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요한복음 4장 예수님 말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요 4:1-26)

엘벧엘 2024. 3. 1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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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 예수님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을 뜨러 왔을 때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인데도 메시아를 기다리던 여인입니다. 남쪽에 있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요 4:1-26)

 

. 유대를 떠나심 4:1-3

추수기 사 개월 전 예수께서는 유대땅을 떠나셨다(35).

(1) 제자를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성공적이었다. 제자를 삼고(1절).자신의 뜻에 맞추어 사람들을 단련시키고 형성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한에 속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와 같이 만들어지는 사람들이지 애초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2) 제자 된 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셨다. 그러나 손수 베푸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의 손을 빌어 세례를 베푸셨다(2절).제자들을 통하여 베푸셨던 자신의 세례와 손수 모든 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의 세례를 구별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명예롭게 하시며 장차의 일을 위해 훈련시키고자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자신의 지시를 좇아 자신의 일군들이 이루어 놓은 일은 자신이 하신일로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셨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보다 더 많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설교는 요한의 것보다 훨씬 인기가 좋았다.

(4) 바리새인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 이 때에 요한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요한을 제거했다고 생각했던 마당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복음의 득세는 복음의 대적들의 노를 자극하게 마련이다.

(5)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를 반대하는 자들의 귀에 그 소식이 들어 갔음을 아주 잘 알고 계셨다. 이 세상에 우리 주님께 그 의중을 감출 만큼 깊은 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6) 이제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고자 길을 떠나셨다. 주님께서는 유혈까지 불러올만한 핍박을 예상하시고 유대땅을 떠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장을 떠나 그가 하는 일을 그들이 직접 목격하게 하는 것보다는 덜 자극을 주는 그러한 장소에 가셨다. 그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 자신의 증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항복하거나 자신을 노출시키고자 하지 않으셨다. 또한 유대땅에서 모집한 그의 제자들이 아직은 고난을 견디기에 연약했으므로 그러한 제자들을 적에게 노출시키시려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쳐 주셨던 법칙의 한 예를 보이시고 계시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10:23). 우리는 핍박받기 위해 부름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죄 없이도 그 핍박을 피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장소로 갈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해야 할 일들도 있었고 적은 소수인데 비하여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므로 갈릴리로 떠나셨다.

.사마리아 여인 4:4-26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에서 행하셨던 사건에 접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혈통으로 보나 종교로 보나 혼혈 유대인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이 섬기는 신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으며 그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하여 이들은 그리심 산에 예배당을 세웠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하는 예수를 보았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그를 허락지 않았었다(눅 9:53).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큰 욕이 없다고 생각했다.

1.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심(4-6)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시며(10:5) 그의 눈길을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돌리셨으므로, 이곳에서도 공공연하게 전도하지 않으셨으며 아무런 기적도 행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이곳 사마리아인들에게 베푸신 친절은 이따금씩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것이었다(15:27).

(1)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 지역을 관통하여 나 있었다(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4). 만일 요르단 지역으로 상당히 우회해야 하는 길을 진로로 잡지 않는다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다른 길은 없었다. 우리는 유혹과 시험의 장소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들어가야만 할 경우에는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서둘러 빠져나와야 한다. 사마리아가 그리스도께서 가시고자 하신 길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사마리아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는 길을 재촉하시다가 쉬게 된 것은 사마리아성 근처였다. 그 장소가 기술되어 있다. 그 곳은 수가라 불리는 곳으로 시겜 또는 세겜과 동일 지역으로 추정된다. 세겜이란 이 장소는 이스라엘 신앙 안으로 들어오고자 한 첫 개종자를 낳았던 장소였으며(34:24) 이제 지금은 복음이 이스라엘 나라 밖으로 전파되는 첫 장소가 되었다. 이곳은 아비멜렉이 왕으로 추대되었던 곳이었으며(9:6) 여로보암이 도읍지로 정했던 장소였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그 장소와 야곱과의 관계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그 땅과 야곱과의 관계야말로 여타 왕들과의 관계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여기에는 야곱의 토지, 곧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주었던 땅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평범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땀을 흘리시며 애쓰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여로에 곤하셨다.

그때가 한낮의 불볕 더위가 내리쬐는 제 육시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지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참 인간이셨으며, 인간 본성의 공통적인 연약함에 복종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말을 타고 다니시지도, 마차를 타고 다니시지도 못할 만큼 가난한 분이셨다. 우리가 편히 다니고 있을 때 우리 주님의 그 곤비하심을 생각하도록 하자. 예수께서는 몸이 강건하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반면에 제자들은 그들이 별 어려움 없이 마을로 내려간 것으로 보아 피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어진 사람의 몸은 피곤에는 대단히 예민하여 피곤을 거의 견딜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도 보통 여행자들이 쉬듯이 쉬셨음을 볼 수 있다.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6). 예수께서는 피곤에 지쳐서 그대로 앉으셨다.

2.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7-26)

예수 그리스도와 제사장들 사이의 논쟁, 그리고 변화산상에서 있었던 모세와 엘리야와 그리스도와의 대화는 침묵 속에 가리어졌지만 여기 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기록되어 있다. 이 대화는 네 제목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생수에 관한 주님의 교훈(7-15)

1)생수에 관한 이 대화가 있게 된 상황에 주의해 보자. 거기에는 물을 길으려고 온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하고 있다. 그 여인은 물을 긷게 할 종이 없었다. 그 여인은 자기 혼자 힘으로 그 일을 해야 했다. 우리에겐 그야말로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에 의해 어떻게 거룩한 신적 섭리가 영광의 목적을 달성하는가 보라!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 그리스도께서는 동네에 들어 가시지 않으셨으며 제자들을 보내어 음식을 마련해오게 하셨다. 이는 사마리아 읍내에 들어가 음식 드시는 일이 내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샘가에서 좋은 일을 하나 하시고자 했기 때문이요, 음식을 먹으러 읍내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곳에 가져오게 하심으로써 더욱 호젓하게 간섭을 받지 않고 더욱 값싸게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드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마을 가장 좋은 여관에서 드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 긷는 샘가에서 자신의 식사를 하실 수 있었다(4:31-34). 대체로 그리스도께서는 대중을 행하여 전파하셨으나, 여기에서는 비록 단 한 사람의 영혼일지라도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깨닫게 하여 이와 같이 하도록 그의 사역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셔서 단 한 사람, 단 한 여인, 가난하고 불쌍한 여인, 그것도 이방 여인,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시고 계신 것이다.

2)이제 이 대화를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는 이 대화를 물 한 잔 달라는 정중한 청으로 시작하신다. 물을 좀 달라(7).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신 그 이가 이곳에서는 청하는 자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의 말문을 트시고자 물 한 잔을 청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그 지체들(가난한 성도들) 안에서 냉수 한 그릇을 청하고 계시다. 가난한 지체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냉수 한 잔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통상적인 유대 민족의 기질대로 행하지 않으셨으므로 그 여인은 그의 어투에 대하여 말꼬리를 잡는다. 어찌하여 물을 달라 하나이까(9).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는 불구대천의 앙숙 관계였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이 사람이 옷차림으로 보나 말씨로 보나 유대인임에 분명한데 다른 유대인들처럼 처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스러웠다. 모든 면에 온화한 사람들은 도리어 이상스럽다는 눈초리를 받는 것이다. 이 여인은 두 가지 점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 그 하나는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한 잔 떠 주는 친절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신세를 지느니 차라리 어떤 고난이라도 감수한다는 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비록 우리 국가의 방침이나, 우리 정당의 강령이 대단히 까다롭거나 옳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주님과 같이 먼저 친절과 선심을 보여야 한다. 이 여인은 예수께서도 여타 다른 유대인과 똑같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이 여인이 놀란 또 하나의 사실은 이 사람이 단지 청할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인 자기에게서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회를 신적인 일에 대하여 그 여인에게 가르치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알았더면 네가 구하였으리라(10).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이 제기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반목 따위는 아예 문젯거리로 삼지도 않으셨다. 어떤류의 견해 차이의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 견해 차이가 말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경우를 피함으로써 가장 잘 해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에게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하심으로써 이 여인을 회심시키고자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이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지금 맞이하고 있음을 그 여인에게 충분히 인지시키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녀가 지금 은혜의 때를 맞이했음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그녀가 알아야 하지만 무지한 사실에 대하여 암시를 주고 계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단지 한 사람의 유대인, 가난하고 피로에 지친 여행자로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가 자신에 관하여 좀 더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우리에게 베푸심으로 보내진 이 하나님의 선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특권이다. 이 선물은 물 좀 달라 하신 바로 그분이시다. 이 선물이 바로 당신에게 오셔서 청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그가 누구신가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기대하시고 계신가?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무엇인가 유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구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에게 구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식의 부를 결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지식이라는 자산을 소유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지를 알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그녀가 자기에게 청하였다면 자신이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 주었을 것이지 그녀에게 보증하고 계시다.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생수는 샘, 우물 밑바닥에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물과 같은 성령을 의미한다. 은혜의 성령은 생수와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으며 주시고자 하신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넌지시 전해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비꼬고 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께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지 않소?"라고 말하고 게다가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도 크니이까?"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이 여인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니고데모 역시 그랬었다. 이 여인은 자기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이 나그네가 자기에게 물을 조금이라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11)' 게다가 '이 우물은 깊습니다.' 마치 물 양동이가 없이는 물을 전혀 길을 수 없다는 듯이 세상에는 약속을 이행할 수단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 약속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여인은 비웃다시피 말한다, "당신이 그 생수를 어디서고 가져올 수가 없다는 사실을 내가 뻔히 알고 있는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생명의 샘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그 샘을 감추어 두셨는지 볼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충분한 샘물을 가지고 계시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어떤 더 좋은 물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그 우물을 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기서 우리는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과 그 가축이 이 우물 물을 마셨다는 전승이 사실임을 가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서 우리는 샘물들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도록 보존하는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를 살펴볼 수 있다 하겠다.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몇 가지 점에서 그녀는 그릇되었다. 야곱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점에서 그녀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혼혈족으로서 사마리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야곱의 후손이라 자처할 수 있겠는가! 또 이 우물이 야곱이 준 선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해 주는 심부름꾼을 그 선물을 제공한 사람으로 여겨 그 선물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잊어버리고 전해 주는 손길만을 바라보는 경우가 너무도 비일 비재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리스도를 조상 야곱에 비교될 가치가 없는 자로 말함으로써 잘못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선량한 사람들 간에도 옛 것을 지나치게 숭상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취급하는 일이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주는 물인 생수가 여기 이 야곱의 우물의 것보다 훨씬 좋은 것임을 이해시키신다(13-14).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녀를 더욱 권면하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이 야곱의 우물 물이 단지 일시적인 해갈만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보이신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13). 야곱의 우물 물도 다른 물과 마찬가지로 당면한 갈증을 해결시켜 줄지 모르나 곧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우리의 육신의 상태가 연약하다는 사실과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만족이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소모되는 것이다. 생명이란 등잔불같아서 기름이나 연료가 계속해서 공급되지 않으면 곧 꺼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안락이란 언제나 완전하지 못하며 지속되지 않는다.

어제의 식사와 음료가 오늘의 것이 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는 생수는 지치지 않는 만족과 지복을 가져다줄 것이다(14).

은혜의 성령을 소유한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애타는 갈증은 오로지 하나님께 대한 것이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갈망인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이지는 않다 하겠다.

은혜의 성령을 소유한 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물이 그의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공급해 주고 만족케 하는 샘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코 궁지에 몰리는 일이 없다. 그는 위안을 구하고자 세상으로 갈 필요가 없다. 믿는 자들은 자신 안에 샘물, 넘쳐 흐르며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샘물을 가지고 있다. 그 샘물은 계속하여 솟아 오르고 있다. 만일 선한 진리가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우리의 심령 속에 고여만 있다면 그 진리는 우리가 그 진리를 받은 목족에 부합되지 못한다. 또한 그 샘물은 모든 은혜의 목적이 되는 영원한 생명에게 솟구쳐 흘러간다. 신령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생명의 완성을 향하여 솟구쳐 올라가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심령속에 예수께서 주신 샘물은 완성 곧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솟아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 샘물이 야곱의 샘보다 더 낫지 않는가? 이제 이 여인은 이 물을 달라고 이 낯선 나그네에게 애걸한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에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15).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한 말을 부질없는 것으로 비웃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 그것 참 희귀한 발상입니다. 내가 목마르지 않게 된다면 갈증을 겪는 그 수많은 고통에서 나를 빼내줄 것이요, 예까지 물 길러 오는 수고도 덜게 되겠군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그 말이 선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다만 힘없이 나약하게 그리고 정확한 사실을 잘 모르고서 하는 간청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내게 좀 주십시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노동을 좀 덜게 하고, 좀 편하게 하는 것은 불쌍한 일군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좋은 일이다. 나약하고 무식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리스도와 그의 선물에 대한 연약하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듯한 소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과 나누신 대화의 다음 주제는 그녀의 남편에 관한 것이었다(16-18). 그리스도께서 이 얘기로 넘어가신다고 해서 생명의 물에 대한 강론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신 것에는 그만한 은혜로운 계획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생수에 관한 대화를 중단하시고 그녀의 양심을 일깨워 그녀가 보다 쉽게 은혜에 의한 그 제책을 깨달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영혼을 다루는 방법인 것이다. 즉 영혼으로 하여금 우선 죄의 무거운 짐 아래 고통 당하며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후 그 짐을 그리스도에게로 가져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곧 신령한 영적 치유의 과정이다.

1)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신중하고 분별 있게 이 대화를 시작하고 계신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내린 지시는 매우 독특한 묘미를 함축하고 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와라, 네 남편이 너를 가르쳐 주고 이 사실들을 깨닫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와라, 그가 너와 함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며,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할 상속자가 될 것이다.. 이 명령이 그렇듯 좋게 보이는 만큼 여기에는 이러한 선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그녀의 죄를 생각나게 하는 기회로 삼고 계시기 때문이다. 꾸지람을 내릴 때에도 신중함과 기술이 요하는 것이다.

2)이 여인은 양심에 대한 선고를 피하려고 얼마나 애쓰는가! 그러나 자기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에게 선고를 내리고 있다. 이 여인이 말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

3)예수께서는 이 선고를 그녀의 양심에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하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전에 행했던 모든 일을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29).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간단히 말해서 그녀가 음란하게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얼마나 온화하게, 부드럽게 스 사실을 말하시는가?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그리고 다시 말씀하신다. 네 말이 참되도다. 그녀가 사실을 은폐하려고 의도한 말을 예수께서는 다정스럽게 잘못에 대한 고백으로 해석해 주셨다.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주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사람들의 좋은 성품을 자극하여 선한 열매를 맺을 소망을 바라보게 될 것이지만. 좋지 않게 대해 버린다면 그들의 반대 감정만 부채질하게 될 것이다.

(3) 예배할 장소(19-24). 이제 다시 화제는 예배 장소로 넘어 간다.

1) 예배 장소에 관한 양심 문제(19-20).

그녀가 이 문제로 넘어가게 된 동기 :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그녀에 대하여 얘기했던 사실의 진실됨을 부정하지 않는다. 쓰라린 상처를 건드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듯이 격분하지도 않았으며 자기의 실책을, 오점을 듣는 것을 감내할 수 있었다(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서 더 나아간다. 첫째, 이 낯선 나그네를 "주여"라고 부르며 그에게 존경스럽게 얘기한다. 이것은 그녀를 질책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온유하셨던 결과이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전혀 거친 말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으며 그녀 역시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인식한다. 셋째, 그녀는 그로부터 무엇인가 좀더 배우기를 원하고 있다.

그녀가 제기한 공공 예배의 장소 문제 :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바르게 예배하기를 열망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만나자 곧 그의 가르침을 구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구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일치되는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경배받으셔야 할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었다. (심지어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일지라도, 예배할 신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야수 같은 자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어디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 상호 간의 차이점이 있었다.

어떻게 이 여인이 그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20). 과거 산발랏은 그 장소에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건축했었다. 성전이 어디에 있건 그 곳은 거룩한 곳이다. 산발랏이 사마리아인들을 위해 세웠던 장소는 그림심산이었다. 그 산 위에서 축복이 베풀어져 나갔었던 것이다. 그것은 관습을 옹호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기네들 사마리아인들이 그들 나름의 유물과 전통과 계승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앙인들도 모세 오경에 근거해서 자신들을 관장해 왔었다. 모세 오경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실 처소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지만 그 명칭이 나타난 곳은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자유롭게 성전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2)이러한 자각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21절 이하). 그리스도께서는 예배장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중시하시지 않는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21). "네가 여태껏 대단히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받아 왔던 것은 매우 사소한 문제이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때가 되면 예배드리는 장소는 두 장소 중 어느 곳에서 어느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드리는 자들은 전혀 장소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나 저기도 아니고 그 두 곳 모두에서, 또한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장소가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하여 강조를 하신다. 예수께서 그렇게 예배의 장소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셨다고 해서 예배라는 문제 자체를 소홀히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신다(22). 사마리아인들은 예배의 대상의 문제에 있어서 그릇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곳에서 예배해도 좋으나 너희는 너희가 알고 있지 못한 것을 예배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분명 참된 신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였다(4:2; 왕하 17:32).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무지에 빠져들어갔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만드신 우주의 하나님으로, 우주의 주인으로 섬김을 받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 민족의 민족심과 같이 지방신으로, 그 땅의 신으로 하나님께 경배하였던 것이다. 무지는 결코 올바른 헌신을 낳을 수 없으며 오히려 헌신을 무의미하게 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확실히 옳았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해야 할 대상의 어떠하심을 안다." 즉 예배의 문제에 있어 경에 근거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은 사람들은 안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이는 이들이 자신이 예배해야 할 대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소가 순결하고 온전치 못하더라도 예배는 진실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는예배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기꺼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키고자 하신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는 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배하는 대상을 알고 있었으며 어떤 근거에서 자신들이 예배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영원한 구원의 주권자는 유대인에게서 나오시며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 주시기 위해 보냄을 받으셨던 것이다. 영원한 구원의 방도가 유대인들에게 제공되어 있었다. 구원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속해 있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장소는 별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시면서 무엇이 보다 필수적이며 본질적인 것인가를 보이신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으로 그리고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23,2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의 상태에 강조를 두고 계신다. 그 말은 예배의 대상뿐 아니라 예배하는 태도도 정당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초래할 대변혁 :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23). 완성의 날이 오고 있으며 지금 그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축복받은 자들의 변화 :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될 것이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만유의 아버지께 예배하러 신자로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이다. 이제 예배의 본질에 변화가 올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제도의 의식법을 준수함으로써가 아니라 신령한 제도 안에서, 예배자의 변화된 심정과 성품으로 예배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이는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며, 그렇게 할 것이다. 이 말은 예배하는 자들의 특성과(23) 의무를(24)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으로 즉 성령으로(3:3) 예배해야만 한다.

우리는 예배할 때도 하나님의 성령의 힘과 도움을 의지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게 예배하되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만 집중시키고 불길같이 타오르는 사랑으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합하여 예배해야 한다. 진정으로 즉 진리안에서라는 말은 곧 겉과 속이 똑같이, 표리가 없이 신실하게라는 말이다. 우리는 형식 이상으로 내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예배받으시며 또한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만이 참 예배자들인 것이다. 복음은 예배하는 자들만이 참 예배자들인 것이다. 복음은 예배의 신령한 방법, 곧 신령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다면 자기들이 고백하는 복음의 빛과 법도에 따라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이와 같이 예배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신령하게 예배드리는 문은 매우 좁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예배를 강력히 원하시며 이와 같은 예배는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예배와 이와 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대단히 흡족하게, 은혜로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은 믿는 자들을 그와 같이 만드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또 이와 같이 예배받으셔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려 오셨다(1:1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관하여 바로 이 사실을 나타내셨으며 이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타내시고 계시다.

가장 미천한 자라도 하나님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불멸하시며 이성적인 존재자이시며, 일시적이 아니요, 물질적이 아니며 보이지 않으시며 늙지도 않으신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의 어떤 분도 아니시다. 이러한 영적인 신적 본질은 영적인 신적 예배에 대한 가장 좋은 이유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되 영이신 하나님을 신령으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배의 목적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4) 메시야(25-26). 이 여인과의 마지막 대화의 주제는 메시아에 관한 내용이다.

1)여인의 신앙 : 그 신앙으로 그녀는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5). 이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반대할 것이 전혀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자기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사람의 얘기가 기대해 왔던 메시아와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기대했던 메시야로부터 사실을 듣고자 했으며 적절한 시기까지 자신의 믿음을 보류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은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들 수중에 들어온 가치 있는 것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기지 않는 것이다.

그 여인은 누구를 대망하고 있었는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25).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공히 메시아와 그의 왕국을 대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 메시야가 장차 임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메시야는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시다. 복음서 기자는 히브리어인 메시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동리 한 의미를 지닌 헬라어로 번역해 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녀는 그 메시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충분히 명확하게 말해 주실 것이요, 숨김 없이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녀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첫째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데도 한도가 있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도 역시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둘째를 이러한 전환을 이루시기에 메시아께서는 충족하시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며 우리가 무지 속에서 다투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메시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시리이다."

2)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시는 우리 주 예수의 후의 :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26).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이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에게와 소경에게(9:37) 하신 것을 제와하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렇게 분명하게 자신을 나타내신 적이 결코 없었다.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가난하고 멸시받은 사람들에게 큰 영예를 안겨주시고자 하셨다. 이 여인은 일반적인 확신의 수단인 그리스도의 기적을 볼 기회도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빛을 눈으로 대하지 않게 한 지역에서도 은혜의 빛을 마음속에 비추실 수 있으신 분이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러한 계시를 받아들이기에 훨씬 잘 예비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사귀기를 원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네게 말하는 내가 곧 그로라.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그가 누구신지도 모르고 있는 그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그녀 가까이에 계셨는지 보게 된다(28:16). 예수께서 지금 자신들과 말씀을 나누고 계신 그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안 계시다고 슬퍼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마태복음 2장 예수님 말씀] 헤롯의 음모와 요셉의 애굽 도피(마 2:13-23)

 

[마태복음 2장 예수님 말씀] 헤롯의 음모와 요셉의 애굽 도피(마 2:13-23)

마태복음 2장 예수님 말씀은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와 이것을 하나님이 요셉에게 알려서 요셉이 애굽으로 도피한 내용을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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