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셔서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여도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위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고난에 임한 하나님의 위로에 감사(고후 1:1-11)
1절 파울로스 아포스톨로스 이에수 크리스투 디아 델레마토스 데우 카이 티모데오스 호 아델포스 테 엑클레시아 투 데우 테 우세 엔 코린도 쉰 토이스 하기오이스 파신 토이스 우신 엔 홀레 테 아카이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 바울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밝힘으로써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택함 받은 열 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막 3:14-19), 그가 개심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계시에 근거하여(행 9:15) 열두 제자들과 동등한 사도라고 주장하였다(11:5;12:11;갈 2:6,7). 그런데 바울이 본 서신의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 서신에서 바울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그의 사도권에 대해 도전해오는 것에 대응하여 자신의 사도 됨의 정당성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14-7:4).
디모데 -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소스데네를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고전 1:1)과 달리 디모데를 본 서신의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은 디모데가 본 서신의 공동 저자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모데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고린도에 파송되어 사역 감당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젊고 담대하지 못하였고(딤전 4:12;딤후 1:7;2:1),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미미한 성과밖에 거두지 못 하였거나 거의 실패했었다(고전 4:17;16:10, 11). 이런 일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신앙의 아들이자 가장 절친한 동역자로서 자신과 함께 계속 사역해야 할 디모데의 권위를 다시금 세워주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을 것이다. 또한 비록 과거에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바울 반대파로 인해 별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일이 있지만(고전 16:10,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나 디모데는 그들에 대하여 여전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본 서신의 서두에서 보여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젊은이였으며(행 16:1, 2), 바울에게는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딤전 1:2;딤후 1:2),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빌레몬서의 서두에 언급될 만큼 절친한 동역자이기도 했다(행 16:1-3;빌 2:19-2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여기서 '하나님의'라는 소유격은 교회의 소유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와 바울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 추천장을 내세워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며 자기들만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고린도 교회에 문란을 일으켰던 적대자들과(3:1;4:2;10:7), 그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교회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했다. 한편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함은 본 서신의 수신자가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역과 그 주변에 있는 교인들이 모두 해당함을 암시한다. 즉 이 표현은 여러 수신처를 포괄하는 대표적인 언급이라 하겠다. 이러한 견해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신의 초두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문구에 이어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지지될 수 있다. 바울은 두 개의 고린도 서신이 고린도와 그 이외의 지역에서도 읽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가야 - 로마가 헬라를 지배할 당시 로마는 헬라 전체를 마게도냐와 아가야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에피루스, 데살리, 갈시디스를 포함하는 중북부 지역이 마게도냐에 속하고 아덴과 펠로폰네수스를 포함하는 남부 지역은 아가야에 포함되었고 아가야의 행정 수도는 고린도였다. 바울이 본 서신을 보내면서 고린도뿐만 아니라 고린도를 포괄하는 아가야 전 지역의 성도들이 읽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덴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행 17:34의 기록과 겐그레아에 한 교회가 있었다는 롬 16:1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니, 아덴과 겐그레아는 모두 아가야 지역 내에 위치한 곳이었다.
성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스'는 원래 '분리하다', '구별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다쉬'에서 유래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 민족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고(민 23:9;시 147:20), 따라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증거 하는 제사장 직분의 삶이어야 했다(레 11:44;신 7:6). 신약의 성도는 성별 된 구약 이스라엘의 영적 계승자로서(벧전 2:9,10) 소극적으로 죄악으로부터 분리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헌신 봉사해야 할 자들이다.
2절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아포 데우 파트로스 헤몬 카이 퀴리우 이에수 크리스투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 본절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불리며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로 불리는데, 이는 '주'(퀴리우)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것임을 고려할 때(아도나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심을 제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본절은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본절과 동일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구절이 고전 1:3에도 나오는데 이는 전통적인 헬라식 문안 인사말과 히브리식 문안 인사말을 결합한 바울 특유의 전형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은혜'(카리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 근거인 하나님의 선재적인 행위로, 받는 자의 행위나 자격에 의해 정당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호의' 또는 '선물'이다. 특히 여기서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목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예수께 지우신 것을 의미한다(5:19,20).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롬 1:7;빌 4:7).
3절 율로게토스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호 파테르 톤 오이크티르몬 카이 데오스 파세스 파라클레세오스
=====1:3
찬송하리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라는 '칭찬하다'는 뜻의 '율로게오'에서 온 말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어 '바룩'('찬양하다')과 같은 의미이다. '바룩'은 후기 유대교의 제의적 자료, 특히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는 열여덟 개의 축복문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 이 말은 '찬송하리로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유대교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이 표현은, 유대교 찬양 문에 나오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형식이 기독교적인 형태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되었는데(갈 4:4) 이것은 초대 교회에 널리 사용된 독특하고 특징적인 기독교적 어법인 것이다(벧전 1:3). 그러나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것이며,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또한 본문에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는가 하는 것이 규정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 이 문구는 유대교의 회당에서 널리 사용되던 기도문 형식의 표현이다. 즉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오, 우리의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여'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뜻 외에 '자비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며 하나님이 자비의 창조자요 근원이심을 의미한다(시 86:15;미 7:18).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여기서 '모든'은 '완전하다'는 뜻도 있으나 그보다는 '풍부하고 충분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로'는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위로는 단지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난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구해냄을 받은 것을 포함한다(8-10절). 바울은 그 자신이 환난 가운데서 붙드시고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하였다(롬 8:35).
4절 호 파라클론 헤마스 에피 파세 테 들립세이 헤몬 에이스 토 뒤나스다이 헤마스 파라클레인 투스 엔 파세 들립세이 디아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헤스 파라칼루메다 아우토이 휘포 투 데우
=====1:4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본절의 '우리'는 일차적으로 본 서신의 발신인인 바울 자신을 가리키며 넓게는 본 서신을 읽게 되는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본서에서 바울이 아홉 차례나 사용하고 있는 '환난')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8절;2:4;4:17;6:4;7:4;8:2, 13).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다(요 15:19,20). 그러나 이러한 환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주어진다. 본절의 '위로하사'는 '안위하다',`위로하다'는 뜻의 '파라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중단 없이 계속됨 을 뜻한다. 연속되는 환난과 그에 상응하여 계속되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역설적으로 결합됨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규정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여러 차례 극심한 환난을 겪었으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안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였다(행 14:19;16:19-26).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2:10)고 고백하였다. 한편 본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고 위로하기는 중요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위로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켜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 것과 같다(벧전 4:10).
5절 호티 카도스 페릿슈에이 타 파데마타 투 크리스투 에이스 헤마스 후토스 디아 크리스투 페릿슈에이 카이 헤 파라클레시스 헤몬
=====1:5
그리스도의 고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투 크리스투'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한결같이 받는 고난'을 의미한다. 모든 고난이 다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서 결과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고난이며(눅 22:52, 53;23:22-24), 그 고난의 결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메시야적 고난'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했고(골 1:8),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롬 8:17). 사실상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당했다. 복음을 증거 하다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고(행 14:19), 빌립보에서는 귀신 들린 여종을 낫게 해 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고, 유대인 자객단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었다(행 23:12-15).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으므로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6절 에이테 데 들리보메다 휘페르 테스 휘몬 파라클레세오스 카이 소테리아스 테스 에네르구메네스 엔 휘포모네 톤 아우톤 파데마톤 혼 카이 헤메이스 파스코멘 에이테 파라칼루메다 휘페르 테스 파데마톤 휘몬 파라클레세오스 카이 소테리아스 카이 헤 엘피스 헤몬 베바이아 휘페르 휘몬
=====1: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견디게 하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한 숱한 고난과 고린도 교회가 받은 위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인 것이었듯이 사도 바울의 고난도, 비록 동질(同質)의 것은 아니더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위로 또한 그의 서신을 읽게 될 고린도 교인들과 아가야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바울은 그가 환난을 당하든지 위로를 받든 지 여전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됨을 확신한다(4:8-12, 15). 왜냐하면 그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에 먼저 고난을 경험한 바울의 예로부터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목격하고 위로를 받으며 지혜롭게 처신해 나감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7절 에이도테스 호티 호스테르 코이노노이 에스테 톤 파데마톤 후토스 카이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 -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고린도 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때문이었다. `소망'은 문자적으로 '강한 확신'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그것이 견고하다고 말한다. 아마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이단의 문제,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문제 (3:1; 4:2; 5:11,12;7:2;10:7, 11;11:6), 교회의 분열에 관한 문제에 대해(1:10 이하) 다소의 혼란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바울과 그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소망이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확신은 고린도를 다녀온 디도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들음으로써 더욱 얻게 되었을 것이다(7:6,7). 바울이 이러한 소망을 굳게 갖게 된 것은 적어도 본서의 독자들인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였다고 보았고 그것은 자신의 경험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가 주어지는 전제였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參預)하는 자들에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위로가 넘칠 것이고 결국 거기에는 확고한 소망이 있게 될 것이다(벧전 5:9, 10).
8절 우 가르 델로멘 휘마스 아그노에인 아델포이 휘페르 테스 들립세오스 헤몬 테스 게노메네스 헤민 엔 테 아시아 호티 카드 휘페르볼렌 에바레데멘 휘페르 뒤나민 호스테 엑사포레데나이 헤마스 카이 투 젠
=====1:8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 본문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아시아'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하는 것과 '환난'이 어떤 종류의 것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전자의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1) '아시아'가 에베소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고전 15:32의 맹수와의 싸움에 대한 비유적 표현과 행 19:23-40에 언급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란에 두고 있다. (2) '아시아'가 리쿠스 계곡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바울이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된 일에 대해 기록한 고후 11:24를 이곳에서 있었던 일로 보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만약 '아시아'가 에베소를 가리킨다면 고전 15:32나 16:8에서 처럼 '에베소'라는 지명을 밝혔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제시하나 모두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본절에서 '아시아'가 가리키는 곳은 에베소와 리쿠스 계곡을 제외한 다른 어떤 장소 일지도 모른다. 바울은 그의 생명을 노리는 수많은 대적들로부터 여러 차례 시련을 겪었고, 이러한 사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울이 고난을 당한 장소가 아니라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인 만큼 이에 대해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편 바울이 당한 극심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구체적인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전 15:32와 16:9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2) 심한 질병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바로 다음 절의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9절)라는 내용이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그러나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립시스'는 심한 질병에 적용하기에는 적합지 않으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3)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 이후에 있었던 새로운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행 19:23-40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위의 견해 중 세 번째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바울의 첫 번째 편지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바울이 정신적으로 고통받은 것을 지칭한다는 파라의 견해가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마치 너무 많은 짐을 실은 배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가라앉듯이 바울에게 가해지는 고난의 무게는 그 자신의 힘으로는 견디어내기 어려운 혹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끊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포레데나이'는 급작스러운 고뇌로 모든 소망을 상실케 되며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와 같은 강렬한 경험을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9절 알라 아우토이 엔 헤아우토이스 토 아포크리마 투 다나투 에스케카멘 히나 메 페포이도테스 오멘 에프 헤아우토이스 알르 에피 토 데오 토 에게이론티 투스 네크루스
=====1:9
사형 선고 -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은 분분(紛紛)하다. (1) 행 19:23-41에 기술된 에베소의 데메드리오 폭동 사건. (2) 법과 질서를 어긴 사람을 원형경기장의 맹수들에게 주어 생명을 빼앗게 하는 심각한 위험. (3) 법정에서 내려진 사형의 판결. (4) 복음을 증거 하다가 겪는 육체적 고난. (5) 12:7의 '육체에 가시'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 이 중에서 (3)과 (4)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용어상 재판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며 전후 문맥상 5절의 `그리스도의 고난' 및 8절의 '환난'과 긴밀하게 연계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은 본문을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절망감의 최종적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받은 줄 알았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케카멘'은 `가지다',`소유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에코'의 완료형이다.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1) 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한 생생한 회상으로 보는 견해와, (2) 단지 과거에 대한 회상을 넘어 현재에도 효력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바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가 아직 집행만 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유일한 희망이 부활에 있음을 뜻한다고 본다. 위의 두 견해 중 첫 번째가 더 타당한 듯하다.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 - 바울이 절망하여 사형 신고를 받은 것으로 생각한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구원에의 능력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신뢰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도(빌 3:4), 고린도 교회에서 맛본 좌절, 신체적인 질병, 거듭되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11:23-27)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그는 참된 위로와 구원과 신뢰가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 너머로부터 역사해 오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통감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포기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배울 수 있게 된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것을 알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교훈은 철저한 환난 가운데 배우게 되는 것이며 이것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었음에 틀림없다.
10절 호스 에크 텔리쿠투 다나투 에르뤼사토 헤마스 카이 뤼에타이 에이스 혼 엘피카멘 호티 카이 에티 뤼세타이
=====1:10
큰 사망에서...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큰 사망', '어려운 죽을 고비'(공동번역)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과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바울은 그것을 현재와 미래에 있을 환난에서의 구원을 확증해 주는 예표로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적 신앙으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위로할 수 있었고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교훈을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되 시간과 회수에 제한 없이 영원히 보살피신다(전 3:14;딤후 4:18).
11절 쉬뉘푸르쿤톤 카이 휘몬 휘페르 헤몬 테 데에세이 히나 에크 폴론 프로소폰 토 에이스 헤마스 카리스마 디아 폴론 유카리스테데 휘페르 헤몬
=====1:11
간구함으로 도우라 -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빌 1:19). 여기서 바울은 커다란 힘을 갖는 중보 기도를 부탁함에 있어 자신이 사도로서 일방적으로 사역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도움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그들이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서로 협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일치를 이루자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도우라'로 번역된 헬라어 '쉬뉘푸르군톤'은 '함께 도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강력하게 부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살후 3:1-3).
많은 사람의 기도로...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바울에게 은혜가 내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론프로소폰'에서 대명사 '폴론'에 첨가된 '프로소폰'은 '얼굴'을 뜻한다. 이 말이 헬레니즘 시대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는 '얼굴'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다. 그 예로 본서에 이 단어가 11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최소한 여덟 번은 '얼굴'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3:7,13, 18;10:1, 7;11:20). 반면 본서 2:10과 4:6에서는 '사람' 또는 '얼굴'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의 '프로소폰'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것에 대해서 헨헨은 '프로소폰'이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는 대명사 '플론'만으로 충분한데, 여기에 또다시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프로소폰'을첨가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이 본래적 의미인 '얼굴'로 쓰였다고 보아 많은 얼굴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아니면 연극에서의 의미 즉 연극에는 다양하고 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그 모든 인물들이 하나의 결말(結末)을 위해 협력하며 그때 생겨나는 좋은 결과에 대해 다 같이 감사하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헬라어로 보는 고린도전서] 바울의 인사와 감사 인사(고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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