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로마서 3장 하나님 말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롬 3:19-31)

엘벧엘 2022. 10. 2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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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3:19-31)

 

한국에서 미혼 남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해서 통계를 낸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결혼에 있어서 상대방이 될 여성에게 성적인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통계를 내 보았는데 아직도 한국에서 50% 이상의 남성들이 자기 배우자가 될 여성에 있어서 성적인 순결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남성 자신에게 있어서 성적 순결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20% 정도 만이 중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순결을 얼마큼 지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은 10% 미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간단한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우리 한국사회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남존여비 사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남존여비의 사상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남자가, -존재하는 한, -여자는, -비참하다는 뜻이라는 조크도 있습니다만.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도 어느 정도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구라파의 사회가 얼마나 성 개방주의가 만연해 있는 사회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개방을 적용하지 않으려는 예외적인 성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계입니다. 이상한 사실입니다만 정치 지도자를 뽑을 때에 만큼은 도덕적인, 성적인 순결을 몹시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곤역을 겪고 있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국민들이 똑같은 도덕적 수준의 잣대를 가지고 자기들의 삶을 평가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치적인 지도자들에게는 도덕적인 순결을 요구하면서도 자신들의 삶 속에는 그와 같은 순결을 전혀 중요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원색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나는 개판이어도 너는 개판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중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단순한 인간의 이중성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역설적인 말이지만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는 진지한 희망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나마 거룩함을 보고 싶어 하고 나 자신에게 있는 불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나마 의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아직도 내재하고 있는 의와 거룩함에 대한 진지한 열망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들의 죄에 대한 리스트를 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의 범죄를 살펴보았습니다. 3장에 들어와서 바울 사도는 전반부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다 죄아래 있느니라”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꼼짝없이 죄인으로서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또 사실 문자 그대로 이미 죄인으로서 주님 앞에 정죄된 우리, 이런 우리들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소망은 없을까요?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이것이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죄인이 되어버린 우리가 이 죄를 넘어서서 죄를 극복하고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있을까요? 사도는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는 이 사실을 부정적으로 접근합니다.

본문의 첫 번째 강조점은 율법의 행위로써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20절의 선언입니다. 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율법의 행위-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의 도덕적인 노력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육체는 하나도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신의 도덕적인 행위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든지 혹은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내가 이렇게 노력하니까 애쓰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터이지라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의식은 왜 그럴까요? 그 대답은 왜냐하면 아직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앞에 혹은 율법 아래에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서를 읽어 보시면 사도 야고보는 율법을 가리켜서 거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시자마자 거울을 다 보셨지요? 거울을 보신 소감이 어떻셨습니까? “, 볼수록 너는 참 멋지구나라는 소감을 갖고 오늘 아침 거울을 보신 분들이 계십니까? 아니면 거울을 볼 때마다 이게 웬 말입니까? 간밤에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거울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거울을 본 사람은 자신의 수치를 압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지 않은 사람은 아주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퍽 괜찮은 사람으로 알고 활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서 본 사람은 그렇게 자부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수치를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서 있는 거울은 우리의 외부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거울이 우리의 외부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한 동기와 의식의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사고들까지도 다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그 거울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내 생각, 내 욕망, 찌꺼기 같은 내 속에 있는 더러움에 대한 생각들까지도 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그 거울 앞에 섰을 때에 무엇을 느끼실까요? 마찬가지로 성경을 진지하게 본다는 것은 거울 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을 때 이 성경 속에서 내 모습이 나타나지 않던가요? “형제를 향해서 미워하는 마음만 가져도 그것은 이미 살인한 것이라는 말씀을 읽을 때 , 내가 살인한 자로구나라고 깨닫고,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을 읽고는 내가 별수 없이 간음한 사람이로구나라고 진지하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매 페이지 앞에서 나의 죄인 됨을 발견하지 않으시나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애써서 부인하고 퍽 괜찮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유는 참으로 율법 앞에, 혹은 율법 아래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에게 율법이 없다면 인간의 마음속에 주께서 허락하신 양심의 율법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양심도 율법의 기능과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심도 같은 기능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해서는 안돼, 혹은 마땅히 해야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 보면 종종 그들이 이런 대답을 합니다. “저는 믿지는 않지만 양심껏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이 말은 그러니까 다른 데 가 보라는 말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종종 이런 반문을 던집니다. “그래요? 선생님, 양심껏 사신다고 하셨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그러면 선생님은 정말 양심대로, 양심이 요구하는 대로 사셨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율법은 제쳐놓고 양심의 율법이라는 거울 앞에 서 보십시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어떤 결론을 내릴까요?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율법 앞에 참으로 선다면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토해져 나올 결론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할 말이 없는 죄인이에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19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 아래 참으로 서 본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이 다 닫힐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 양심의 깊은 곳을 들여다볼 때에도 내가 주님 앞에, 창조주 앞에 그리고 나를 심판하실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이 정말 율법 아래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거룩함의 율법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모든 입은 닫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두 번째 강조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의 어떤 노력도, 어떤 최선의 사람의 최선의 노력도 여전히 부족할 것입니다. 이것이 23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한 신학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은 달리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한번 서 보세요. 그분은 완전하세요. 조금의 어두움도 용납될 수 없는 완전히 거룩하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어떤 인간이 도달할 수가 있을까요?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소식이 21절부터 전개됩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제는”이라고 시작되고 있는데, 원문에 보시면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조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 구절에 보시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이제는(But Now)” , 율법 외에-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는 인간들에게 율법이라는 방편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는 놀라운 길이 열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닐까요? 이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다음 절을 보시겠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이 말씀은 율법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았던 의롭다 함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까? 24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율법의 기능을 두 가지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율법의 기능이라는 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라 하지 말라”하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섰을 때에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 버린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표준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려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표준에 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우리의 삶 속에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코 율법을 폐기하거나 율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율법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마지막 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다면 결국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함, 의롭다 함이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질 수가 있다면 율법의 요구가 나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것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도덕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이것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딜레마는 우리가 해야 할 것,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몰라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또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딜레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죄를 예수께서 걸머지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24절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여기서 값없이란 말은 우리 편에서 볼 때는 값없이지만 이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하나님께서 이미 지불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절의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는 말씀에서처럼 그 대가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거룩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그 값비싼 대가를 담보로,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는 값없이 예수님 앞에 온 순간 죄 사함을 얻고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 놓으신 일입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의 행위입니다. 도덕이나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행위에 기초해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 보시면 어느 부자 청년 관원이 어느 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질문부터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질문 속에는 하나의 중요한 전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할 수도 없습니다.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 주시고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다만 그분을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놀라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하심이 아닌가요?

어떤 설교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굉장히 많은 종교가 있지만 엄격하게 성경의 시각에서 나누어 보면 두 가지의 종교만이 존재한다. 한 종교는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이며 그 종교의 모토가 있다면 하라(Do)’이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의 복음은 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었다(Done)'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율법을 깨뜨리고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대가를 다 지불해 놓으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의 마지막 절정에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외치십니다. 그의 마지막 보혈이 갈보리의 언덕에 떨어지는 그 순간 그는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사함이, 용서함이, 구원이 값없이 선물로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놀라운 복음이 아닌가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값없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습니까?

옛날 우리 선배 목사님이 기독교의 의란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면서 한문의 ()’라는 단어를 설명했던 기억이 지금도 제 머릿속에 생생합니다. 의라는 한문을 쓰려면 먼저 ()’이라는 단어를 쓰시고 그 아래에 라는 아(我)자를 쓰셔야 합니다. 그렇게 설명하시면서 기독교의 의() 즉 복음이 말하는 의란 한문 글자의 모습처럼 내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기 위한 제물로 오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는 그 순간 하나님은 나를 향해서 의롭다라고 선포해 주십니다. 그가 내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기에 그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값없이 나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며 그 의로우신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선물로 주신다고 선포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시나요? 오늘 본문에서 복음은 율법으로 불가능했던 의롭다 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증거 합니다.

세 번째로 오늘 본문은 이 중요한 결론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 26절에서, 28절에서 계속적으로 바울 사도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6)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

이 로마서 3장을 공부하던 저 유명한 마틴 루터, 가톨릭이 요구하는 그 모든 수행을 통해서도 마음속에 참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던 루터는 1장에서 깨어지고 2장을 읽고 3장을 읽고 3장에서 28절에 도착하자 그는 이 말씀에서 믿음으로라는 단어 앞에다가 오직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는 놀라운 사실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의라는 예복을 받는 손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종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우리가 받는 구원의 사건을 설명하실 때 그것을 결혼잔치에 참여하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잔치에 참여하려고 하는데 예복이 없어요. 그래서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이 잔치에 들어가기 앞서서 자기의 더러운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잔치석 상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합당한 의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 앞에 온 사람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먼저 행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의 소극적인 측면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이 잔치석 상에 온 사람이 헌 옷, 더럽혀진 옷을 벗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벗기만 하면 안 됩니다.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 헌 옷을 벗은 사람들에게 주인은 이제 예복을 입고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사람에게 한 희고 아름다운 예복을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줍니다. 선물로 값없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럽혀진 옷을 벗을 뿐만 아니라 그 희고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는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주 앞에 나온 사람마다 우리를 그의 보혈로 씻어 죄 사함을 주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의 예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기서 예복은 의,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 예복을 그냥 받는 손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랑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다만 내가 얻을 수 없었고, 성취할 수 없었던 나의 의, 내 어떤 노력도, 내 도덕적인 수준의 어떤 몸부림도 가져올 수가 없었던 나의 의, 그러나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용서의 근거를 제공하시고 우리에게 의를 선물로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드리는 믿음, 이것이 바로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믿음이 아니라 정말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언제나 두 가지의 단계를 필요로 합니다. 첫째 단계는 구원의 필요를 자각해야 합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구원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감격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구원의 필요를 느끼려면 먼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답답한 사실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전도해 보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라고 전도하면 겉으로는 고개를 끄떡이지만 속으로는 죄인은 죄인이지만 내가 너보다 더 죄인일 것은 무엇이냐?”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만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죄인 됨을 깨닫습니다. 그때 우리는 오순절의 자리에 섰던 사람들처럼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 안타까움이야말로 구원의 필요를 자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구원의 필요를 자각한 다음에 우리의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때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보기만 해도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없을까요? 물속에 빠진 사람이 아직도 자기가 자신을 구출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물속에 뛰어든 구조자에 대해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아직도 자기를 의지하고 있는데, 자기가 살 수 있다고 믿는 한 전혀 구조자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꼼짝없이 내가 죽는다라고 허우적거릴 때 그리고 자신의 소생에 대해서 거의 절망적인 마지막 단념을 해 버렸을 때 그 순간 내 앞에 구원자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감격일까요? 그때에 할 일은 내 앞에 다가오는 구원자 앞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구조자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제일 건지기 힘든 사람은 구조하려고 왔는데도 자기 혼자 살려고 발버둥 하는 사람이 제일 건지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반대로 아예 쭉 뻗어버리고 맡기는 사람이 제일 구조하기가 쉽다고 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나는 당신만 믿습니다하고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에 와서도 그 쥐꼬리만 한 자기의 이고를 아직도 의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자선이, 선행이, 윤리적인 자존심이 아직도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없고 그리스도에 대한 흥분이 없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내 어떤 최선의 노력도 나를 구원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절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보내주신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만 믿습니다라고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구하시네 구하시네 곧 구하시네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속에 있는 절망과 내 속에 있는 불가능을 아시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으로 의지하고 그분이 나를 살리시고 새롭게 하시는 이 감격을, 이 의롭다 함을 얻으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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