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로마서 9장 주일설교말씀] 남은 자의 구원(롬 9:14-33)

엘벧엘 2021. 9. 1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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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9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남은 자의 구원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창세 전에 선택받은 자를 구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항상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남은 자의 구원(롬 9:14-33)

 

우리가 개인적으로 전도를 하다 보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되십니까? 무엇보다도 첫째로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특별히 그 상대가 믿을 만한 충족한 조건을 갖춘 분인데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이 안타까움을 한층 더 더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대대로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분이거나,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가 다 크리스천이시고, 미션 스쿨 출신 이시고, 사회적인 지위도 퍽 괜찮고 성경도 알고 찬송도 알고 있는데도 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볼 때에 이 안타까움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당시에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을 때 바로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9장 4-5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특권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바울 사도가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전도할 때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면서도 또 한편 우리 마음속에는 감사의 마음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믿지 못하는 예수를 나는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신앙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된 소수의 무리들에게 적용되는 성경적인 독특한 명칭 하나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27절에서 등장하는 ‘남은 자’(ramnant)라는 단어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27절).

이 ‘남은 자’란 말속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남은 자란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둘째는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구원받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섭리와 역사를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국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그 정황을 묘사하기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우상의 제단 앞에 엎드러졌다’고 말합니다. 단이란 이스라엘의 북방의 끝에 있는 도시이며 브엘세바는 저 남방의 끝에 있는 도시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도처에 우상의 제단들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믿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엘리야 선지가 얼마나 고독했던지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만 남았습니다.” 이 말을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습니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선  엘리야에게 “아니야, 이 시대에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들을 칠천 명이나 숨겨두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이들은 점진적으로 이방 문화에 동화되면서 신앙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방의 문화와 전통과 종교 속에 물들어 가고 있었을 때에도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당(Synagogue)을 세워서 율법(Torah)을 읽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새 날을 주신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드디어 포로생활이 끝났을 때 바로 이 남은 자들이 그들의 고향땅에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습니다. 이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가 이 남은 자의 반열에 참여하여 인생을 살 수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당신이 남은 자 속에 끼여 있다고 믿으십니까? 이 시대에 종교인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교회를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고 있는 남은 자들 속에 나도 한 사람이라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다시 27절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말하기를 ‘남은 자’만 구원의 영광을 누리고 ‘남은 자’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대부분의 자신의 동족이 불신앙의 길로 가고 있는 안타까운 정황을 지켜보면서 개인적인 자기의 신앙의 고백을 로마서 9장에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포함해서 매우 소수의 그룹에 속하는 적은 무리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원의 영광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메시아로 고백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놀라운 이유가 바로 ‘남은 자’의 구원, ‘남은 자’의 삶의 특권에 대해서 불신앙의 민족들 앞에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술어를 빌려서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가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두 가지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모세에게 하신 말씀으로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15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노예 되었던 애굽 땅에서 떠나는 출애굽의 경험은 일종의 구원의 경험, 해방의 경험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들인 구원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은 그들의 실수 때문에 노예생활을 시작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끌어내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비참한 애굽의 노예가 된 자리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자인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사건을 지적하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얻은 것은 그들이 구원을 호소했기 때문도 아니요, 그들이 구원자인 모세를 따라나서기로 결정했던 때문도 아닌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 백성들이 구원을 호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따라나서기로 결정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것은 피상적인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이 구원을 받고 애굽 땅을 떠날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받은 후에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구원을 위협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바로는 이 백성들을 다시 애굽으로 끌어 가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바로를 쓰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도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다시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보전하고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의 굳은 신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구원을 지키시고 보전하셨으며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오늘 내가 남은 자의 반열에 서서 구원의 영광을 누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 때문인 것을 믿는 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21절 이하에 등장하는 토기장이의 비유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듭니다. 두 개의 그릇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그릇은 긍휼의 그릇이며, 또 한 그릇은 진노의 그릇입니다. 여러분, 토기장이가 이런저런 그릇, 즉 긍휼의 그릇이나 진노의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여기서 진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도, 혹은 긍휼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도 만드실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본문의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오”  22절은 “만일”이라는 가정법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흙으로 긍휼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을 만들었을지라도, 혹은 진노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럴 수 있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진노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초점은 진노보다는 긍휼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22절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진노의 그릇이라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또한 그 긍휼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을 통해서 영광을 나타내신다면 그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시겠느냐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24절에서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를 막론하고 우리는 바로 주님의 긍휼의 여김을 받으실 대상으로 작정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오늘까지 그 구원을 누리면서 구원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다가 중간에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저 사람은 왜 지조가 없을까. 나는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오늘 본문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진정한 근본적인 원인도, 그리고 오늘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고 지킬 수 있었던 원인도, 구원을 폐기할 수 있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무효화할 수 있는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을 지킬 수 있었던 그 모든 배후의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의 교리 혹은 선택의 교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정의 교리나 혹은 선택의 교리를 전개할 때 바울 사도는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킬 두 가지의 반론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 선택이 사실이라면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버리시는 하나님은 불공정하신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할 것을 미리 예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어떤 사람을 선택하고 쓰시고 또 다른 사람은 거절된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인가요? 바꿔 말한다면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이 아닐까요?라는 질문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바로 같은 인물을 강퍅하게 하셔서 그를 사용하셨다면 장차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바로를 어떻게 심판하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요?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19절의 말씀입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선택의 교리는 불공평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불합리하다고 사도에게 반론을 던질 것임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렇게 예상되는 반론에 답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합리적이십니다.”라는 논리를 전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연구해 보시면 바울 사도는 그런 대답을 진술하지 않고 있는 것이 본문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른 대답으로 이끌고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의 교리나 작정의 교리를 말하게 되면 감격하게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반발하기가 쉽습니다. 사실 이 선택의 교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작정하셨으며, 나를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을 그가 친히 지키신다라는 사실은 얼마나 감격할 일입니까?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선택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꼭 한 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 권한을 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쇼핑을 가서는 고를 것 다 고르고 선택할 것 다 선택하면서도 하나님만은 선택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바꿔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교묘한 지성의 타락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선택의 교리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 있는 이 선택의 교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을 향한 도전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20절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고 전지 하십니다. 그가 만약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면 그는 정말 하나님이실 수가 있을까요? 그보다 놀라운 사실은 선택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나를 버릴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왜 감격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할까요?  

바울 사도는 불신앙의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선택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내게 특별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자격에도 불구하고, 나의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옛날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남은 자가 될 수가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 때문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남은 자의 구원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던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바울 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작정이나 선택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이 작정이나 선택의 교리를 기계적으로 혹은 숙명론적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부분의 메시지를 깊이 묵상해 보면 성경은 절대로 선택의 교리를 기계론적으로 풀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인격적인 것입니다.  

22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시고자 하사-여기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자 어떤 진노의 그릇을 예비하신다 할지라도, 또 그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시비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이 진노를 작정하시면서도 이 진노의 밑바닥에 숨어있는 사랑을 보십니까? 진노는 사랑입니다. 그의 진노하심이 사랑이라면 선택은 더욱더 사랑이 아닐까요? 그분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웠다는 이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 사도는 호세아의 메시지를 구약에서 인용합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5절). 선택의 교리는 본래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으로,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던 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사랑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의 교리는 성경에서 생동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사랑의 드라마는 호세아 자신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얼마나 생동하는 모습으로 증언되고 있습니까?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은, 남편 몰래 바람이 들어 부정을 했습니다. 그녀는 한번뿐이 아니라 두 번째로 부정을 했습니다. 호세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한탄했을 때 하나님께선 다시 가서 부정한 아내를 데려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호세아가 부정한 아내로 인해서 가슴 아프고 답답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인해 가슴 아프고 답답한 하나님의 심정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와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그 하나님 보다도 세상과 짝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이 백성은 다 간음한 자들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오늘도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내 답답함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다시 끌어 앉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열납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내 백성들이 아직도 내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을 향한 나의 끊임없는 지속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얘기가 아닐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직도 크리스천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우리의 굳은 신념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날마다 살아가는 내 삶의 현장을 하나님이 보실 때, 내 삶의 모습을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들을 향해서 징계하고 싶어 하실까요? 

2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보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에게 여러분은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정죄하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바로 소돔이요, 고모라이신 줄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속에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주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어거스틴이 갑자기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를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다가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는 벌써 나를 작살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주의 공의대로 우리들을 처리하였다면 벌써 너희들은 소돔이 되고 고모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남은 자로 남겨 두신 이유는 그의 끊임없는 지속적인 사랑으로 그가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용서의 교훈을 가르치실 때에 내 이웃이 네게 허물과 실수와 잘못을 범할지라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셨을까요? 왜 일흔 번, 일곱 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까요? 그것은 끝없는 용서, 무한한 용서를 가르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용서의 밑바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그 조건 없는 긍휼의 풍성한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오늘도 지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아직도 남은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로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세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요구하는 한 가지의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고 경배하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 의가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의’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의’를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자 한 그들의 행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를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그들의 행위를 의존해서 율법을 통해서 의를 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의’를 얻은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서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30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그런즉 무슨 말하리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30-31절).  율법의 행위를 좇아 간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자리에 이르지 못하였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의를 이룰 수가 없다고 버림받았던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 수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강조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이 시대의 가장 신앙적인 혼란은 믿음이란 단어가 믿음의 대상이 강조되지 않은 채 믿음이란 단어 그 자체가 강조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때때로 그 믿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최선의 행위도 나를 의롭다 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죄성을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보혈을 흘려 돌아가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순간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닐까요?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시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행위에 근거하여 의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어느 날 만나게 될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아닌 심판자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만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심판주로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두 가지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분을 떠난 채로 자신의 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어느 날 거치는 돌, 부딪히는 돌, 혹은 깨는 돌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잘 들어 두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날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님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요즘 테러리스트 한 사람이 잡혀서 세계의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만, 과거의 영국에서 테러리스트 한 사람이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 그가 청년이었을 때에 최초로 그가 어떤 살인 사건에 가담해서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주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아주 유능한 변호사가 이 사람의 변호를 맡아서 그의 놀라운 변호를 통해서 이 사람이 정죄되는 것을 면하게 만들어 주고 보호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변호사는 이 사람이 석방되던 날, “이제 당신은 다시는 이런 일에 가담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사람은 그런 일을 계속했고 나중에는 아주 흉악한 테러리스트가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잡혀서 법정에 끌려 와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과거에 자신을 변호해 주던 그 변호사를 판사로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를 특별히 아껴 주었던 그에게 또 한 번의 긍휼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판결하는 판결문에서 이 판사는 유명한 이런 판결문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 때 나는 당신의 변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변호인이었던 내 말과 내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지금 나는 당신의 변호인이 아니라 재판관입니다. 나는 당신의 죄대로 당신을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꼭 같은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을 경험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느 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주님은 당신의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일 것입니다. 오늘 나는 그리스도의 그 놀라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그 하나님의 은혜 속에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이 된 것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살고 계신지요? 

결론을 맺습니다. 내가 남은 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확인하신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하심 때문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신다면 한평생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정말 남은 자인지 아닌지 그것이 확실하지 못합니다. 제가 전도한 분 중에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선택된 것만 알면 믿을 텐데 제가 그것이 확실치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선택되었기를, 혹은 선택받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정말 원한다고 대답하시더라고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시라고 하자 그분은 그렇게는 안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선택받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택된 자들은 그 믿음을 고백하게 마련이니까요. 그러므로 선택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꼭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신다면 선택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확실히 영접하고 고백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선택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이 삶의 자리에서 이 복된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내가 선택받은 자인 것을 확신하고, 남은 자로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수많은 이웃들이 불신앙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 남은 자의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주님 앞에 여러분 앞에 내려진 그 은혜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룻기 1장 성경말씀]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가정〈룻기 1장 16~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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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룻기 1장 성경말씀 중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가정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기근이 오자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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