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서의 사생애가 끝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요단강에서 받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공생애가 시작합니다. 공생애가 시작하면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들어가서 40일 동안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첫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뱀의 미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있으면서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기 때문에 사탄의 머리를 짓밟아 놓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40일을 광야에서 시험받는 예수(막 1:9-15)
9절 카이 에게네토 엔 에케이나이스 타이스 헤메라이스 엘덴 이에수스 아포 나자레트 테스 갈릴라이아스 카이 에밥티스데 휘포 이오안누 에이스 톤 이오르다넨
=====1:9
그때에 - 이 말에 대한 문자대로의 번역은 '그날들에'이다. 이는 분명한 시기 곧 앞에서 계속 언급되어왔던 세례 요한의 회개에의 세례 사역이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고 있던 그 기간을 지칭한다. 더욱이 이 표현은 역사상에 위대한 한 사건이 나타날 것이라는 데 주의를 끌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유대 백성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례 요한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는 배경적 설명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배경적인 내용보다 더 중요하고 심대한 사건이나 인물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세례 요한이 예고하고 그 권위를 더 높이고 있었던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실로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30여 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사신 것을 청산하시고 이제 곧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는 시기를 맞고 계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관해 익히 알고 계셨지만 그 즉시 오시지 않고 그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실 바로 '그때'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예고해 주는 장중한 포고령이요 대서사시의 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갈릴리 나사렛 - 이곳은 예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신 후 다시 귀국하여 정착하고 유아기부터 청년기를 거치면서 계속 살아오셨던 예수의 실제적인 고향으로서(마 2:23;눅 4:16 주석 참조) 예루살렘 북방 약 120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 488m의 구릉지의 분지이다. 이곳은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과 더불어 기독교의 고향으로 여겨지는 매우 뜻깊은 곳이다(마 2:23 ; 3:13 주석 참조). 한편 마가는 '나사렛'이란 지명을 첨가시킴으로써 이방인 독자들에게 그곳의 지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에 비해 누가는 이 지명을 아예 생략했으며 마태는 '갈리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마 3:13)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수만리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의 신자들 곧 예수에 대해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바로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역사성을 입증해 주기 위한 마가의 노력의 한 표현이다.
요단강에서 - 헬라어 원문에 제시된 본문의 전치사(에이스)는 '안에서', '안으로'(in, into)란 뜻으로 예수의 수세(受洗)가 요단강 안에서 베풀어졌음을 암시한다. 특히 이 표현은 다음에 언급될 '세례'라는 어의(語義)와 10절의 '물에서 올라오다'는 말과 조화를 이뤄 예수의 수세 방법이 침례(侵禮)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세 방법의 절대적 원칙을 고수하는 일은 또 하나의 독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세례를 받으시고(에밥티스데) - 이 단어의 원형 '세례를 주다'(밥티조)라는 말은 '물에 잠그다'(70인 역-왕하 5:14; 시 68:23), '물로 씻는다'(7:4;눅 11:38;딛 3:5)등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는 '세례'혹은 '침례'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 세례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는 '물에 잠그다'는 침례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고, 구약 율법의 제사 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속죄를 위한 뿌림(레 14:7;16:14,15) 등의 관점에서(민 8:7) 정결례로 볼 때는 '물로 씻는다'는 세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처럼 세례와 침례의 효력과 그 중요성은 거의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세례 혹은 침례라는 그 외적 형식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식이 의도하고 있는 바 구원의 확신과 그 이후 변화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 중심을 떠난 의식만을 제기한다는 것은 사변적인 논쟁에 빠질 우려가 있다.
10절 카이 유데오스 아나바이논 아포 투 휘다토스 에이덴 스키조메누스 투스 우라누스 카이 토 프뉴마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타바이논 에프 아우톤
=====1:10
곧(유데오스) - '곧바로', '당장에'라는 긴급성을 강조한 부사로서 이 부사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지니는 한 특징인데(약 41회). 이 단어는 마가의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박진감을 더해 준다.
물에서 올라오실새 - '...에서'를 뜻하는 원어 '아포'는 '완전히 잠긴 물속에서부터'라는 의미이기보다 오히려 신체 어느 부분에 적용되는 단지 '물 안에서'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말은 예수의 세례의 형식(세례, 침례)에 관심을 둔 것이기보다 세례 예식이 모두 종결되고 예수께서 육지로 발을 내디디시는 순간을 강조하는 말로 볼 수 있다.
하늘이 갈라짐 - 마가의 보고에 따르면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장면을 본 사람이 오직 예수뿐이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 이는 마가의 초점이 예수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지 요한에 대해 말하려 함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하늘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 '하늘이 갈라지다'(스키조, '찢다'는 뜻)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기록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매우 차분한 용어인 '아노이고'('열다')를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하늘이 갈라진다는 것은 인류가 대 우주적 전기(轉期)를 맞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이제 인류는 절망의 하늘을 '찢고' 새 소망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 64:1의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성령이 비둘기같이...내려오심을 - 초대 교회 이단자들은 영원한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에게 인격적으로 잠시 거하기 위해 내려오신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본 사건을 그 논거로 채택하였다(요일 4:1-6, 주제 강해 '영지 주의'<Gnosticism> 참조). 후에도 성서 비평가들은 예수의 영원한 신성(神性)과 더불어 예수의 역사적인 성육신(Incanation)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박하기 위하여 이들의 견해를 인용하곤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세례 시에 그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성령께서 떠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 영원한 그리스도에게 본문에서 특별히 가시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은 대선지자로서의 권위와 직무의 전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확증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는 성령께서 예수에게 임하신 것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복종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눅 3:21). 한편 본문에서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셨다고 했는데(요 1:32) 이는 성령의 순결하고도 온유한 통치와 특성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사실은 공생애 시작에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 기름 부음을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 기름 부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친히 이 기름 부음에 관한 사실을 주장하셨기 때문이다(눅 4:18). 특별히 본문의 이 같은 장면은 구약 시 45:7;사 61:1 등에서 이미 예언된 바 있는 것으로 예수께 대한 성령의 영원한 은사 부여를 보여 주고 있다.
보시더니 -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신 후 곧 기도하셨는 데(눅 3:21) 바로 그 순간 하늘의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게 되신 것이다. 한편 이때 이 기이한 현상은 자연계에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supernatural appearance)으로서 그곳에 모인 우리들이 함께 목격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1절 카이 포네 에게네토 에크 톤 우라논 쉬 에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 이는 분명 말라기 선지자 이후 단절되었던 계시의 맥을 잇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뜻한다. 랍비들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목소리의 울림', 곧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는 구별되는 '소리의 딸'이라는 하급 계시가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도 계속 전해져 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본문의 '하늘로서의 소리'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마 3:17 주석 참조). 한편 하늘에서 들려진 소리는 영원한 왕이신 메시아의 즉위 개념(시 2:6)과 고난 받는 주의 종의 개념(사 42:1)이 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마 3:17 주석 참조).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늘 소리가 강조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가장 사랑받는 독생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실로 마가는 그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1:1).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계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당신의 아들 됨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신다. 한편 레인(Lane, William L.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p. 58)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언하신 말씀의 첫 구절("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은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영원하고 필연적인 관계성을 보여 주며, 둘째 구절("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은 부정과거 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역사상의 어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과거에 선택되었음을 보여 준다"라고 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나의 그 사랑하는 그 아들'이라고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정관사 '그'가 명사와 형용사에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그 어의(語義)를 점차로 높이며 강조하는 수사법이 쓰이고 있다. 이렇듯 성부 하나님께서부터 성자 하나님에게 명명된 이 사랑은 일시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완전 무궁한 사랑, 영원 지고 한 사랑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아가페토스는 사랑의 최고 형식을 지시하는 말로서(Lenski)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악취 나는 이 세상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시고자 도성 인신(道成人身) 하신 것이다(요 1:1,14).
너를 기뻐하노라 - 이 말은 앞에서 언급된 '사랑하는'이란 말의 이유도 아니며 귀결이나 결론적인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뻐하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메사'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역사적인 과거의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역 성경의 '내가 그를 아주 기뻐하노라(KJV, in whom I am well pleased)란 번역이나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러한 의미에서 잘못되었다. 물론 이러한 문법구조가 영원한 현재에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과거의 시상은 요단 강변에서 성육신하신 아들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신 것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선포의 증거로서 예수 위에 아버지의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이다.
12절 카이 유뒤스 토 프뉴마 아우톤 에크발레이 에이스 텐 에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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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몰아내신지라 - 공관 복음의 세 기자들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나갔음에 대하여 모두 기록하고 있다(마 4:1;눅 4:1). 여기서 '광야'란 성경 문학적으로 타인과 완전히 결별된 곳, 또는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생각된다(사 13:21;마 12:43;계 18:2). 그런데 당시 예수께서 실제로 금식하셨던 광야가 과연 어디였던 가에 대해서 의견이 구구하다. 즉 혹자(Alford)는 모세와 엘리야의 금식 장소였던 호렙산으로, 또는 외경 '히브리인의 복음'에서는 다볼산으로, 그리고 또 다른 이는(De Wette) 여리고 근처의 한 곳으로 보기도 한다. 그중에서 이곳이 세례 받으신 곳과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제일 마지막 견해를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실을 확증하기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을 '콰란타니아'(Quarantania), 곧 예수의 40일 금식 장소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세례와 시험 사건 사이에 깊은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특징적인 표현인 '유뒤스'('즉시')를 사용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예수의 겸손하고도 강한 인류애의 마음을, 전혀 죄가 없으신 그분이 죄인 된 자로서의 세례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신 것과 사단의 시험을 한시적으로나마 인정하신 이 두 가지 연속된 사건으로써 표출시키고 있다. 한편 본서의 강한 이미지에 비해 마태와 누가는 완곡한 동사를 사용하였다. 즉 그들은 이 시험 사건을 보고하면서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서'(was led by the Spirit '성령에 인도되어서', NIV) 광야로 나아갔음을 묘사한 것에 비해 마가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에크발레이'('내쫓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됨)를 사용해서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의 이 기록은 전자의 두 기록보다 더욱 역동적이며 생생한 현장감(現場感)을 나타내 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예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협박과 강압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역동적인 이끄심에 대해 예수께서 적극적인 의지로써 호응하신 것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예수의 뜻과 성령의 뜻이 완전히 합치되어 있었으므로 장차 40일 금식 동안 사단과 더불어 싸울 때의 승리를 예상할 수 있게 해 준다(마 4:1-11;눅 4:1-13)
13절 카이 엔 에케이 엔 테 에레모 헤메라스 텟사라콘타 페이라조메노스 휘포 투 사타나 카이 엔 메타 톤 데리온 카이 호이 앙겔로이 디에코눈 아우토
=====1:13
사십 일을 계셔서 - 마가는 단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 계신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나 마태는 이 기간 동안 금식하셨음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마 4:2). 그리고 마가에 있어서는 시험의 종류도 언급되지 않고 사단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기사도 없다. 아마 그 이유는 예수의 사역 전체가 사단과의 대립으로 일관된 것이지, 40일간의 광야 생활에서 있었던 단 몇 가지 시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마가가 강조하기 원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마가의 복음서 전체에서 마가는 이 계속적인 싸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이 '40일'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즉 이 40일은 구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그곳에서 유한 기일이며(출 34:28), 엘리야가 호렙산을 찾아 광야를 유랑한 기간이다(왕상 19:8). 또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의 시일도 40일이었다(행 1:3). 위에서 언급한 모세나 엘리야의 경우 40일의 기간은 그들의 사명 수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광야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40일' 기간의 전후(前後)를 한결같이 광야의 연단과 위험 속에 살아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또 시험받으셨던 이 '40일간'의 의미는 그의 공생애 시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 사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일종의 연단의 기간이자 공적 사역의 준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시험을 받으시며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는 '시도하다', '시험하다', '증거를 진술하다'라는 뜻으로서 인간을 실족케 하는 유혹(temptation)과 인간을 더욱 성숙게 하는 하나님의 연단(test)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 제시된 이 '시험'은 그 양자의 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실로 이 시험은 예수의 메시아성을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집요한 유혹인 동시에, 예수께서 시험과 고난 받는 온 인류의 모범이시자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실 대제사장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이시며 또한 그 같은 자격을 공적으로 선언하시기 위한 일종의 하나님의 뜻에 따른 연단이었던 것이다(히 2:18;4:15). 이 시험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마 4:1-11;눅 4:1-13을 참조하라.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 이는 단적으로 영전(靈戰)을 치르고 계신 예수께서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신 채 철저히 홀로 되셔서 고독에 찬 역경을 감래하고 계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당시 유대 광야 지역에는 뱀, 이리, 표범, 여우, 멧돼지, 하이에나 등이 이따금씩 출몰했다고 한다. 진정 예수는 내적이고 외적인 공포와 고독 그리고 사나운 야생 동물들을 대하심으로 더욱 큰 시험을 당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받으신 장소는 첫 사람 아담이 시험받은 낙원(창 3장)과 정반대가 되는 위험 천만스러운 현장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함으로 징벌과 사망을 받았던 바로 이 광야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승리를 거두셨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시기 위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다.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 모든 천사들의 주된 임무는 예수와 구원 얻을 모든 자들을 섬기는 데 있다(히 1:14). 이 천사들이 예수께 수종 든 때에 관해서는 마 4:11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께서 마귀를 물리치신 후였다. 성경상에서는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종 들었는지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하늘로부터 전해진 영적 위로를 전달하고 또 40일 동안 금식하시느라고 주리신 예수께 육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단의 시험을 물리쳐 이기신 그리스도께서는 유혹의 떡(마 4:3) 대신에 천사가 공급하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셨고 그릇된 공명심(마 4:5, 6) 대신에 영광스러운 영적 존재들의 보필을 받으셨으며 또 헛된 영광(마 4:8,9) 대신에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며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게 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사단의 왕국을 파멸시키는 실제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으셨다. 마가복음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여기서 일단락된다.
14절 메타 데 토 파라도데나이 톤 이오안넨 엘덴 호 이에수스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케륏손 토 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1:14
요한이 잡힌 후 - '잡힌'에 해당하는 '파라도데나이'는 제1 과거 수동형으로 '넘겨졌다', '양도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세례 요한이 그를 시기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헤롯의 군병들에 의해 무참히 체포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만일 마가가 어떤 역사적 순서보다 신학적인 면에 좀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면(사실 마가는 6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요한의 죽음을 자세히 언급한다). 여기서의 '잡힌'것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가는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에 든든한 고리를 엮어두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두 사람은 모두 불의한 자의 손에 의해 죽음으로써 그 최후를 맞는다. 따라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막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십자가의 짙은 피 내음이 풍겨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의로운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분명히 당시의 불의(不義)한 시대상을 반영해 준다. 예수는 나중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가 바로 그 라고 평하셨다(마 11:11). 그러나 요한은 메시아의 선구자적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지 그의 위대성을 인정받고 들림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는 메시아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마친 후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공히 예수의 공생야 시작은 세례 요한의 투옥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마 4:12;눅 3:19, 20). 즉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요한의 사역이 종결된 후 당신의 공적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마가는 선구자 요한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임무를 완수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 생애에 있어서 공생애 초기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실 본서의 기자 마가의 시각은 그리스도의 전체적 생애를 설명적으로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날까지 인간들을 위해 어떻게 사역해 오셨는가를 부각시켜 종으로서의 예수의 진면목을 밝히려는데 집중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공생애 초기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을 생략하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저작 의도에 따른 결과라 할 것이다(본서 서론 참조). 한편 광야 시험과 요한의 잡힌 사건 중간에 발생한 내용에 대해서는 요 1:35-4:42를 참조하라.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 그리스도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오신 때는 세례 요한이 잡힌 사건과 관련이 있다(요 4:1-3, 43 주석 참조).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사실과,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사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임을 알게 되셨을 때,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셨다(특히 가버나움을 중심함, 마 4:13). 예수께서는 자신이 유대지방에서 그처럼 크게 알려진다면 그것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강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급기야는 그들의 증오심으로 말미암아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적절(適切)한 죽음의 순간이 오는 즉시 자기 목숨을 버리실 준비를 갖추고 계셨지만(요 10:11,15,18;13:1) 아직 그때(호 카이로스)는 오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갈릴리 지방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우리(cage) 안으로 인도해 들여야 할 잃은 양들이 많이 있었다(요 10:16).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내내 전파하신 메시지의 주 내용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다른 사본에는 이를 '천국 복음'이라 일컫기도 한다(마 4:23). 여기서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손'은 현재 능동태 분사형을 취하고 있어 그 행위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 표현을 통해 하나님은 복음의 원천(주어 소유격)이시며 더불어 복음의 대상(목적 소유격)이심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또 이 복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로 복음은 '좋은 소식' 곧 인류가 들어볼 최고의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곧 그리스도로 인한 죄사함과 구원 및 영원한 복락을 그 주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5:17).
15절 카이 레곤 호티 페플레로타이 호 카이로스 카이 엥기켄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메타노에이테 카이 피스튜에테 엔 토 유양겔리오
=====1:15
때가 찼고 -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해준다(갈 4:4;엘 1:9). 다시 말해 본문의 '때'(카이로스)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호기(好期, 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이다(R.C. Trench). 예수께서는 드디어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슈바이처(Schweizer)는 말하기를 '그는 역사상 유래 없는 특정한 구원의 때를 성취하신 것이다'라고 묘사하였다. 특히 본문의 이 표현은 사 9:1,2의 말씀이 성취될 시간이 이르렀음을 알리는 엄숙한 포고령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단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와 초월적인 주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과 외경에는 직접 쓰이고 있지 않으나 그 사상은 풍부하게 소개되고 있다(출 15:18 ;시 29:10 ;사 43:15). 이런 사상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하나님의 왕권은 현재적 실재이면서(하나님은 현재 당신의 주권으로 통치하심) 더불어 종말적 완성임을 (하나님은 최후의 날 당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것이다)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그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 관계가 상존함을 보게 된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초두에 그 나라가 '가까웠다'(15절)고 선포한 데 대해 바알세불 논쟁 시에는 그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마 12:28;눅 11:20) 말씀하신 바 있다. 즉 예수의 활동으로 하나님의 지배가 이 땅에 임하신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의 또 다른 가르침에서는 그 나라가 여전히 미래적인 것임을 보게 된다(마 8:11;20:21). 실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긴장(tension) 관계의 해소는 어느 한쪽을 거부함으로써 이뤄지지는 않는다. 사실 그에 대한 양극단의 논리인 실현된 종말론은 그 나라의 미래성을, 철저 종말론은 그 나라의 현재성을 각각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함축한 개념이다( Bruce Metzger, The New Testament, p. 148 ). 어쨌든 본절에서는 그 나라의 도래가 대단히 강조되어 있다. 즉 그 나라는 공간적으로 (예수 안에서), 또 시간적으로(그 나라는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가까이 왔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가까워진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Lane). 한편 마태복음에는 일반적으로 '천국'으로 되어 있으나(마 3:2;4:17;5:3, 10, 19, 20 등) 마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한 사실에(4:11, 26, 30;9:1, 47등)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의미상으로는 양자가 근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미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음의 네 가지 개념들에 주목할 필여가 있다. (1) 하나님의 왕권, 통치권 혹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주권이라는 개념이다(마 6:10;눅 17:21). (2) 완전한 구원, 곧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비롯되는 모든 영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의 개념이다(눅 18:30). (3) 교회, 곧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로 사용될 때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거의 동일한 것이다(마 16:18, 19). (4) 구속받은 우주, 곧 모든 영광으로 가득 찬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이다. 이것은 아직 미래의 일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종적인 사역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의미한다(마 25:34).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이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전파한 메시지의 내용과 동일하다(4절;마 3:2).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의 복음은 동일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길 예비자였다. 여기서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자들의 올바른 삶의 자세이자 구원의 핵심적 요소이다. 특히 이 중에서 '회개'는 성부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요,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성자 예수와의 긴밀한 신뢰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이 양자 중 어느 하나의 결핍은 온전한 신앙 인격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한편 우리말의 '회개하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있지만, 헬라어 '메타노에이테'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과거에 저지른 모든 악한 일에 대하여는 슬퍼하는 한편, 앞을 바라볼 것도 의미하고 있다. 즉 그것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 '마음과 생활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완전한 생활로의 전환'까지를 모두 내포한 포괄적 의미이다.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덧붙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회개의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면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즉 '믿으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메테'는 앞에 나온 '메타노에이테'와 동시적으로 작용을 하며 함께 역사한다(Lenski). 즉 진정한 회개에는 신앙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본문에 나타난 두 동사는 미완료 동사로서 계속적인 현재를 의미하며, 전자가 계속될 때 후자로 계속됨을 나타낸다.
[헬라어 성경 강해 마태복음] 예수님 족보 솔로몬-요셉까지(마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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