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요 1:6-13)
6절 에게네토 안드로포스 아페스탈메노스 파라 데우 오노마 아우토 이오안네스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 1-4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여기서 잠시 1세기 초반 팔레스틴에 영적인 쇄신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해 터를 닦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세 가지 단어를 실마리로 하여 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1) 전치사 '파라'('... 에게서')는 1절의 전치사 '프로스'가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 (2) '보내심을 받은'(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70인 역(LXX)에서는 메시지나 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에 쓰였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썼던 용어이다(사 6:8). 이러한 사실은 이 인물이 남성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음을 나타낸다(7, 8절). 그리고 '아포스텔로'의 완료 수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이 인물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대로 사역했던 사람 임을 보여준다. (3) '났으니'(에게네토)라는 부정 과거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과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름은 요한이라 - 앞 문자에서 한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관 복음에서 '세례 요한'(마 3:1;막 6:14, 25; 눅 7:20)이라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그저 '요한'이라고만 명명한다(25, 19, 20, 26, 28절). 이는 공관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작이므로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7절 후토스 엘덴 에이스 마르튀리안 히나 마르튀레세 페리 투 포토스 히나 판테스 피스튜소신 디 아우투
=====1:7
저가 증거 하려 왔으니 - 본절에서는 '증거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역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증거'(마르튀리아)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다'라는 뜻으로서, 요한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처럼 획기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세례 요한 자신이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 비유한 데서도 드러났다.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 증거자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빛'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사람 -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대상들을 명시한 '모든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 군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벨이 비록 죽임을 당하였어도 오히려 믿음으로 증언한 말씀이 남아서(히 11:4)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그의 증거는 시공의 범위를 점점 더 확산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까지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 '자기를 인하여'의 헬라어 '디 아우투'라는 표현은 3절의 '그로 말미암아'(디 아우투)와 같은 단어이나 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 시의 중보적 사역을 나타낸다면,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예비하기 위한 중간 매개로서의 요한의 사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함에 있었다. 비록 방식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표했던 적이 있었을지라도(마 11:2, 3). 요한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했던 사람이다(15, 26, 27, 29-34절;3:28-30).
8절 우크 엔 에케이노스 토 포스 알르 히나 마르튀레세 페리 투 포토스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증거하러 온 자라 - 6, 7절에 나타난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본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으로서(2절 주석 참조)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고 있다. 저자 요한이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명시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도와 교육을 집중했던 에베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행 19:2, 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9절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 호 포티제이 판타 안드로폰 에르코메논 에이스 톤 코스몬
=====1:9
참빛 - 6-8절에 걸친 세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 본절에서부터 다시 이어지고 있다. '참빛'(the true light, NIV)으로 번역된 원문은 '그는 참빛이시다'(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이며, '말씀이 곧 참빛이었다'(공동번역)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참'(알레디논)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써 '거짓에 반대되는 참'(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Calvin)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true, NIV)이란 용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엡 5:8;살전 5:5)의 참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참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계 21:9-27).
세상에 와서 -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는 원래 질서와 연관된 의미를 지닌 용어로써, '각 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 등이 질서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었다. 그 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코스모이)이 질서와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각의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롬 1:8) (3) 타락한 '인류'(1:29)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부패된 곳, 다시 말해서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각 사람(판타 안드로폰)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 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 NIV)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자매들임을 깨닫게 된다.
10절 엔 토 코스모 엔 카이 호 코스모스 디 아우투 에게네토 카이 호 코스모스 아우톤 우크 에그노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엔 토 코스코 엔) - 1절에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 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 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 연관 관계를 살펴보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 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 들린 자(마 12:24;막 3:22)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아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에그노)는 '알다'(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 감각적인 지각(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 1:25에서는 남녀 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1;민 31:17)를 살림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5:26;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 하여 계속 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 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11절 에이스 타 이디아 엘덴 카이 호이 이디오이 아우톤 우 파렐라본
=====1:11
자기 땅에 - 헬라어 '타 이디아'는 '자기 자신의'(이디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단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 -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창 18:19;신 32:9)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단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출 19:6).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랄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1)로 넘어간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계 20:6).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본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 세상의 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8:44).
12절 호소이 데 엘라본 아우톤 에도켄 아우토이스 엑수시안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 토이스 피스튜우신 에이스 토 오노마 아우투
=====1:12
영접하는 자 -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권세를 주셨으니 -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 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 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는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는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3:3-9;벧전 1:3, 23).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 (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해 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17:2;마 28:18;막 2:10;3:15;눅 4:36)을 나타낸다. 성도는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고후 10:8;계 22:14). 따라서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한다(고전 9:12, 18).
13절 호이 우크 엑스 하이마톤 우데 에크 델레마토스 사르코스 우데 에크 델레마토스 안드로스 알르 에크 데우 에겐네데산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 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를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 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 혈연관계를 의미한다. 혈연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8:39-44;마 3:7-9). 둘째로, 육정(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 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갈 5:16).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 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 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고전 1:20, 21). 따라서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결국 저자는 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 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15:14),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10:10-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가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세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치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 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비결에 대해서는 3:1-15절 주석을 참조하라.
[헬라어 성경 요한복음 강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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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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