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히브리어 성경 욥기 설교말씀] 사탄에게 시험받는 욥의 신앙(욥 1:13-22)

엘벧엘 2021. 11. 1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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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라는 허락을 내렸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욥에게 잘해주니까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주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니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만이 시험할 수 있습니다. 욥의 첫 번째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너무나 혹독한 시험입니다. 하루아침에 종들과 재산과 자녀들이 사라졌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에게 시험받는 욥의 신앙(욥 1:13-22)

 

13절 바이히 하욤 우바나이브 우비노타이브 오킬림 비쇼팀 야인 비베이트 아하헴 하비코르

=====1:13

  하루 - 아마 이날은 욥의 장남(長男)의 생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4절에서 보듯, 욥의 자녀들은 각기 자기 생일이면 그 형제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장남의 특권과 중요성이 남달랐던 고대 사회의 관습을 염두에 둘 때(창 27:1-4;35:17;43:33) 아마 이 날에 욥의 모든 자녀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14절 우말아크 바 엘 이요브 바요마르 하비카르 하이우 호리쇼트 비하아토노트 로오트 알 야데헴

=====1:14

 사자 - 욥의 수하에 속해 있었던 종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15절에서 보듯, 그는 스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나머지 종들과 같이 일터에 있었으며, 또한 욥을 '주인'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욥에게 2, 3, 4차 재앙의 소식을 전해준 '사자'와 동일인인지는 확실치 않다(16-18절).

   소는 밭을 갈고...풀을 먹는데 - 유목 생활의 전형적인 평화로움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본서 기자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당시 욥의 생활상의 단면을 암시해주는 목적 이외에, 앞으로 전개될 재앙이 어떻게 욥이 향유한 이 같은 평화를 파괴시켜가는가를 극적으로 나타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한편, 소가 밭을 갈았다는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욥은 단순히 유목 생활만을 한 것이 아니라 농경 생활도 병행하는    반유목민이었던 같다.

15절 바티폴 쉬바 바티카헴 비에트 하니아림 히쿠 리피 헤레브 바이말리타 라크 아니 리바디 리하기드 라크

=====1:15

  스바 사람 - 아마 이들은 오늘날의 이디오피아로 알려진 스바(왕상 10:1-13)로부터 이주한 남 아라비아인(south  Arabians)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들의 후예들은 금, 보석, 향료 등 값비싼 물품을 교역하는 부유한 상인들로 알려졌었다(왕상 10:1-13; 시 72:10, 15; 사 60:6;렘 6:20; 겔 27:22; 욜 3:8). 6:19에서도 욥은 이들을 가리켜 '행인', 곧 '무역상'(traveling merchants)으로 부르고  있다. 욥 당시 이들을 아랍 지역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1차 재앙은 3차 재앙(17절)과 비슷한 일면을 지닌다. 즉, 두 재앙 모두 인간(스바인, 갈대아인)을 통해 주어졌다. 반면, 2, 4차 재앙은 자연을 통해 주어졌다(16,19절).

16절 오드 제 미다베르 비제 바 바요마르 에쉬 엘로힘 나필라 민 하샤마임 바티비아르 바촌 우바니아림 바토킬렘 바이말리타 라크 아니 리바디 리하기드 라크

=====1: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 이와 동일한 표현이 17,18절에 연이어 등장한다. 따라서 욥에게 임한  1-4차 재앙은 연속적으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욥의 재앙은 그것이 (1) 돌연적으로('갑자기', 15,17절), (2) 연속적으로('그가 아직 말할 때에', 16-18절), 그리고 (3) 철저하게('나만 홀로 피한 고로', 15-17,19절) 임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불 - 성경에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번갯불'을 가리킨다(민 11:1; 왕상 18:38; 왕하 1:12). 그러나 여기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쏟아졌던 것과 같은 '유황과 불을 동반한 소나기'(창 19:24)인  것 같다. 왜냐하면 7,000이나 되는 양을 일거에 소진시키려면 단순한 번개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러한 이적을 일으켜서 욥에게 파괴적 재앙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 원문을 직역하면'(그녀, 곧  '하나님의 불'이) 양을 먹어 버리고 종들을 삼켜 버렸나이다'이다.  개역 성경에는 동사가 하나밖에  없으나 원문에는 '바아르'(‘먹어 버리다', '없애다')와  '아칼('먹다', '삼키다')등 동사가 두 개 나타난다. 이처럼 비슷한 뜻을 지닌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한 히브리인들의 문학적 기법의 하나이다.

17절 오드 제 미다베르 베제 바 바요마르 카시딤 사무 쉴로샤 라쉼 바이피쉬투 알 하기말림 바이카훔 비에트 하니아림 히쿠 리피 헤레브 바이말리타 라크 아니 리바디 리하기드 라크

=====1:17

 갈대아 사람 - 이들은 B.C. 7세기경부터 티그리스 강 주변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15절에 나타난 스바인들이 트랜스 요르단 북쪽에 정착한 반면, 이들은 주로 트랜스 요르단 남쪽을 전전(轉轉)하던 부랑민들이었다.

   세 떼를 지어 - 직역하면 '세  머리로 나누어 와서'이다. 이처럼 군사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서 어떤 대상을 공격하는 전술은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난다(삿 7:16,20;9:43-45; 삼상 11:11;13:17등). 아마 여기서 갈대아인들은 3,000이나 되는 약대(3절)를 한꺼번에 공격하기 곤란했을 것이므로 전략상 세 부대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에서 공격했을 것이다.

18절 아드 제 미다베르 비제 바 바요마르 바네카 우비노테카 오킬림 비쇼팀 야인 바베이트 아히헴 하비코르

=====1:18

 식물을 먹으며 -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원형 '아칼'은 16절에서 하나님의 불이 양과 종을 사르는 것을 묘사하는 데에도 쓰인 것으로서 '먹다', '삼키다'가 원뜻이다. 그러므로 '먹고 있었다'(KJV, RSV, wrer eating)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개역 성경은 '식물'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의역하고 있다(13절).

19절 비힌네 루아흐 기돌라 바아 메에베르 하미다바르 바이가 비아리바 피노트 하바이트 바이폴 알 하니아림 바야무투 바이말리타 라크 아니 리바디 리하기드 라크

=====1:19

  거친 들 - 예나 지금이나  팔레스틴 지역은 대부분 황량한 사막과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욥의 거주지였던  '우스'(1절) 역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광야'(KJV, RSV, wilderness), 또는 '사막'(NIV, LB, the desert)으로 표현할 수 있다.

  대풍 - 단순한 태풍(windstorm)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극렬한 회오리바람(whirlwind) 또는 돌풍을 가리킨다. 특히 한낮의 팔레스틴 지역은 지열(地熱)이 매우 높았으므로, 이 비람은 사마의 열기를 동반한 '열풍'이라 할 만하다.

   집 - 욥 당시 대부분의 거주지는 장막(tent)이었다(창 4:20;31:25). 일반적으로 벽돌을 사용하여 집을 지은 시기는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인 것으로 추측된다(삼하 12:31; 사 9:10). 그러나  여기서 욥의 자녀의 집을 '장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장막은 벽돌집에  비해 무게와 크기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던 고로 아무리 일시에 무너진다 해도 일거에 여러 사람을 죽이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욥은 당시 우스 지역에서 가장 명망(名望) 있고 부유한 자였던 관계로(3절) 벽돌집을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소년들 - 이와 같은 용어(나아르)가 1-3차 재앙에서 죽은 '종'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욥의 자녀들(2절)과 그  종들을 통칭하는 것 같다. 한편 본절의  재앙으로써 욥에게 임한 1단계 시련은  끝을 맺는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1) 1단계 시련은 욥 자신과는 결정적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소와 약대, 나귀와 양을 포함한 가축의 소실이나, 종의 죽음, 심지어 그 자녀들의 급작스런 죽음조차도 욥 자신의 존재 자체와는 결정적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련은 단계적 심화 과정을 거쳐 점점 더 욥 자신에게로 접근해 간다. 즉 '가축->종->자녀'의 순으로 재앙이 임하는 바, 이는 상대적으로 그 중요도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재앙이 이행되어 감을 뜻한다. 이로 말미암아 욥의 정신적 고뇌와 압박도 점점 가중되어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원리는 차후에 전개될 욥의 시련에도 연장되어 나타난다. 즉, 2단계 시련에서 그는 먼저 자신의 육체적 질고('악창', 2:7)를 겪고 난  다음 아내의 저주(2:9)와 친구들의 변박을 차례로 경험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욥의 시련은 '외형적 시련->육체적 시련->정신적 시련'으로 점차 심화되어 갔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20절 바야캄 이요브 바이키라 에트 미일로 바야가즈 에트 로쇼 바이폴 바이폴 바이쉬타후

=====1:20

 지금까지 진행된 재앙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욥이 비로소 첫 번째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욥의 행위는 매우 사려 깊고 고결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깊이 주목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극심한 환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고 참된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기품과 원칙을 자신의 행동으로써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욥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삼하 12:20)과 히스기야(왕하 19:1)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이들은 공히 자신의 범죄, 곧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한 죄(삼하 11:2-5), 그리고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의지한 죄(왕하 18:13-16)를 회개한 것이었으나 욥은 직접적인 죄악을 범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개의 행위를 보였다. 즉, 욥은 자신에게 덮친 일련의 재앙을 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의식했으며, 자신이 모든 면에서 정직히 행하기는 했으나(27장)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의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 것임을 인식했던 것이다. 실제로 욥은 본서 전반에 걸쳐서 자신이 완전한 의를 소유했노라고 고집한 적은 결코 없으며,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였던 것이다(9:2-4). 바로 여기에 범인(凡人)으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욥의 신앙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겉옷을 찢고 - 여기서  '겉옷'은 당시 귀족들이 입던 외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삼상 24:5). 이것을 찢는 것은 극심한 비탄을 표시하는 관습적 행위로써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다(창 37:34; 수 7:6;삼하 1:11;3:31;13:31;스 9:3-5 에 4:1 등).

 머리털을 밀고 -  이것 역시 갑작스러운 재난에 대한 애통을  표하는 관습적 행위였다. 그런데 우가릿 신화 등 고대 문헌을  보면 이러한 행위는 당시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 이방 풍속이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하였으나(레 19:27; 신 14:1), 구약성경에  종종 이것이 언급된 것을 볼 때(레 13:33; 14:8) 관례상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이방인들은 종교적 제의나 극심한 슬픔을 나타낼 때 자신의 몸을 베거나 찢는 행위도 동반했는 바(레 19:28; 신 14:1), 욥이 이러한 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이방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온전히 소유했다 하겠다.

   경배하며 - 본서는 그 문학 형태상 긴 산문시(散文詩)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 선택에 있어서는 매우 간결하고 압축적이다. 그리고 문장 구성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것은 가급적 배제하고 있다. 특히 주어나  목적어 등이 없어도 그 뜻이 충분히 전달될 때에는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목적어)이 생략되어 문학적 간결미를 보태고 있다(LB, before God).

21절 바요메르 아롬 야차티 야차티 미베텐 임미 비아롬 아슈브 샤마 아도나이 나탄 바아도나이 라카흐 이히 솀 아도나이 미보라크

=====1:21

 내가...그리로 돌아가올지라 - 본절은 곧이어 나오는 구절과 아울러 본서의 핵심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단순히 인간의 출생과 죽음의 법칙을 설파하려는 것도 아니요, 자신에게 닥친 급작스런  고난을 도피하기 위해 죽음에의 갈망을 토로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세속적 허무주의를 나타낸 것은 더욱 아니다. 그 반대로 욥은 자신이 출생할 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죽을 때  역시 아무런 소유물도 가져갈 수 없다는 단순  명료한 사실을 들어,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 할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본래적 무소유(無所有)와 근원적 한계성을 지적함으로써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신앙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전도서 기자는 '모태에서 벌거

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전 5:15)라고 했으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라고 가르쳤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 얼핏 보기에 이것은 운명에 대한 체념, 또한 혹독한 고난에 대한 장탄식의 한 표현처럼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세상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미 결정 났다는 이른바 '결정론'(determinism)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욥의 신앙을 뚜렷이 밝혀주고 있다.  (1) 하나님의 주권 인정 :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련의 재앙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 축복(2,3절)을 을 주셨던 것처럼 그분은 그것을 빼앗아 갈  권능도 갖고 계신다. 욥은 자신의 물질적 축복과 혈육이 끊어짐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하거나 불만을 토로하기에 앞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인정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욥이 인간의 생사화복(生死化福)과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토기(인간)가 토기장이(하나님)를 힐문할 수 없고 그에게 철저히 순복 해야 한다는 성격의  가르침(사 29:6;45:9;렘 18:6)이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고 한 바울의 신앙에 비견된다 하겠다. (2) 하나님의 섭리 인정 :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단순한 자연현상(16,19절) 또는 우연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 또한 종들의 부주의로 인한 인재(人災)로도 보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스바 사람(15절)과 갈대아 사람(17절)들의 습격을 사전에 감시하지 못한 종들을 질책했을  것이다. 욥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은 모두 2차적 원인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의 궁극적 동인(動因)이 하나님임을 인식했다. 자신에게 축복을 주신자와 그것을 거두어 가는 자, 곧 불의의 재난을 주시는 자가 동일한 하나님임을 깨달았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욥의 신앙을 승화 발전시키려는 계획(섭리)을 갖고  계심을 욥이 어느 정도 인식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기에 욥은 재난  중에서도 영적 평정을 잃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며(21b절), 점강(漸强)되는 재앙 속에서(2:7-9) 자신의 탄생과(3:1) 하나님을 원망은 했으되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 곧 신앙을 상실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받으실지니이다 - 이로써 사단의 1차 시험은  실패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그는 욥이 그 소유물들을 상실하면 주를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공언(公言)했기 때문이다(11절). 결국 사단은 욥의 신앙이 현세적 물질에 토대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욥은 재앙 가운데서도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현세적  물질에 토대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욥은 재앙 가운데서도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신실성을  입증한 것이다. 요컨대 욥은 세속적 번영이나 종교적 유익(profit)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본분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는 사실을 직시했던 것이다.

22절 비칼 조트 로 하타 이요브 비로 나탄 티필라 렐로힘

=====1:22

 범죄하지 아니하고...원망하지 아니하니라 - 개역 성경에는 본절이 두 개의 대등한 절(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은 접속사 없이 한 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직역하면 '나쁜  행위로써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이다. 한편  여기서 '나쁜 행위'(wrongdoing)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플라'는 '사악함' 또는 '어리석음'으로도 번역 가능하나 특별히 여기서는 도덕적 측면에 아람어 '타팔라'('침을 뱉다')등의 동사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Marbin H. Pope). 그러므로 욥은 재앙 가운데서도 도덕적으로 책잡힐 만한 부끄럽고 파렴치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히브리어 성경 에스더 설교말씀] 왕궁으로 들어가는 에스더(에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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