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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신년예배 주일설교말씀] 새해의 비전(사 6:1-8)

엘벧엘 2022. 12. 3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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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소명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이사야에게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새해에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해가 밝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주시는 비전을 따라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새해의 비전(사 6:1-8)

 

선지자 이사야는 그가 젊었을 때에 본 영적 체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그는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아라는 단어입니다. 멍청하게 눈에 뜨이니 보는 것이 아니고 경험하다, 주시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주목하여 보다’의 뜻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사야가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요 신령한 눈으로 본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신령한 눈으로 보는 것을 요새는 흔히 비전이라는 말을 씁니다. 본래는 영어이지만 이제는 한국에서도 그대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오늘 설교에서 그냥 비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그때에 성전 안에서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큰 비전을 보았습니다. 이 큰 비전은 그의 생활을 변하게 하였고 그의 일생을 또한 지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고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그는 직감하였습니다. 이 비전이 이사야로 하여금 위대한 예언자, 선지자가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는 그때에 하나님에 대한 큰 비전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에 대한 정체를 또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는 그 자신의 죄와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한 비전을 또한 본 것입니다. 

여기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마입니다. 벙어리가 되다, 실패하다, 멸망하다, 베어 넘어지다, 파멸하다, 파괴되다의 뜻이고 ‘입술’이라는 말인 히브리어 세페트는 입술,  언어,  말을 의미하는 사파의 쌍수와 복수형으로 언어, 말을 뜻하며 ‘부정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타메는 종교적 의미에서 더러운’, ‘더럽혀진’이란 의미입니다. 이렇게 더럽혀진 상태로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죄를 깨달은 인간들에게 사죄의 복을 주시는가 하는 비전도 보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이 큰 비전을 통하여 그의 사명에 대한 비전도 또한 확실히 본 것입니다.

그는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때 이사야는 곧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핀 숯으로 죄악 된 입술을 지저 악이 사하여졌으니 그 은혜에 이제는 보답하여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이 큰 비전을 통하여 그의 사명, 그의 임무, 곧 그의 일생 동안 해야 할 사업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그들의 비전을 통하여 평가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비전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이렇게 비전을 보여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일상생활과 그 일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물이 주전자 뚜껑을 밀어 올리면서 끓어오르는 것을 보고 증기기관을 착안하였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 한 개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보았습니다. 이런 이들이 발명가가 되고 예술가가 되고 또는 하나님의 위대한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데도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고 호세아 4:6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신령한 눈으로 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그가 가지는 비전,  곧 영적으로 보는 것 이상의 무엇을 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 25:40), 삼가로 번역된 말씀인 히브리어 라아는 ‘보다, 숙고하다, 분별하다, 주시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주목하다, 인지하다, 존경하다’의 뜻이고, 양식이라는 히브리어는 타브니트인데 구조, 모형, 비슷함, 모습, 형태, 닮음, 견본의 뜻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실 때에는 보여주시는 견본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하는 것을 산에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세는 시내 산에서 성막에 대한 비전을 보았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다가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교역자들은 성막, 곧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대한 큰 비전을 먼저 보아야 교회를 주님의 명령대로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눈앞에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보지 못하고 덮어놓고 건물만 덩그러니 지어놓으면 그것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빈 껍데기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 유추해서 말하자면,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기에 대한 큰 비전을 보아야 우리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로 세울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 같이 이 세계에 대한 큰 비전을 보고 가지고 있어야 온 세계 인류가 자유와 평화와 번영으로 살만한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회교 국가들에서는 어디나 그들의 교리대로 총칼이 번뜩입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회교국에 원조를 하는 장면을 TV로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저들에게 육의 양식과 함께 영의 양식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저렇게 식량공급을 해주어도 금방 원래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온 세계가 이런 관점의 비전을 보고 가져야 진정한 세계 평화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비전을 보고 가지고 있어야 우리 자신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인격, 참다운 인간의 인격으로 건설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 가에 대한 비전이 없는 인간은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빈 껍데기 동물일 따름입니다. 

시편 49:20절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그림자로, 형태를 닮게 창조되어(창 1: 27),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시 8:5) 하나님 앞에서 고귀한 존재들인데 이 인간의 모습과 사명에 대한 비전을 보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인간은 그야말로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 상태 그대로 버려진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야곱의 우물가에 서 계실 때에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을 보시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 여기에 밭에 대한 예수님의 비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 말세입니다.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핵심이셨는데 말세에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벧전 1: 2) 그러므로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아직 넉 달이 있어야 추수 때가 될 것으로 보여도 예수님의 신령한 눈으로는 바로 지금 추수를 해야 할 영혼들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 사람답게 사는 영의 세계에 대한 비전 우리의 궁극적 목표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차원 높은 영의 세계가 비전으로 보여야 합니다. 전도에는 먼저 올바른 큰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회자가 교회를 자꾸 키워달라고 기도를 하니 환상 중에 누가 묻기를 왜 교회를 키워달라고 하느냐고 묻더랍니다. 이 목회자가 엉겁결에 대답하는 말이 먹으려고요 했다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었습니다.

그런 비전이면 곤란합니다. 주님의 복음이 올바르게 전파되어야겠다는 올바른 전도에 대한 비전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올바른 전도의 목표와 방법이 나옵니다. 전도 한 뒤에 그 전도받은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비전이 필요합니다. 필요 없는 경쟁적 전도는 부작용만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꾸중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목회를 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도가 나와 전도받는 사람과 나가서 우리 모두에게 가져다 줄 놀라운 효과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가지고 전도에 임할 때 그야말로 우리가 천국을 건설하는 역군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큰 비전, 교회에 대한 큰 비전, 국가에 대한 큰 비전, 세계에 대한 큰 비전, 그리고 자신에 대한 큰 비전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따라 전도에 대한 큰 비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제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단계 진척시켜야 하겠습니다. 큰 비전이 먼저 필요합니다만 비전이 비전에만 그쳐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일평생 높은 이상만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해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분들이 많은데 바로 그런 분들이 비전을 비전으로 가지고 있기만 하는 분들입니다.

비전은 꼭 실현시켜야 합니다. 이 비전을 성취하는 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성경 전 역사를 통하여 그들의 큰 비전을 실현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위대한 신앙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큰 믿음이 있어야 큰 비전을 실현합니다. 마태복음 15:28에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한 가나안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시면서 그 소원대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원이란 것은 비전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큰 믿음의 소유자라고 칭찬을 받은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그는 자기 하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한 가버나움의 로마장교 백부장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할 분이요. 다만 멀리서 말씀으로도 충분히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던 사람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 들아(마 6:3) 하시면서 믿음이 작다고 책망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과 같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실 때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자 제자들이 겁이 나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 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너희가 스승으로 모시고 다니는 분이 누구인 줄을 그렇게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당시에 그 제자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너무 작아 믿기는 믿으면서도 항상 두려워하였고 근심도 하였고 의심도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큰 믿음을 가져야 비전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으로는 부족합니다. 갈릴리 바다가 때때로 풍파가 높은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환난과 질고와 재난과 빈곤과 전쟁과 질병과 슬픔과 죽음이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런 고해 같은 세상을 건너갈 때에는 큰 믿음의 배가 필요합니다. 작은 배로는 안 됩니다. 금방 뒤집어집니다. 믿음은 영혼의 배입니다. 믿음의 배는 커야 합니다. 이러한 험한 세상에서 우리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똑바로 보연 과학시대라, 혁명시대라, 우주시대라, 정보시대라, 등등 이야기를 하지만 분명히 신앙의 시대는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시대입니다. 대신 황금만능주의, 유물론,  세속주의, 도덕적 허무주의, 퇴폐주의들이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은 방패라고도 말하였습니다. 이 믿음의 방패로 모든 마귀의 불화살을 소멸하라고 하였습니다.(엡 6:16)  소멸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벤뉘미입니다. ‘불을 끄다, 냉각시키다, 억압하다의 뜻입니다. 마귀는 대적하면 피합니다(약 4 :7) 

이렇게 마귀의 불화살을 막으려면 큰 방패가 필요합니다. 손바닥 크기 만한 작은 방패로는 안 됩니다. 큰 믿음의 방패가 있어야 그 보호를 받아 큰 비전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때때로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을 만한 근거는 선물로 주시지만(엡 2:8), 그것을 믿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 자신입니다. 그 근거에 따라, 말씀에 따라 우리가 확실히 믿을 때에 그 믿음대로 성취됩니다. 그래서 큰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큰 믿음이라는 것은 포부가 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작은 것이라도 약속하신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주신다는 단단한 믿음을 말합니다.

이제 큰 비전을 큰 믿음을 가지고 실현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큰 비전과 큰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를 통하여 인류에게 실현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믿음을 주신 것 자체가 크신 사랑이라는 것을 인식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비전과 믿음이 있을 때 그는 올바른 인생의 목표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큰 비전을 가졌다는 것이 기껏해야 자기 자신의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이나 공명심에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는 관계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자식을 위대한 인물로 키우겠다는 비전, 교회를 크게 키워야겠다는 비전, 사업을 크게 확장해야겠다는 비전,  나라를 이끌어보아야겠다는 비전, 다 좋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나라면 오히려 세상에 어둠만 더하게 될 뿐입니다. 쓸데없는 경쟁으로 분쟁만 일으킬 따름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큰 비전을 보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모습도 보게 되었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함으로 죄 씻음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자기의 사명을 깨닫게 되어 큰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담대하게 나서게 되었습니다.

새해는 큰 비전을 가지고 그것을 성취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전이 없으면 망합니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나라와 세계와 교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비전을 큰 믿음으로 성취하십시다. 또 시시로 이 비전이 하나님의 사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허망한 것이 아닌가 살을 꼬집어보면서 일로 정진하여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송구영신 예배 원어 설교말씀] 담대한 새해를 맞이하자(요 16: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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