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어로 보는 에스더 중에서 아하수에로 왕이 잔치를 배설함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에스더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역사가 숨어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셨습니다. 하만이 유다인을 죽이려고 계략을 세웠지만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수산궁에서 즉위하고 삼 년에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잔치를 배설함(에 1:1-8)
1절 바예히 비메 아하쉐베로쉬 후 아하쉐베로쉬 하몰렉크 메호두 베아드 쿠쉬 쎄바 베에세림 우메아 메디나
=====1:1
히브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리고'의 의미인 접속사 '와우'가 있다. 이를 근거로 혹자는 본서가 이전에 일어났던 어떤 특정한 사건과 문장상의 연관성을 가지고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와에히'는 종종 한 책의 시작을 표하는 단순한 도입 구로서 나타난다(수 1:1; 삿 1:1; 룻1:1; 삼상 1:1; 삼 1:1; 겔 1:1; 욘 1:1). 따라서 여기서도 단순한 도입 구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아하수에로 왕 - 에스라 4 : 6에서도 언급되는 B.C.485-464년까지 통치했던 페르시아 왕이었다. 그는 다리오와 고레스의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 다리오가 왕이 된 후 낳은 아들 중에서는 맏이었다. 그는 크세르크세스와 동일 인물이며, 단 9: 1의 아하수에로와는 별개의 인물이다. 그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본 단락 주제 강해, '아하수에로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인도로 구스까지 - 여기의 '인도'는 인더스 강 서쪽 지역, 즉 오늘의 파키스탄 지역을 가리키며 인도 반도 지역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지역은 아하수에로 왕의 부친 다리오에 의해서 정복되었으나 아하수에로 당대에도 그곳 거민들과의 전쟁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었다. 한편, '구스'는 오늘날의 '이디오피아' 지역 곧 나일 강상류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캄비세스 왕에 의해서 정복되어 다리오와 아하수에로 시대에 이르러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로 정식 편입되었다. 아무튼 '인도'는 페르시아 영토의 가장 동쪽, '구스'는 가장 서쪽이었다.
일백 이십 칠 도(道) - 일부 자유주의 학자들은 당시 페르시아의 행정 구역이 20구역으로 나누어졌었다고 말한 헤로도투스의 언급에 근거하여 이 '일백이십 칠도'는 그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기본적으로 2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소위 '왕의 대신'들에 의해 통치되었고(3:12), 보다 세부적으로는 127도로 구분되어 각 도의 '방백'들에 의해 다스려졌다고 이해된다. 물론 이렇게 127개 도로 세분화시킨 데에는 세금 징수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될 것이다(G. Archer).
2절 바야밈 하헴 케쎄베트 하멜렉크 아하쉐베로쉬 알 키세 말쿠토 아쎄르 베슈샨 하비라
=====1:2
수산 궁 - '수산'은 고대 엘람 지역에 위치했던 페르시아의 수도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페르시아 왕들은 이 '수산'에서는 봄과 가을에만 통치를 하였을 뿐이고, 겨을에는 바벨론에서 여름에는 메대의 악메다에서 정무(政務)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산'은 (1) 왕이 일 년 중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었으며, (2) 행정부 대부분의 기관들이 위치했었으며, (3) 왕의 보호를 목적으로 철저히 요새화 되었다(느헤미야 1장) 첫 단락 주제 강해, '수산 궁에 대하여' 참조)는점 등에서 단연 최고의 수도였음이 분명하다.
3절 비쉐나트 솰로쉬 레몰코 아사 미쉐테 레콜 사라이브 바아바다이브 헬 파라스 우마다이 하파르테밈 베사레 하메디노트 레파나이브
=====1:3
위에 있은 지 삼 년 - 아하수에로 왕의 즉위는 B.C. 458년 12월 23일에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 즉위 연도는 즉위 후 최초로 맞이한 정월이 속한 그 해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즉위 '삼 년'은 B.C. 482년이다(Paton). 그때는 애굽에서 반란이 일고 있었던 시점이기도 하다.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아하수에로 왕은 그리스 정복을 위해 즉위한 이후부터 2년 동안 철저한 계획에 따라 무력을 증강해갔다고 한다. 본절의 잔치는 아마도 전쟁에 돌입하기 앞서 최후 점검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열린 듯하다(Baldwin, Huey, Keil, Schultz). 한편, 고대 사가인 크테시아스(Ctesias)에 따르면, 페르시아 왕들은 보통 15,000명 정도가 참석할 수 있는 정도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기서 '잔치'(미쉬테)는 '마시다'를 뜻하는 동사 '쉬타'에서 온 단어로서, 다량의 술이 제공되는 큰 '연회'(宴會)를 가리킨다(Baldwin).
바사와 메대의 장수...각 도의 귀족...방백 - '바사와 메대'라는 독특한 표현은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술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사'와 '메대'는 페르시아 제국을 구성하던 가장 중요한 두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메대'는 '바사'에 의해 정복되었었다. 하지만 첫째, 두 민족은 동일하게 인구 어족(印歐語族)에 속하여 언어나 관습 및 종교 등이 서로 거의 같았으며 둘째, '바사'는 '제대'의 정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본 단락 주제 강해, '메대와 페르시아의 관계'참조), 그 두 민족은 거의 하나라고 할 만했다. 한편, '장수'와 '귀족' 그리고 '방백'은 앞의 '방백'과 '신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층의 사람들인지를 보여 준다. 그중 '장수'(헤일)는 2천 명의 창을 가진 병사, 2천의 기병(騎丙). 그리고 1만의 보병 등 총 1만 4천의 병력을 거느렸던 지휘관을 뜻한다(Keil1, Paton, Baldwin). 그리고 '귀족'(파르템)은 문자적으로는 '으뜸 되는 사람'의 뜻을 갖는 페르시아 어원(語源)의 단어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1) 페르시아 전역을 스물로 나눈 행정 구역을 맡아 다스렸던 총독(Paton), (2) 왕의 곁에서 왕에게 필요한 조언을 하는 모사(Baldwin)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첫째, 페르시아 왕들에게는 실제로 조언을 해주던 모사들이 있었다는 성경의 언급이 있으며(스 7 : 14) 둘째, 이것을 뒷받침이나 하려는 듯 왕의 정무실(政務室) 계단에 모사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양각(陽刻)한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사실, 그리고 셋째, 제국을 스물로 나눈 행정 구역을 다스렸던 총독(satrap)은 광의적으로 이해할 때 '방백'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더 타당성이 있다. 한편, '방백'(사르)은 127개로 나눈 행정 구역을 다스렸던 행정관이다.
4절 베하르오토 에트 오쎄 케보드 말쿠토 베에트 예카르 티페에레트 게둘라토 야밈 라빔 쉐모님 우메아트 욤
=====1:4
일백팔십일 동안 - 모든 '장수'나 '귀족' 그리고 '방백'이 이 기간 동안 줄곧 잔치에 참석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제국의 각처를 다스리던 '방백'이나 '장수'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들의 임지(任地)를 떠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당시는 제국 정부에 대한 피정복민들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는 '방백' 등이 번갈아 가면서 그 잔치에 참여했었다고 본다.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 - 이와 같은 페르시아 제국의 경제적 강성은 여러 고대 저술가들에 의하여 언급된 바 있다. 그중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왕이 매년 금 14,560 달란트를 공물로 받아서 그것으로 커다란 금궤를 만들어 창고에 보관하였다고 했다. 또한 아하수에로 왕은 금과 은으로 씌워진 장막, 금으로 된 긴 의자, 금으로 된 주발과 잔, 그리고 금 주전자 등을 스파르타로부터 약탈하여 갖고 있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이스퀼루스(Aeschylus)도 페르시아 왕궁의 방들이 금으로 씌워졌다고 말하였다(Paton).
5절 우비멜로트 하야밈 하엘레 아사 하멜렉크 레콜 하암 하니므체임 베슈샨 하비라 레미가돌 베아드 카탄 미쉐테 쉬브아트 야밈 바하차르 기나트 비탄
=====1:5
이 날이 다하매 - 왕이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베풀었던 180일간의 잔치(3,4절)가 끝난 것을 가리킨다.
왕이...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 이것은 180일간의 잔치와는 그 성격상 매우 다르다. 즉, 180일간의 잔치는 중요한 신료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 회의적 성격까지 내포한 것이었으나, 여기의 이 잔치는 서민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았던 순수한 유흥적(遊興的) 성격이었던 것이다.
대소 인민 - 신분 고하를 막론한 모든 남자들을 가리킨다(9절).
왕궁 후원 뜰 - 페르시아 왕궁은 요새화 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Paton). 그리고 '뜰'에 해당되는 공간의 넓이는 약 6천6백 평방미터 정도였었다. 따라서 이 정도 넓이의 '후원 뜰'은 대단히 많은 시민들을 위한 잔치를 갖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6절 후르 카르파스 우테켈레트 아후즈 베하벨레 부츠 베아르가만 알 겔릴레 케세프 베암무데 셰쉬 미토트 자하브 바케세프 알 리체파트 바하트 바셰쉬 베다르 베소하레트
=====1:6
백색, 녹색, 청색 휘장 - 이러한 '휘장'은 잔치 장소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따가운 햇살을 막으려는 목적 때문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180일간의 잔치(4절)가 초봄에 시작됐다고 가정할 경우, 시민들을 위한 7일간의 잔치가 열린 때는 늦여름으로서 여전히 햇살이 따가왔을 것이다. 한편, '백색'과 '청색'은 페르시아의 왕들이 특별히 선호하던 제왕 색(帝王色)이었다. 또한 '휘장'(카르파스)은 헬라어 '카르파소스'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무명천을 가리킨다(Schultz).
자색가는 베줄로... 매고 - 상당히 긴 휘장을 땅에까지 늘어뜨려 고정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대리석 기둥 - 뜰 중간에 위치했던 궁전의 옆에 별도로 세워진 기둥을 가리킨다. 그런데 '대리석'(쉐쉬)은 석회석과 그것의 변성암(變成岩)인 대리석 모두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수산의 폐허를 탐사했던 고고학자들은 페르시아 왕궁의 기둥들이 검푸른 석회석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여기의 '대리석'은 차라리 '석회석'으로 번역함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이'기둥'은 그 꼭대기에 한 사람이 족히 누울 수 있을 만큼 굵었다고 한다(Paton).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 - 여기의 '걸상'은 편안히 기대어 앉을 수 있었던 긴 의자이다(Rawlinson, 7 : 8). 이 의자의 골조는 그리스 등에서 가져온 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표면은 금과 은으로 덮혀졌던 것 같다.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 - '화반석'(바하트)은 칠십 인 역에서 '가짜 에메랄드'라고 번역했다는 점에서 '에메랄드'처럼 생긴 녹색 돌, 즉 공작석 혹은 사문암을 가리키는듯하다(Keil). 그리고 '백석'(쉐쉬)은 앞에서 '대리석'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운모석'(다르)은 칠십 인 역에서 '진주 같은 돌 '이라고 번역했다는 점에서, 진주조개의 껍질 혹은 진주 비슷한 광택과 불규칙한 균열이 있는 진주 암(眞珠岩)을 가리키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흑석'(소헤레트)은 방패 같은 무늬가 있는 검은 돌을 뜻할 것이다(Keil).
7절 베하쉐코트 비켈레 자하브 베켈림 미켈림 쇼님 베예인 칼쿠트 라브 케야드 하멜렉크
=====1:7
금잔 - 유대 랍비들의 구약 성경 주석인 미드라쉬(Midrash)는 이 '금잔'을 금처럼 비싼 수정으로 된 '잔'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확정 지을 만한 단서는 희박하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이 잔들은 결국 그리스 군대에게 약탈되었다고 한다.
잔의 식양이 각기 다르고 - 잔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디자인되어 만들어졌으며, 이에 따라 무늬나 모양 등에서 서로 달랐다는 뜻이다(Baldwin). 아무튼 이것은 아하수에로 왕의 재력(財力)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문구라 하겠다.
왕의 풍부한 대로...한이 없으며 - 문자적으로는 '왕의 손처럼 풍부한'의 뜻으로서 왕의 능력과 풍부를 과시하기에 합당한 만큼의 많은 양을 가리킨다(Schultz, 2 : 18).
어주(예인 말코트). 문자적으로는 '나라의 포도주'의 뜻이다. 추측컨대 이는 왕 자신이 마시기 위해 저장해 놓은 칼리본(Chalybon) 산(産)의 귀한 술이었을 것이다(Schultz, Paton).
8절 베하쉐티야 카다트 에인 오네스 키 켄 이사드 하멜렉크 알 콜 라브 베이토 라아쇼트 키르촌 이쉬 바이쉬
=====1:8
규모가 있어...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 본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규모'에 따른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억지로 하지 않게' 했다고 함으로써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규모'를 어떤 엄격한 법령으로서가 아니라 바사 왕의 일시적인 명령으로 이해하고 그 명령의 내용이 바로 각자의 자유 재량에 맡기도록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해석이 보다 원만해진다. 즉, 잔치 석상에 참여한 사람들은 많이 마시도록 강요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Huey). 한편, 당시 페르시아 사람들은 대단히 큰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운 뒤 단숨에 들이켜는 음주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술 손님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술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으며, 그 손님은 술잔에 술을 다시 가득 채운 뒤, 다시 단숨에 마시는 시도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히브리어 성경 주석 강해 느헤미야] 유다 민족을 위한 느헤미야 기도(느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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