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로마서 5장 주일 성경말씀] 구원의 축복들(롬 5:1-11)

엘벧엘 2021. 9. 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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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5장 주일 성경말씀 중에서 구원의 축복들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칭의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불러 주시고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전에 선택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가 덮어졌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제  목 : 구원의 축복들

본  문 : 롬 5:1-11

 

설교자 이동원 목사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두려움의 심리를 이용해서 발달한 현대적 사업이 있다면 아마도 보험업이 아닐까 합니다.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동차 보험을 들고, 또 비행기 타는 기회가 많아지니까 항공보험, 해상보험, 그리고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료보험을 들고, 모처럼 장만한 내 집에 대한 애착과 집을 잃을 두려움 때문에 주택보험도 들고, 도난보험, 화재보험도 들곤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축구스타들은 발이 생명이기 때문에 발 보험을 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발가락 보험이 되겠지요?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손 보험을 들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무슨 보험을 들까 생각하다가 주둥이 보험을 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이런 모든 유형의 보험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보험이 있다면 아마도 생명보험일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도 생명보험을 들으라는 가입 권유를 받았는데 그 필요성은 충분히 납득되고 동의가 되면서도 다음의 두 가지 때문에 주저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아직은 죽을 때가 되진 않았는데.”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들어봤자 내가 받는 당장의 유익은 없지 않은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에도 불신자의 입장에서 사고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천국 가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 신앙이 지금 당장 살아가는 오늘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며 축복이 있느냐라는 반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복음이 사후의 저기에서 복음일 수가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복음이 지금의 여기에서도 복음일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그 대답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예스)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에는 미래적 차원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믿는 자들을 위해서 선물로 준비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현재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9절을 읽어보시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 받고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벗어나 천국에 갈 것이라는 구원의 미래적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은 조금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10절에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구원은 얼마나 놀라울 것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11절을 읽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가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씀은 바로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놀라운 삶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구원의 현재적 축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본문은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아와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는 사실을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얻어지는 열매, 즉 칭의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입니다. 화평을 누리자는 말이 영어 성경에 보시면 ‘우리가 현재 평화를 갖고 있다(We have peace)’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늘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현재적 축복은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로, 성경은 이것을 ‘화평’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평화라고도 말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화평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통속적으로 사용하는 화평이라는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은 주관적 평화가 아니라 객관적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느낌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것은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한다’는 말은 영어로 ‘Peace with God’(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을 이룬다)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 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본문 10절의 첫 부분에 보시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까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가 있는 곳에 진노를 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 시 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편에서도 자신의 죄 때문에 자기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부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10절을 보시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화해자로서 죽으신 것이며 또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는 놀라운 사건이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대한 가장 드라마틱한 설명을 해 놓은 것을 인도네시아의 이리안쟈라는 정글에서 사는 식인종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돈 리챠드슨이라는 선교사가 쓴 ‘화해의 아이’란 수기의 책을 읽다가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그 야만의 식인종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까를 고민하다가 어느 날 자기의 선교 대상이었던 사위 부족이 이웃 부족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할 것이 확실시되자 그들의 지도자의 아들을 상대 부족에게 내어주게 되고 그 아들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자 마자 곧 전쟁이 끝나는 광경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돈 리챠드슨 선교사님은 사위 부족에게 설교할 기회가 있게 되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렇게 생생하게 설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의 아이(Peace Child)’로 주셨습니다. 이 화해의 아이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된다는 사실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문의 2절을 통해서 그 대답을 발견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서 있다’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들어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사실인지 아십니까? 죄인인 나를 속속들이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내가 나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사실입니까?  요즘 투시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이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만약 제가 이 투시의 은사를 가져서 여러분을 다 투시한다고 해 보십시오. 제가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안다면 제 앞에 설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하물며 전능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요?

비유 건대, 이런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구약에 보시면 옛날 중동지방의 왕가의 습관 가운데 하나는 왕을 만나려면 왕이 먼저 불러야만 왕 앞에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왕비라 할지라도 왕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고 만약 왕의 부름 없이 나아간다면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얘기가 구약의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더가 자기 삼촌인 모르드개의 요청을 받고 유대민족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기 위해서 왕 앞에 나아가서 얘기를 해야겠는데 나갔다가는 죽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유명한 결심을 한 뒤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자기 마음대로 왕 앞에 나아갔을 때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한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왕이 지팡이 비슷한 홀을 내어 밀고 그것을 잡으면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에스더 왕비를 본 순간 갑자기 그녀가 사랑스러워져서 홀을 내어 밀었고 에스더 왕비는 그 홀을 잡아서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었던 우리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순간 그분 앞에 나아오는 우리들을 괜찮다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가는 그 특권이 얼마나 두려운 특권인지 여러분이 히브리서를 읽어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는 말씀에서처럼 그냥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꼭 강조되는 단어가 있는데 ‘담대히’ 나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감히 설 수가 없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특권만 주실뿐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서 있다는 말은 그냥 하나님 앞에 선다는 말이 아니라 서서 그분의 얼굴을 뵈옵고 서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과 대화하며, 서서 그분의 사랑을 입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과 더불어 누릴 수 있는 교제와 대화의 놀라운 특권, 저주의 대상이었던 내가 감히 그분 앞에 서서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이 특권이 내게 주어진 은총의 특권임을 믿으시는지요? 

둘째로, 성경은 구원의 축복으로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기쁨이라는 명사는 나타나지 않지만 기쁨이라는 단어가 동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즐거워하느니라”(2절)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기쁨의 삶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저는 우리 한국 크리스천의 삶 속에 좀 더 기쁨이 표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한 선교사님과 함께 일할 때 그분이 제게 왜 한국 크리스천들은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오기 전까지 바깥에서는 명랑하게 얘기고 하고 웃기도 하는데 교회당에 들어서면 갑자기 인상이 달라집니다. 얼마나 어둡고 우울한지 모른다고 하시길래, 제가 갑자가 변명할 말이 인색해서 대답하기를 “선교사님, 한국 교인들은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교사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래요, 그러면 그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은 잊어버렸나요?”라고 하시더라고요. 다시 사신 주님,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놀라우신 그 주님을 통해서 당당히 마땅히 누려야 할 이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누려야 할 이 기쁨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이유 때문에 우리가 즐거워할 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리라” 고 하십니다.                       

로마서 3장 23절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달라진 모습입니까? 이 말씀을 묵상하던 죤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은 천국이란 말과 동의어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계시된 곳이 아닌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즐거움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바라보며 이 땅 거센 비바람 그 많은 역경의 삶을 살면서도 우리가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가 있는 이유는 주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젊은 연인들이 잠시 후에 결혼하면 같이 살게 될 신혼의 집을 생각만 해도 감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의 구원의 즐거움의 이유는 그리스도적 인격에로의 성화의 확신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지금 그 주님을 닮아가도록 주께서 역사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것이 3절과 4절의 말씀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먼저 여기서 ‘연단’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어 성경에 보시면 연단이라는 단어가 Character(인격, 개성)이라는 단어로 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인격이 아니라 이 인격이라는 단어는 시험에 합격되어 통과된 인격이라는 뜻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주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연단시켜 주님이 원하시는 인격으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환난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환난이란 말은 본래 ‘--아래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 당시에 이 단어가 쓰인 유래를 살펴보면, 감람유 같은 기름을 만들 때 보통 그 당시의 기계는 아래에 감람나무 열매를 놓고 위에서 꽉 눌러서 기름을 짜냈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스트레스나 우리를 괴롭히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환난은 우리를 빚어 만들며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인격을 닮아 사는 삶과 그 인격에로의 연단인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신 후에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 인내야 말로 얼마나 주님이 우리에게 보시고 싶어 하시는 주님 자신의 인격인지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만들어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의 열매는 원하면서도 그 과정을 견디질 못해합니다. 누구나 다 인내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인내하는 과정은 견디기가 매우 힘듭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인내가 필요하다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발 저에게 인내를 주시옵소서. 지금 당장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인내는 당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즉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만들어져 간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11절에 보시면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환난이 허용되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한 단계가 있습니다. 그 환난이 왜 오는지, 내가 그 환난을 왜 겪어야 하는지, 그 환난을 왜 통과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우리가 그 환난 중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가 있다면, 그 환난 중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환난 중에도 다가오시는 주님, 그리고 환난의 깊이보다 더 심오한 기쁨으로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해 보셨는지요? 그때 우리는 환난의 비바람과 역경과 캄캄한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환난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찬양할 수가 있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세 번째의 구원의 축복은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 평생의 삶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희망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은 내일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군 군목이 참호마다 다니면서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데 어떤 참호에 가서 “젊은이, 기도해 드릴까요? 기도제목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 젊은이는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희망들은 이루어지면 별 볼 일 없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소원했던 희망이 성취되자마자 또 다른 좌절과 허무를 느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 희망의 초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들의 희망은 이기적이고 지나치게 순간적인 희망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내용을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정말 붙들어야 하고 기대해야 할 소망은 인격적인 소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소망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가는 소망입니다. 4절의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워 우리가 빚어 만들어야 할 인격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할 소망인 것을 믿으십니까?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반드시 주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비바람, 폭풍우 속에서도 주께서 나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빛나는 인격으로 빚어 만들어 주 앞에 세워주실 이 희망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이 희망 때문에 바울 사도는 자기의 육신이 낡아가는 황혼을 바라보면서, 젊은 날의 로맨스와 젊은 날의 모든 기대가 사라지는 인생의 노경에 처해서도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내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내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쇠하지 아니하는 흥분 속에 날로 더 큰 기대와 영원한 희망, 주님은 마침내 나를 주님 닮은 놀라운 사람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손해, 오늘의 영광, 오늘의 내가 받는 중상과 모략, 내가 받는 슬픔과 내가 받는 까다로운 짓밟힘이 모든 인생의 역경과 뒤틀리는 관계 속에서도 주님은 나를 빛나는 존재로 세우시기 위해서 이런 환난의 틀속에 집어넣고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네 번째의 구원의 축복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적 소망이 마침내 실현될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주께서 우리 안에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난을 만날 때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도 불신자도 똑같이 환난을 만납니다. 신자라고 환난이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환난 속에서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는 사람들은 환난에도 불구하고 그 환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고 기뻐할 수가 있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랑의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여기서 부은 바 되었다는 말은 문법적 완료형입니다. 한번 부어졌는데 그 효과가 지금도 충분한 효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부어주신 사랑은 우리가 평생을 사용할 수가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넉넉한 이 사랑의 강을 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이 사랑을 체험했나요? 십자가 앞에 섰을 때였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 그 사랑은 또한 내가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는 능력의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그 사랑의 깊이, 그 사랑의 놀라움을 아시기 위해서는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내가 주님 만나기 전에 어떤 모습의 인간이었는가를 본문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본문은 네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본래 “연약한 자”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연약한 자라는 말은 사실 연약한 번역입니다. 원문에 보시면 ‘무력한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 우리는 인간을 강한 사람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남자들도 예쁜 여자만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무력한데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6절 후반부에는 우리가 “불경건한 자”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있었던 불경건한 사람이었음에도 그 추함을 보시고 아시면서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표를 빗나가고 있었던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식도 계속 방황하면 꼴 보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나의 방황을 아시면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되었을 때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무력했고, 불경건했고, 죄인이었으며,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었음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아무 능력이 없었음에도 우리의 최선의 선도 나를 구원하기에는 절대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불경건함과 추함을 보시면서 아시는 하나님, 나의 죄인 됨과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원수 됨을 아시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신 분이시라면, 이제부터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나, 사랑하지 못할 환경, 사랑하지 못할 운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는 사랑치 못할 사람이나, 환경이나, 운명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넉넉한 사랑으로 한평생 세상을 이길 능력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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