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장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성화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화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에서 자유하려면(롬 6:1-14)
한 청교도 설교가가 광장에서 청중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죄책이라는 짐입니다. 참된 행복은 이 죄의 짐을 벗는 데 있습니다.” 이때에 한 젊은이가, “그 죄책이라는 짐이 몇 파운드나 됩니까? 나야말로 아무 짐도 느끼지 못하니까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설교가는 그 청년을 향해서 이렇게 반문하기를, “청년이여, 만약 시체의 위에다가 400파운드의 무게를 올려놓은들 그 시체가 느끼겠소, 안 느끼겠소?” 라고 했답니다. “그야 못 느끼겠죠?”라고 청년이 대답하자, “맞소,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은 아무 죄책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요. 누군가가 자기의 죄책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살아나기 시작한 중거라고 말할 수가 있소.”라고 설교가는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기쁨이 있다면 죄 사함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새롭게 해 주셨다는 이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슬픔이 있다면 우리가 용서받은 그 확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경험하는 구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죄책과 더불어 싸우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어느 정도 성경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여전히 더욱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계속적인 실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니까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더 많이 죄를 짓자”라는 궤변을 전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본문의 6장 1절 이하의 말씀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궤변을 향하여 사도는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질문은 계속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삶의 장에서 죄로 더불어 실제적으로 싸워 승리하는 삶은 정말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 자유한 삶, 그리고 실제로 승리를 누릴 수 있는 삶의 열쇠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세 가지의 단어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알라’, 둘째는 ‘여기라’, 세 번째는 ‘드리라’는 단어입니다.
첫째의 ‘알라’라는 단어는 3절에도, 6절에도, 9절에도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라는 말입니까? 바울사도는 먼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선 이것이 의미하지 않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것은 죄가 우리 안에서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죄의 엄청난 세력은 아직도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굴복하게 하고 유혹받게 하고 있습니다. 죄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죽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잘 죽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기 위한 금욕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더욱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죄에 대해서 죽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과거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을 때 우리도 그때 죽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사실을 연합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예수님께 연합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심과 그의 부활의 사건에 이미 동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연대화, 즉 그리스도의 사건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나의 죄를 짊어지고 나를 대신해서 그분이 죽으셨고, 또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이 부활하신 것이라면 그분이 죽었을 때, 나도 죽은 것이고, 그가 부활했을 때 나도 영적으로 부활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영적인 분명한 사실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심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여러분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히 새로워진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을 상징화하는 의식이 침례입니다.
침례교회에서는 물을 뿌리는 대신에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옵니다. 물속에 들어갈 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그의 죽으심에 연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3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라는 말씀이 나오고 또 4절에도 보시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5절에 보시면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이 침례라는 의식은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장사식이요, 장례식이요, 동시에 부활식입니다. 제가 가끔씩 침례를 주면서 보면 장례식 하러 들어가는데 들어가서 죽지 않으려고 막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면 제가 막 밀어버립니다.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의 새 생명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표시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침례 의식 자체가 옛사람을 죽게 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일어난 영적인 사건을 상징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십자가의 사건에 동참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나도 죽은 것이고 그가 다시 사셨을 때 나도 다시 산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긍정적으로 말하면 옛사람이 죽었으니까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신분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신분의 삶, 바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왜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정체의식의 확신의 결여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한국이 국제화를 이뤄가고 있는데 한국인도 이제는 달라졌고 국제적인 시민이 되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런 행동이 나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별 수 있나라고 생각하면 그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서 일어난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의식-하나님이 옛사람을 죽게 하셨고 새 생명을 주셨고 새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변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을 때 정말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 부활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안다는 사실이 믿는다는 사실보다 더 강력한 것을 아십니까?
저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회심한 후에 탕자의 자리에서 돌아온 새로운 사람이 된 후에 길을 가다가 옛날에 함께 어울리던 거리의 여인을 만났습니다. 어거스틴이 못 본 척하고 지나가려고 하자 그 여인이 좇아오며 “저예요. 저 몰라요?”물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이 대답하기를 “너는 너지만 나는 내가 아니란 말이야”라고 했답니다. 한국에도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자기의 장인에게 “김익두 사망”이라고 부고를 보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장인의 속을 썩였으면 제일 먼저 장인에게 김익두가 죽었다고 보냈을 까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승리의 삶의 출발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나의 옛사람은 죽고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여기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여길지어다’라는 명령형으로 되어있습니다. 11절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은 본래 회계사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나의 계정에 입금이 되었으면 현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여기라고 할 때 쓰인 것입니다. 여기서 여기라는 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저는 ‘여기라’는 단어의 의미와 가장 근사한 단어가 있다면 운동권에서 많이 쓰고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 ‘의식화’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의식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라’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10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단번에 죽으셨다가 그가 다시 살으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지 않았는데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지을 일이 생길 때, 막 성질이 나려고 할 때, “나는 죽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죽은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기쁘심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신나고 감격하고 흥분하고 이 새로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나를 다시 살려 주신 주님만을 향하여 산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인식-‘알라’는 사건을 기초로 하여 끊임없이 그렇게 여겨야 할 의식화의 과정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거지와 왕자의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암행 순시차 나가셨다가 다리 밑에서 거지 소년을 보았는데 어쩐지 마음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거지 소년을 데리고 궁궐에 들어오셔서 만조백관 앞에 서서 “오늘부터 이 소년을 내 아들로 삼겠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이제 분명한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거지는 죽었고 왕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저녁에 주무실 시간이 되었는데 왕자가 막 대궐 바깥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어디 가냐고 묻자 그는 “나는 본래 거지라서 다리 밑에서 자야 편하다”라고 대답하자 신하들이 “아닙니다. 왕자님, 왕자님의 주무실 곳은 대궐 안에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이 왕자가 다시 대궐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시녀들이 좇아가면서 “왕자님 어디 가십니까?”라고 묻자 “내가 본래 거지라서 내가 세수하는 곳이 다리 밑에 있다”라고 하자 시녀들이 “아니에요 왕자님, 세수하실 곳이 대궐 안에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질문드리겠습니다. 이 왕자가 왕자다운 행동이 나타나려면 거지 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아니면 왕자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나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라 거지는 죽었고 새롭게 왕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당분간은 거지 같은 행동이 계속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워낙 오랫동안 거지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음에도 죄인 같은 삶은 계속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계속 확인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하셨다면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의식화하셔야 합니다.
세 번째는 ‘드리라’는 것입니다. 알라와 여기라는 단어가 지적 인식과 연관되어 있는 단어라면 드리라는 단어는 우리의 의지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을 때 나도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살려 주셨다면 나는 계속적으로 이 사실을 나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여기는 과정입니다. 그다음에 나는 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기 죄를 이기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먼저 죄를 이기려면 중요한 것이 죄를 이길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패배의식입니다. 이 땅에서 성화가 어차피 완성되지 않을 테니까 나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이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시고 그 가운데 새 사람으로 살게 하셨다면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더 이상 죄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는 승리자로 살 수가 있다는 이 놀라운 가능성에 근거해서 죄를 이길 수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본문의 6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의 몸이 멸했다고 하는 번역은 지나친 번역입니다. 본래 여기서 멸했다는 것은 죄의 도구로서 우리의 몸을 지배하던 힘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무력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성어거스틴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자였으나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죄를 짓는 것이 당연했지만 예수를 믿고 달라진 것은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어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짓는다면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성령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죄를 이길 수가 있음에도 우리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새로운 사람이 된 후에는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지배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죄에서 승리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시려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치지 않고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셔야 합니다.
“더 이상 죄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죄여, 사망이여, 사탄이여, 너는 나를 다스릴 수가 없다. 나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주여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만이 내 삶의 통치자가 되는 것은 마땅하다. 오 하나님! 그러므로 내 삶의 전 존재를 당신 앞에 바치나이다”라는 이 고백이 결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분기점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본문의 12,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롤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항복하고 바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나를 다스리고 통치하실 때, 나의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주께서 약속하시는 빛나고 거룩한 삶의 승리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죄에게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지배는 사실상 끝난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졸병으로 갔을 때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전방에 배치가 되어 갔는데 그 부대의 내무반에는 김 하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김 하사라고 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여러 가지 벌을 받았지만 제일 무서운 벌은 한 밤중에 팬티바람으로 집합시켜서 줄빠따를 때리는 것입니다. 쭉 서서 제일 끝에 있는 사람이 그다음 사람을 때리고 순서대로 그다음 사람을 때리는 벌인데 제가 제일 졸병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맞았겠습니까?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정말 소형총이라도 있으면 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제가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김 하사가 제대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이야말로 얼마나 기쁜 복음이었는지요? 그 이후 김 하사는 제대를 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제대를 했는데도 그 사람이 계속 두려운 것입니다. 그가 제대한 지 사흘 뒤에 술 취해서 찾아와서 “집합!”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소리에 다 일어나서 매를 맞았습니다. 그다음 날도 김하사가 한 밤중에 술 취해서 찾아와 다 집합을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내부반에서 가장 선임이었던 김병장이라는 사람이 벌떡일어나 “야, 김하사! 넌 끝났어”라고 소리치더니 우리를 향해서 “아무 염려 말고 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날 김병장이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김병장만 아니었으면 전 김 씨 성을 가진 자를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했었는데 김병장 때문에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날 밤 얼마나 잘 잤는지요.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에 없는 아첨을 해 보았습니다. “김병장님 존경합니다. 제가 김병장님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 악질 김하사의 시대는 끝나고 김병장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계속 강조하는 것이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선포합니다. 죄에게 순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이제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되셨다면 그분의 온전한 통치를 경험하도록 그분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학개 2장 성경 좋은 말씀] 성전 건축 격려와 약속(학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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