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마태복음 성경주석 회개 말씀]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 말씀(마 3:7-17)

엘벧엘 2024. 1. 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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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장 성경주석 회개 말씀은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 말씀과 예수님의 세례식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재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 말씀(마 3:7-17)

 

세례 요한의 회개에 대한 설교 3:7-12

요한이 전한 내용은 회개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그의 가르침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게 된다. 적용은 설교의 생명이다. 그것은 요한의 설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회개의 교리를 세례를 받으러 그에게로 나아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적용하였다 (7). 바리새인들은 의식들과 장로들의 전통들에 대해서 열심이었고 사두개인들은 또 다른 극단으로 빠져 영들과 내세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이신론자들이나 다름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에는 참여하지만 그 의식의 능력은 맛보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적용이 평범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며 사람들의 양심을 겨냥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그들 앞에서 설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온 자로서 말한다. 그는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1. 확신과 경각의 말씀(7)

그는 처음부터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지도 않고 거칠게 말을 시작하며 그들이 익숙하게 들어왔던 칭호들도 붙여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을 칭찬하는 말은 더군다나 할 리가 만무하다.

(1) 요한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란 칭호를 붙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 그와 똑같은 말을 하셨다(12:34; 23:33).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이었다. 즉 그들과 같은 정신을 가진 자들의 씨이며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독사의 무리로서 모두 한 통속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원수지간이었지만 해악을 끼치는 일에 있어서는 한 도당을 맺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담대하게 죄인들에게 그들의 참된 본성을 알려 주어야 한다.

(2)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 말은 그들이 장차 올 진노의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도움을 준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세례 요한의 말은 "무엇 때문에 너희가 이리로 오느냐? 누가 여기서 너희를 보리라고 생각했겠느냐? 너희가 무엇이 두려워서 천국을 찾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점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임박한 진노가 있다는 것이며 둘째, 이 진노로부터 피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중대한 관심사라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이 진노로부터 피하라는 경고를 분명하게 듣게 된 것은 큰 자비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누가 우리에게 경고하셨는가? 우리의 파멸을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넷째, 이러한 경고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안전과 스스로를 선하다고 여기는 생각 속에서 마음이 아주 무감각해진 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는 것이다.

2. 훈계와 지시의 말씀(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그러므로 즉, 너희가 회개를 공언하고 회개의 세례와 가르침에 참예하였으므로 너희가 진실한 회개자들이라는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회개는 마음에 자리 잡으며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연히 마음속에 회개가 뿌리를 내린 것처럼 행세한 것이다. 회개자들이라는 이름을 갖거나 그 특전들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이란 자기들의 죄를 슬퍼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회개를 공언하는 자들은 세례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회개한 자답게 생활해야 한다.

3. 외적인 특전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육신의 마음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많은 핑계들을 속삭여 하나님 말씀의 확실하고 당당한 권능을 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너희들은 "그렇게 말하여 스스로 기뻐하지 말라. 그러한 생각을 품고 졸거나 헛된 꿈을 꾸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으로 하는 모든 말들을 다 아신다. 사람들이 그들을 파멸시키는 거짓말을 오른손에 숨기며 그것을 밝히기를 부끄럽게 생각해서 혀 아래 감싼다. 이제 요한은 그들에게 다음의 사실들을 밝히 보여 준다.

(1) 그들의 자랑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방인들과 같은 죄인들이 아니다. 그러니 이 회개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는다. 요한의 말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다시 말해서 너희의 생각과 길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내 자신은 비록 선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선한 관계들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추측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회개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가시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갖는 명예와 이익에 안주함으로써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

(2) 그들의 이러한 자랑은 얼마나 어리석고 근거 없는 것이었는가!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자기들만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소유하신 유일한 백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요한은 그들에게 이러한 자만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속으로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지금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곳을 넘어갔기 때문에 통과의 집이란 의미를 지니게 된 벧 아라바 근처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는데 (1:28) 그곳에는 이스라엘이 통과했을 때 여호수아가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각 지파를 따라 하나씩 세운 열두 개의 돌이 있었다(4:20). 여기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그 돌들로써 단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만을 표시했던 것 같다.

4. 세례요한의 경고의 말씀(10)

여기서 요한은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재난의 때도 알지 못한 채 태평하게 안심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유대인들에게 두려운 경고를 하고 있다. "이제 너희 주변을 살펴보아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정신을 차려라."

(1) "너희가 당할 재난이 얼마나 엄격하고 촉박한가!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이제 너희는 파멸할 운명에 처해 있으며 신속하고 진지한 회개 말고는 파멸을 피할 길이 없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이제 그들은 마지막 시험에 놓여 있다. 기회는 지금 뿐이며 이후에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2) "만일 너희가 지금의 상태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운명은 참으로 가혹하고 고통스럽게 될 것이다." 여기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는 말과 함께, 모든 나무마다 그 재능과 영광이 아무리 고상하다고 할지라도, 그 외형이 아무리 푸르다고 할지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찍혀서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나무처럼 버려져 하나님의 진노의 불 속으로 던져진다는 사실이 선포된다. 마른나무들에게는 불 속이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이 밖에 그 나무들이 달리 어디에 소용되겠는가? 열매를 맺는 데 적합지 않다면 그것들은 땔감으로 쓰기에 합당하다.

5.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11,12)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자신을 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한다. 요한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전한다.

(1) 그리스도의 위엄과 탁월성은 자신보다 뛰어나다. 여기서 요한이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얼마나 비천하게 말하는가를 보라(11).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 보다 능력이 많으시다." 요한은 실로 위대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하였다(여자에게서 난 자 중 그보다 큰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시중드는 일에 있어서 가장 비천한 일을 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해서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과 비교하여 볼 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가를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보다 능력이 많으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신실한 사역자들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의 약함 가운데서 완전하여지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비교해 볼 때 자신이 그의 신을 들고 다라 다닐 자격조차 없을 만큼 비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명예를 주신 자들은 그로 인해 매우 겸손해지며 그리스도만이 전부가 되시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긴다.

(2) 유대인들이 조급하게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출현의 목적과 의도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구별을 짓기 위해서 오실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능력 있는 은혜의 사역에 의해 구별 지으러 오실 것이다. "그는 불과 성령으로 너희에게(즉 너희 중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특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베푸신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 가운데서 이 특권을 사용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그리스도는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위로 가운데에서 이 특권을 행사하신다. 둘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불로 빛을 비추지 않는가? 성령은 조명의 영이시다. 불은 따뜻하게 하지 않는가? 그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속에서 달아오르지 않는가? 불은 태우지 않는가? 태우는 영으로서 심판의 성령은 사람들의 부패한 모든 찌꺼기들을 태우지 않는가? 그와 같이 성령은 영혼을 자기처럼 거룩하게 만들며 그 성향이 하늘로 향하게 만든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최종적인 심판의 결정에 의해 구별 지으러 오실 것이다(12). 손에 키를 들고. 지금 그는 정련하는 자로서 앉아 계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교훈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보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당이다. 교회의 모형인 성전은 타작마당 위에 세워졌다. 둘째, 이 마당에는 밀과 겨가 섞여 있다. 참된 신자는 밀과 같고 위선자들은 겨와 같다. 지금은 이들이, 즉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동일한 외적인 신앙 고백 아래 함께 섞여 있다. 셋째, 장차 그 마당이 정하게 되어 밀과 겨가 분리될 날이 올 것이다. 전 우주적인 키질이 행해지고 구별이 시행되는 때는 마지막 심판 날이다. 넷째, 하늘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밀을 그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전부 모아들일 곡간이다. 거기에는 결코 겨가 없다. 밀은 '곡간'(13:30)'창고'에 모아져 거기서 철저하게 정미된다. 다섯째,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로서 겨를 태울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밭에 있지만 그때는 마당에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3:13-17

보라, 의의 태양이 영광 중에 떠오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적 직무를 수행해야 할 때가 이르렀다. 그는 이 일을 예루살렘에서 하시지 않고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곳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하셨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은 요한에게 갔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서만 환영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으로 오신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식 속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떤 수고나 고통을 회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 머물지 말고 기꺼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요한이 가까스로 그리스도께 세례 베푸는 일을 허락함(14,15)

자신을 드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위대한 겸손이 실례였다. 일찍이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자마자 겸손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고귀한 영광을 받으시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사역 첫걸음에서 이처럼 자신을 낮추신다.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은 낮아지기 시작해야 한다. 명예를 얻으려면 먼저 겸손해야 한다. 무릇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명예롭게 하실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점을 보게 된다.

(1) 요한은 자신이 예수께 세례를 베푸는 일을 반대하였다(14).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발을 씻으려고 할 때 반대했던 것(13:6,8)처럼 요한은 예수님을 말렸다.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겸손한 행동들은 아주 놀랍고 깊고 신비해서 그의 마음을 아는 자들조차도 그 행동들의 의미를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요한은 겸손하게 주님의 이러한 청은 자신이 받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요한은 그때 커다란 명성을 얻었었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얼마나 겸손한가를 보라! 하나님께서는 평판이 높아져도 계속해서 겸손한 정신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 더 큰 명예를 준비해 두신다. 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당신에게 성령의 세례를, 즉 불로써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비록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지라도(눅 1:15) 그는 자신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많이 받은 자들일수록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비록 그가 여자에게서 난 자 중 가장 큰 자였을지라도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했다. 참으로 순결한 영혼들은 아직도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불순물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영적인 씻음을 간절하게 구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했다. 가장 훌륭하고 거룩한 자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 더욱더 뛰어난 사람일수록 그러한 필요성을 더욱더 잘 안다. 요한은 이 말을, 지극히 숭앙하며 그를 메시아로 맞아들이려고 하고 있는 무리들 앞에서 말하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 없이는 파멸하고 만다는 것을 고백하기 때문에 사람들 중 가장 큰 자인 세례 요한이 경멸받게 두지는 않는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지만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시간적으로 그리스도를 앞선 자들도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요한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자기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그는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네 자신을 조심하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매우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예수께서는 이러한 반대를 취소시키셨다(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15).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겸손을 받아들이셨으나 그의 반대는 받아들이시지 않았다. 여기서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신다. 그리고, 그 세례가 지금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제 때에 행해져야 아름답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낮아지신 상태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 이와 같이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하지만 우리를 위하여 죄인이 되셨다. 요한의 세례는 지금 명성을 얻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통해서 그의 역사를 행하고 계신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하나님은 그 일을 성취시키신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세례는 지금 베풀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지금이 그리스도께서 대중에게 나타나실 때이며 가장 적합한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그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모든 일에는 타당성이 있었다. 그 모든 일은 매우 은혜롭고 사랑스러우며 좋은 평판을 들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례 받는 것을 그에게 합당한 일로 즉 모든 의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는 것이 그에게 합당하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행하시고 그다음에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도 그와 같은 방법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물세례에 복종하는 것이 합당한 이유는 그 세례가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그 뜻과 그에 대한 이 같은 이유를 듣고서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이에 허락하였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영광을 그로 하여금 거절하게 만든 그 겸손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명하신 봉사를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어떠한 겸손의 구실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핑계 삼아 우리의 의무를 거절해서는 안된다.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심을 영광스럽게 하심(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16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6) 물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고백할 죄가 전혀 없으시기 때문에 즉시 물에서 올라오셨다. 한없는 즐거움과 대단한 결의를 가지고서 일에 착수하는 사람처럼 그는 곧 올라오셨다. 그는 한시도 시간을 허비하려 하시지 않았다.

(1) 별이 가득한 저편에 있는 어떤 것을 그에게 나타내기 위해 '하늘이 그에게 열렸다.' 이 현상은 주님으로 하여금 그 앞에 놓인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그의 사업을 수행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복종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죄는 하늘을 닫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친밀한 교제를 중단시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천국을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의 빛과 사랑이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어졌다.

(2)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 그 현상을 보셨고(1:10) 요한도 그것을 보았다(1:33, 34). 필시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그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현상은 주님의 공적인 취임을 나타내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려 그를 비추었다. 옛 세계의 맨 처음에 하나님의 영은 마치 새가 둥지 위를 날아다니는 것처럼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1:2). 여기서도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맨 처음에 그와 같이 '여호와의 신이 그 위에 임하셔야'했고 (11:2; 61:6) 또 그렇게 임하셨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선지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선지자들은 언제나 그들 위에 임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셨다.' 만약 이때에 어떤 형체가 있다면(눅 3:22) 그것은 틀림없이 사람의 형제는 아니다.

그 형체는 필시 다른 무엇보다도 하늘을 나는 조류 중의 하나의 모습을 띠었을 것이며(지금 하늘은 열려 있다) 조류 가운데서는 비둘기만큼 그 형체에 적합한 새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비둘기 같은 영이다. 성령은 새들 가운데 왕인 독수리의 형체로 내려오시지 않고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무해하고 악의가 없는 비둘기의 형체로 내려오셨다. 비둘기는 많이 우는 동물이다(38:14).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우셨다. 그리고 회개하는 영혼들은 골짜기의 비둘기들로 비유된다. 비둘기는 날짐승 가운데 제사에 드려진 유일한 종류였다(1:1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흠없이 드렸다. 노아의 홍수가 감해진 소식은 그 입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비둘기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의 기쁜 소식은 비둘기 같은 성령에 의해 적절하게 전해졌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하신다는 것은 비둘기의 날개를 타고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기쁜 메시지다.

(3) 이 엄숙한 의식을 설명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다(17). 성령은 비둘기 같은 형체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목소리로써 자신을 나타내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구주 예수를 어떻게 인정하시는가를 살펴보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 말씀은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계신 관계를 나타낸다. 즉 그는 "내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구속자로서의 사역과 직무에 특별히 임명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성별 되고 인침을 받으셨으며 아버지의 양육을 받으셨다. 다음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께 두신 애정을 보여 준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특별히 중보자로서 그리고 인간 구속의 사역을 떠맡았음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셨다. 예수께서 구속의 언약을 찬성하시고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의 독생자 곧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아기지 아니하시고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인정하시기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가를 보게 된다.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내가 그와 더불어 기뻐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를 기뻐하시며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자를 기뻐하신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의 자녀들을 싫어하셨으나 이제는 그의 진노가 사라지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셨다'(1:6).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화해하신 아버지이시다. 이것이 모든 복음의 총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꺼이 믿음으로 "그는 우리의 사랑하시는 구주시며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쁘게 여김을 받는다"라고 한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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