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인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을 숭배하고 관원들은 자신들의 배만 채우고 있고 서민들은 죽든지 말든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사라졌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유다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헛된 제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서 부패되었는데 제물만 가지고 나와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사람이 영광을 받고 사람이 중심이 되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온전한 회개를 통해서 예수님만이 높여지고 세워지는 예배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되고 기뻐하는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소돔 고모라 죄악을 짓는 유다 백성(사 1:10-17)
10절 쉬므우 데바르 아도나이 케치네 세돔 하아지누 토라트 엘로헤누 암 아모라
=====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 2절과 같은 동사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다르다. 죄악의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와 거의 동일하다. 그 죄는 겔 16:49에서 '불의와 탐욕과 힘없는 자에 대한 착취'로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는 주저함이 없이 그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적 병행어로 기술된 '관원'과 '백성'은 나라 전체가 한결같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심판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율법의 참된 해석가고 부름 받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율법(토라)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비난(11-15절)과 교훈(16, 17절)으로 진행되었다.
11절 라마 리 로브 지브헤켐 요마르 아도나이 사바에티 올로트 엘림 베헬레브 메리임 베담 파림 우케바심 베아투딤 로 하파체티
=====1:11
너희의 무수한 제물 - '제물'로 번역된 '제바힘'은 '살해된 동물의 고기,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피 뿌리는 제물에 대한 포괄적인 명칭으로 언급되었다(19:21;삼상 2:29;3:14). 이것은 13절에서 역시 '제물'로 번역된 '미느하트'와 구별되는데, '미느하트'는 피 없는 제사 즉 식물로서 바치는 소제를 말한다. 제물의 종류와 횟수, 그리고 바쳐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7항을 참조하라.
12절 키 타보우 레라오트 파나이 미 비케쉬 조트 미예드켐 레모스 하체라이
=====1:12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 '너희에게'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너희의 손에서'이다. 에발트(Ewald)는 '너희에게'에 강조점을 두어 '그것을 누가 너 같은 사람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반면에 알렉산더(Alexander)는 '그것을'에 강조점을 두어 '그따위 헛된 출석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여기서 '마당'은 솔로몬 성전 주변의 경내를 가리킨다. 에스겔은 안뜰과 바깥뜰이 있다고 말한다(겔 8:16;10:5).
13절 로 토시푸 하비 미느하트 솨베 케토레트 토에바 히 리 호데쉬 베샤바트 케로 미크라 로 우칼 아벤 바아차라
14절 호드셰켐 우모아데켐 사느아 나페쉬 하이우 알라이 라토라흐 닐르에티 네쇼
=====1:13,14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 이 말은 첫째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제사를 혐오하시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그들이 제사와 더불어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둘째 여호와께서 혐오하시는 대상이 무엇임을 밝히 보여준다. 그것은 제사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근본정신에서 이탈된 외식적인 행위이다. 본래 제사와 행악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한다. 서로 배타적인 이 둘이 결합된 모양을 가리켜 성경은 '외식'이라 부른다. 가짜와 거짓을 싫어하시는 여호와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진리이신 그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예배 행위에 대한 여호와의 태도는 14절에서 세 개의 동사로 보다 구체화된다:'싫다'-'귀찮다'-'지겹다'.
15절 우베파리세켐 카페켐 아엘림 에나이 미켐 감 키 타르부 테필라 에네니 쇼메아 예데켐 다밈 말레우
=====1:15
손을 펼 때에 - 문자적으로는 '손을 뻗칠 때'이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내적인 열망의 가시적 표현이라고 믿어졌다.
많이 기도할지라도 - 혹자는 이 말을 '중언부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큰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불쾌할 뿐이다. 참되고 진실한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불의로 얼룩진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탄원이며,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려는 거룩한 열망이다(주기도문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헛된 몸짓과 공허한 울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경멸하시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붉은 '피'(다밈)는 '악을 행한다'(13절)의 시각적 표현이다. 즉, 이 '피'는 희생 제물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혹은 상징적 의미에서의 악행을 의미하는 것이다(Calvin). 사해 사본의 이사야서는 이 말 뒤에 '너희 손가락은 불법으로 물들었다'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16절 라하추 히자쿠 하시루 로아 마알렐레켐 미네게드 에나이 히델루 하레아
=====1:16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사랑을 기억하셔서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훈하신다. 그것은 먼저 악에서 떠나라는 말로 제시된다. '스스로 씻으라'(라하추)는 말은 원래 신체적, 의학적 의미에서 자신을 세척하라는 말이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하자쿠)는 도덕적 의미에서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의 상관관계에 대해 델리취(Delitzsch)는 앞의 씻음은 단번의 회개요, 뒤의 씻음은 날마다의 점진적인 성화라고 하였다.
17절 리메두 헤테브 디르슈 미쉐파트 아쉐루 하모츠 쉬프투 야톰 리부 알마나
=====1:17
선행을 배우며 - 악을 그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그 필요충분조건에 응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적으로 너무나 무지해서 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초등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처럼 이제라도 선행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힘써 배워야 할 과목은 '공의'이며, 이 과목의 주된 학습 내용은 본절에서 세 가지 실천 사항으로 언급된다.
[히브리어로 보는 이사야] 여호와를 배반한 유다 백성(사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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