌 전쟁에 함께 출전할 것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기업 중에서 자신의 분깃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수 19:1-9). 그러므로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와 행동을 같이 하여 자신들의 기업을 얻을 필요성이 있었다. 한편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기업 가운데서 분깃을 나누어 받게 된 까닭은 야곱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과거 시므온은 자기 누이 디나가 세겜 추장에게 강간당하자 그에 대한 복수로 과도하게 세겜 사람들을 멸한 일이 있었다(창 34:25-29). 그러자 야곱은 이에 대한 징벌로 시므온 자손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흩어질 것을 예언하였다(창 49:5-7).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는 바,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정복 직전에 실시한 인구조사(민 26:14) 때 그 수가 가장 적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축복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신 33장). 그리고 그 결과 시므온 지파는 독립된 기업을 얻지 못하고 유다 지파의 기업 중 일부만을 자신의 몫으로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수 19:1-9). 하지만 본절 이하에 의하면 이처럼 열세한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므온 지파는 불평불만에만 빠져 있지 않고, 유다 지파와 협력하여 가나안 미정복지를 성공적으로 정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 지파는 가장 수가 많고 강한 지파였으나(민 1:27;26:22) 미약한 시므온 지파를 무시해 버리지 아니하고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잘 유지했음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대 사사 시대 초기 당시는 아직 말기적 현상(20장)과는 달리 각 지파 간의 관계가 돈독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정벌에 대한 열망으로 서로의 마음도 똘똘 뭉쳐져 있었다고 하겠다.
제비 뽑아 얻은 땅 - 일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줄 때 제비뽑기를 통하여 실시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곧 각 지파에게 분배될 땅의 상태가 좋고 나쁜 데 따르는 시비를 사전에 방지할 뿐 아니라 제비로 결정된 땅은 곧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기업이란 점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민 26:52-56 강해, '제비뽑기'를 참조하라.
4절 바야알 예후다 바이텐 아도나이 에트 하케나아니 베하페리지 베야담 바야쿰 베베제크 아세레트 알라핌 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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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사람 - 1절에도 같은 말이 나오지만 그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즉 이 말은 성경에서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 경우로 사용되고 있다. 그중 넓은 의미로는 1절에서와 같이 가나안에 거주하는 모든 족속을 가리킨다(창 10:19).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시돈과 두로의 베니게 지역 해변가와 요단 강 계곡 및 평원에 살았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 중 한 종족을 가리킨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여기서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브리스 사람 - 이 역시 가나안 후기 원주민 중 하나이다(수 3:10;11:3;17:15;24:1). 한편 '브리스'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지'는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는 장소'라는 뜻의 '페라조트'와 어원이 같다(겔 38:11). 이로 보아 브리스 사람이란 요새화 된 성이나 성벽이 없는 성읍, 또는 작은 마을에 살았던 가나안의 한 종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이 성벽을 세우지 않은 것은 그들의 거주지가 주로 산지였으므로(수 17:15) 그지형 자체가 충분한 요새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베섹 - 이 지명은 본절 외에 삼상 11:8에 딱 한번 언급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베섹은 기브아와 길르앗의 야베스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곳은 유다 지파의 땅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베섹'과 동일한 곳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올라간 베섹은 유다 지파의 기업 내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오늘날의 '베즈카'(Bezqa) 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혹자는 '베섹'이라는 지명의 뜻을 '빛'(겔 1:14에는 '번개'로 번역되어 있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베섹'이란 모래가 많아 태양 빛에 반사되는 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약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5절 바이메체우 에트 아도니 베제크 베베제크 바일라하무 보 바야쿠 에트 하케나아니 베에트 하페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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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 베섹 - '베섹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개인 이름이 아닌 베섹 성읍 통치자의 칭호이다. 이 같은 칭호로는 애굽 왕을 가리키는 '바로'(출 1:11), 그랄 왕을 가리키는 '아비멜렉'(창20:2) 등이 있다. 창26:1 주석 참조. 한편 혹자(G.E.Wright)는 아도니 베섹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수10:1)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나 분명치 않다.
6절 바야나스 아도니 베제크 바이르데푸 아하라이브 바요하주 오토 바예카체추 에트 베호노트 야다이브 베라겔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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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 포로를 다룸에 있어서 이처럼 불구로 만들거나 눈을 뽑아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민 16:14;삼상 11:2;왕하 25:7). 이러한 형벌은 상대방에게 수치를 주기 위함이었음은 물론, 실제적인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즉 엄지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무기를 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엄지발가락을 자르는 것은 도망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눈을 뽑는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실례로는 일찍이 페르시아 제국이 망하여(B.C. 331) 헬라의 포로가 되었을 때, 헬라인들이 포로들의 수족과 귀 따위를 잘랐던 사건을 들 수 있다(Lange). 아무튼 본절에서 아도니 베섹이 이 같은 형벌을 당한 까닭은 일찍이 그가 동일한 방법으로 70명의 군왕들을 능욕했기 때문이다(7절).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나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7절 바요메르 아도니 베제크 쉬브임 멜라킴 베호노트 예데헴 베라겔레헴 메쿠차침 하이우 멜라케팀 타하트 슐하니 카아쎄르 아시티 켄 쉴람 리 엘로힘 바예비우후 예루솰람 바야마트 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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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왕 -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왕에' 해당하는 '멜레크'는 종종 일개 성읍의 통치자를 가리키기도 한다(창14:1,2 ; 수10:3;12:9-24). 따라서 이들은 아도니 베섹 당시 각기 가나안의 군소 성읍을 관장하던 군왕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 마치 개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행위(마15:27)를 가리킨다. 이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비참하기도 굴욕적인 대접 중 하나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 타인에게 가한 손상만큼 가해자에게도 동일한 형벌이 주어지게 하는 동해 보복법(Rex Talionis)은 모세 율법 이외에 함무라비 법전에도 언급되어 있다<출 21:18-36 강해, 동해 보복법>.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아도니 베섹의 이 한탄의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회개한 말이라기보다는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사상에 따라 자신이 처한 곤고한 상태를 한탄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이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간 사실은 아도니 베섹이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5절>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라이트(G.E.Wright) 같은 학자는 예루살렘이 아도니 베섹의 왕도(王都)였기 때문에 유다 연합군이 그를 그곳으로 끌고 간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측적 견해일 뿐 뒷받침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다.
8절 바일라하무 베네 예후다 비루솰람 바일레케두 오타흐 바야쿠하 레피 하레브 베에트 하이르 쉴르후 바에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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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 예루살렘은 이미 여호수아 군대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수 10:23,26)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도 유다 자손이 그 성읍을 치고 불살랐으나 역시 완전히 정복되지는 않았다(21절). 이러한 미정복 상태는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다윗이 이를 정복함으로 비로소 끝이 났다(삼하 5:6-9). 그런데 혹자는 이와는 약간 다른 견해를 표명하기도 한다. 즉 본시점에서 예루살렘은 유다 연합군에게 완전히 점령되었으나 유다와 시므온 두 지파의 인구가 전 지역을 장악할 만큼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곧 다시 여부스 족속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해 버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19절의 기록에 의거하여 여부스 족속 중 평지 거민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유다 지파가 그 성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아무튼 예루살렘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히 정복되었으며, 그곳에 성전이 건립됨으로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수도로 부상하였다(삼하 5:9).
9절 베아하르 야르두 베네 예후다 레힐라헴 바케나아니 요셰브 하하르 베하네게브 베하쉐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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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서 - 유다 지경(地境)의 북단 경계에 해당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남쪽 경계인 네게브(Negeb)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산지와 남방과 평지 - 유다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 지경(수5:1-12)의 지형상 특징 및 구조를 나타내 주고 있는 말이다. 이 중 산지, 즉 유다 산지는 해발 약 800m에 달하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지경 내의 산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남방'은 헤브론과 가데스바네아 사이의 반사막(semi-arid) 지대로서, 일명 '네게브'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평지'는 히브리어로 '쉐펠라'라고 불리는 저지대로서, 곧 지중해변의 해안 평야와 팔레스틴 중앙 산맥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10절 바옐레크 예후다 엘 하케나아니 하요셰브 베헤브론 베솀 헤브론 레파님 키르야트 아르바 바야쿠 에트 셰샤 베에트 아히만 베에트 탈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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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브론 -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해발 910여 m 정도의 고도(古都)이다. 오늘날 '엘 칼릴'(el-Khalil)로 불리는 도시인데 상공업으로 유명하다. 한편 일찍이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며(창 13:18) 아브라함과 사라가 매장된 곳이기도 하다(창 23:19 ; 25:9). 그리고 후에는 다윗의 통치 초기 7년 동안 유다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삼하 5:5). 또한 '연맹'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이 고대 도시는 이스라엘에 정복된 후 이스라엘의 여섯 도피성 중 하나가 된다(수 20:7)). 한편 헤브론은 갈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20절; 수 14:6-15), 그 이유는 아마 헤브론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탐 때에 갈렙의 책임 지역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민 13:22 이하).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 -헤브론에 거하던 거인족 아낙의 세 자손이다(20절;민 13:22;수 15:14). 이 중 '세새'는 '애굽 왕 시삭' (왕상14:25)처럼 '태양'을 의미하고 '아히만'은 이방 신인 '므니'(Meni)의 친구(사65:11)를 의미한다. 그리고 '달매'는 밭고랑을 각각 의미한다. 한편 일찍이 헤브론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파괴되고 헤브론왕 호함도 죽임 당했었다(수 10:1-27,36,37), 그리고 드빌(11절), 아납 및 기타 산지의 성읍들도 헤브론과 마찬가지로 파괴되었었다(수 11:21-23). 그러나 본절에 따르면 그 후에 아낙 자손으로 된 이 세 씨족이 헤브론을 재탈환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를 다시금 정복해야 했었는데, 유다 지파 갈렙의 군대가 이를 재정복 한 것으로 나와 있다(수 15:13,14). 한편 이 세 씨족의 이름들은 당시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의 이름에서 본뜬 것으로 가나안 땅에 우상 숭배가 얼마나 만연 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기럇 아르바 - 헤브론의 본래 이름으로 '넷으로 된 성읍'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은 당시 서로의 필요에 의하여 네 성읍이 하나로 연합한 데서 유래된 듯하다(Lange). 그래서 아브라함 때에 이 기럇아르바는 '연합' 또는'연맹'이란 뜻의 '헤브론'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던 것이다(창 23:20).
11절 바옐레크 미솸 엘 요쉐베 데비르 베솀 데비르 레파님 키르야트 세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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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빌...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 '드빌'은 헤브론의 남서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곳에는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수 11:21). 이곳은 오늘날 '히르벳 라붇(Hirbet Rabud)으로 불려지는 지역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1968년부터 모쉐 코카비(Moshe Kokhavy) 탐사반이 이곳을 발굴한 결과 가나안 정복 당시의 상황을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유물들이 대량 발견되었다 한다. 한편 '드빌'의 본명인 '기럇 세벧'은 '책의 도시' 또는 '기록의 도시 '란 뜻이다. 드빌이 본래 이러한 이름으로 불렸던 까닭은 그곳에 큰 도서관이나 문서 보관 창고 따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수 15 : 15 주석 참조.
12절 바요메르 칼레브 아쎄르 야케 에트 키르야트 세페르 우레카다흐 베나타티 로 에트 아케사 비티 레이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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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 갈렙이 이처럼 드빌을 정복하는 자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고대의 포상(褒賞) 관습(삼상17:25;18:17,27)을 따른 것이긴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신앙의 용사를 사위로 맞이하려 한 갈렙의 신앙 제일주의 사상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15:16 주석을 참조하라.
13절 바일레케다흐 오트니엘 벤 케나즈 아히 칼레브 하카톤 미메누 바이텐 로 에트 아케사 비토 레이솨
=====1:13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 - 본절을 그대로 번역할 경우, 옷니엘은 갈렙의 동생이 되며 갈렙은 그나스의 아들이 된다. 이러한 견해는 KJV, NIV, RSV과 같은 영어 성경도 따르는 바이다(Othniel the son of Kenaz, Caleb's younger brother). 그러나 공동 번역은 본절을 '갈렙의 동생 크나즈의 아들인 오드니엘'로 번역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가 되며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자 옷니엘의 아비가 된다. 이는 Living Bible이 취하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Caleb's nephew, Othniel, son of his younger brother Kenaz). 이러한 서로 다른 해석은 성경의 원문이 그 어느 쪽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때문에 학자들 간에는 옷니엘이 갈렙과 정확히 어떠한 관계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이 중 대표적인 견해를 들자면은 곧 다음과 같다. (1) 옷니엘은 갈렙의 이복(異腹) 동생이라는 견해는 갈렙이 '여분네의 아들'(민 13:6;수 14:14)인 데 반해 본절에서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인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2)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라는 견해는 갈렙과 옷니엘간의 현격한 연령 차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옷니엘이 드빌을 정복하고서 갈렙의 딸을 아내로 맞이할 때, 갈렙의 나이는 85세였다(수 14:10). 그러나 당시 옷니엘은 혈기 왕성한 젊은 용사였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은 형제간이 아니라 숙부와 조카 간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옷니엘과 갈렙은 다 같이 그나스 집안의 사람들로서 친척이라는 견해(Lange) : 이는 민32:12에 갈렙이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로 나와 있으며 본절에선 옷니엘이 '그나스의 아들'인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 근거한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세 견해 중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는 두 번째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5 : 17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성경에는 그나스란 이름과 관련하여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에돔 사람 '그나스'(창36:11)가 나온다. 따라서 이 자를 옷니엘의 아비인 '그나스'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14절 바예히 베보아흐 바테시테후 리쉐올 메에트 아비하 하사데 바티체나흐 메알 하하모르 바요메르 라흐 칼레브 마 라크
=====1:14
악사가 출가할 때에...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 이는 이스라엘의 '모하르'풍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모하르'란 시집가는 딸에게 아비가 주는 결혼 선물, 또는 남자가 처녀를 아내로 데려갈 때 장인에게 치루는 '대가'를 가리킨다. 성경에선 대개 이 둘 중 전자를 가리켜 '빙물'(聘物)이라 하고 후자를 가리켜 '빙폐'(聘弊)라 한다<1 : 1-20 강해, 빙폐와 빙물>. 물론 부모가 결혼하는 딸에게 '모하르'를 주는 경우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악사는 옷니엘에게로 출가하면서 이 '모하르' 관습에 따라 아비에게 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악사가 요구한 밭이 어느 곳의 어떠한 밭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에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대개는 여타 밭과는 다른 특정한 밭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5:8 주석을 참조하라.
15절 바토메르 로 하바 리 베라카 키 에레츠 하네게브 네타타니 베나타타 리 굴로트 마임 바이텐 라흐 칼레브 에트 굴로트 일리트 베에트 굴로트 타흐티트
=====1:15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 KJV는 이를 '당신께서 내게 남쪽 땅을 주셨으니'(for thou hast given me a south land)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악사가 밭을 요구한 데 대하여(14절) 갈렙이 '남방', 즉 '네게브'(Negeb) 땅을 준 것으로 이해하고서 행한 번역이다. 어쨌든 악사가 출가하여 옷니엘과 한 가정을 이루게 된 곳은 네게브 지역이었는데, 그곳이 '드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12절).
샘물도 내게 주소서 - 남방(Negeb)은 거의 사막과 같은 곳이었다(9절 주석 참조). 때문에 급수(給水)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자들에게 있어 절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악사였기에 그녀는 현명하게 아비에게 샘물도 요구한 것이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두었더라 - 이 샘들의 위치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혹자는 헤브론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아마 옷니엘이 싸워 정복한 드빌 땅과 헤브론 지역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는 헤브론 남방 약 9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베이트 미르심'에서 두 샘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아무튼 재치 있고 현명한 악사로 말미암아 본래 가난한 자였던 옷니엘은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의 사사로 그 위치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 같다(3 : 9)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15 : 19 주석을 참조하라.
[히브리어로 보는 여호수아] 여호수아의 요단강 도하 준비(수 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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