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구원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거듭났다는 것은 시작입니다. 이제는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으로 거듭났습니다.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열심히 복음 말씀을 듣고 세상에서 거룩하게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도 거룩하게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벧전 1:13-19)
13절 디오 아나조사메노이 타스 오스퓌아스 테스 디아노이아스 휘몬 네폰테스 텔레이오스 엘피사테 에피 텐 페로메넨 휘민 카린 엔 아포칼륍세이 이에수 크리스투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동이고'의 헬라어 '아나조사메노이는 '급한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 12:11)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게으른 삶을 반성하고 목표로 매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Lenski). 예수께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종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눅 12:35)를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동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는 가운데 긴장된 자세로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Michaels).
근신하여...온전히 바랄지어다(네폰테스 텔레이오스 엘피사테)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헬라어 문법에서 부사가 '오스'로 끝나면 앞에 있는 낱말을 수식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텔레이오스'가 앞에 있는 '네폰테스'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온전히 근신하여'로 해석한다(Michaels, Bigg). 이 경우 '온전히 근신하여'는 '인내'를 강조한다. (2) 혹자는 일반적인 헬라어 문법으로 따질 때 동사 앞에 있는 부사가 동사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번역하며 '소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Selwyn, Lenski).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가져다 줄 은혜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마음을 가다듬고 언어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며 인내 가운데 살아야 한다(Blum, Stibbs).
14절 호스 테크나 휘파코에스 메 쉬스케마티조메노이 타이스 프로테론 엔 테 아그노이아 휘몬 에피뒤미아이스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테크나 휘파코에스'는 전형적인 셈어적 표현이다(막 2:19; 눅 10:6). 특별히 셈족 언어에서 '자녀'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상속자'라는 뜻으로 자녀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지닌다. (2) '부모의 인격이나 성품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일 경우 누구의 자녀이냐에 따라 자녀의 인격이 결정된다(Selwyn). 이러한 언어적 배경 속에서 베드로는 수신자들을 향해 '불순종의 자녀'(엡 2:2)가 아니라 '순종의 자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서(롬 1:5; 16:26) 복음을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마음을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그 성품을 배워가기 때문이다(Michaels).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 '알지 못할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아그노이아에서 '아그노이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ranfield, Selwyn). 왜냐하면 헬라어 단어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무지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기 때문이다(행 17:30; 엡 4:18). (2) 혹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igg).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아그노이아'는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행 3:14-17).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즉, 이는 이방인이었든 유대인이었든 간에 진정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나타낸다(Stibbs). 이러한 자는 사욕 즉 자연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Michaels, Stibbs) 충동대로 방종한 삶을 산다. 그러나 영적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 즉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버려야만 한다.
15절 알라 카타 톤 칼레산타 휘마스 하기온 카이 아우토이 하기오이 엔 파세 아나스트로페 게네데테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거룩한 자'는 70인 역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칭호로서 '거룩한 자' 혹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나타난다(LXX 시 70:22; 77:41; 88:19; 사 1:4; 5:16; 12:6;17:7; 29:23; 30:12,15; 31:1; 41:20; 45:11; 55:5). 이것은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시사한다(Blum). 이러한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과거에 처했던 어둠에서 광명한 빛으로 부르셨으며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2:9;5:10). '되라'의 헬라어 '게네데테'는 '기노마이''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명령형이다. 그러나 고전 헬라어에서 '기노마이'의 수동태 명령형 '되다'(become)의 의미보다 '이다'(b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의 의미보다 '거룩한 존재이니 거룩함을 나타내라'라는 의미이다(2: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한편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트로페'는 본서에서 '선한 행실'(2:12), '선한 양심'(3:16), '정결한 행위'(3:2)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거룩'이 하나님께로의 분리를 의미하나 일상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것으로서 세상에서 윤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Blum, Michaels).
16절 디오티 게르랍타이 하기오이 에세스데 호티 에고 하기오스 에이미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여기서 '기록하였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라프타이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사용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베드로가 인용한 본문은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으로(레 11:44; 19:2; 20:2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아가도록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이 말씀을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복음 안에 산다 할지라도 율법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윤리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Lenski, Stibbs).
17절 카이 에이 파테라 에피칼레이스데 톤 아프로소폴레프토스 크리논타 카타 토 헤카스투 에르곤 엔 포보 톤 테스 파로이키아스 휘몬 크로논 아나스트라페테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 '외모로 보시지 않고'의 헬라어 '아프로소폴렘프토스'는 '얼굴을 보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사파님'에서 유래한 것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구약시대에서는 생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다(마 6:9; 눅 11:2).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보살피시는 분'과(마 6:32) '재판장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눅 18:1-7)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여 위로와 권면을 하고 있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나그네로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것이다(Stibbs).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할 것처럼 안일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는 악에서 떠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18절 에이도테스 호티 우 프다르토이스 아르귀리오 에 크뤼시오 엘뤼트로데테 에크 테스 마타이아스 휘몬 아나스트로페스 파트로파라도투
=====1:18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신앙에 대해 언급할 때나(Hort) 표준이 되는 가르침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Kelly) 관용구이다. '에이도테스'가 사용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 사도의 교훈을 심화시켜 설명할 때(롬 6:9; 고후 5:6). (2) 앞에서 명령한 구절에 대한 설명이나 이유를 보충하고자 할 때이다(고전 15:58; 엡 6:8,9). 이 두 가지 중 본절의 '에이도테스'는 후자의 경우이다. 왜냐하면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는 권면에 이어 계속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가기 때문이다(Michaels, Blum).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 '망령된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마타이아스 아나스트로페스'는 유대인의 생활양식을 가리키기보다는 이방인의 생활 양식을 의미한다(Blum). 더욱이 '망령된'의 헬라어 '마타이아스'는 이방 종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된다(렘 2:5; 8:19; 행 14:15; 엡 4:17). 한편 '구속된 것'의 헬라어 '엘뤼트로데테'는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Blum, Selwyn). (1) 돈을 지불하고 사다. (2) 속박에서 해방시키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구속받기 위해 치른 대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과 은'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구속 사역이 완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막 10:45; Lenski). 이러한 대가의 귀함과 완전함에 대한 베드로의 진술은 '값 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52:3)과 상치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비록 문자적인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하여 (1)과 (2)의 의미를 모두 강조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태도로 (2)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Michaels).
19절 알라 티미오 하이마티 호스 암누 아모무 카이 아스필루 크리스투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어린양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암누'는 세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킬 때 이미 사용한 표현이다(요 1:29,36). 본문의 유래에 대해 혹자는 사 53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사 52장에서는 구속의 대가를 예수의 보혈과 비교하며 사 53장에서 예수와 어린양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의 보혈로 비유되는 반면에 사 53장에는 어린양의 피가 없으며 심지어 침묵하는 어린양으로만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 53장은 예수의 고난을 나타내나 구속의 보혈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차라리 본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출 12장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양과 대비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은 유월절 어린양이 지닌 구원과 해방에 대비된 예수의 사역을 시사하기 때문이다(Michaels).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같이 죄와 허물이 없으신 유일한 분으로서 그의 구속은 보다 완전하고 귀한 것이다(출 12:46; 요 19:36;고전 5:7, Blum).
[야고보서 헬라어 성경말씀] 행함이 있는 믿음의 성도(약 1:19-27)
'성경 원문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요한계시록]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예수(계 1:17-20) (0) | 2021.12.16 |
---|---|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유다서] 이단자들의 심판이 확실함(유 1:14-25) (0) | 2021.12.16 |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요한일서] 새 계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요일 2:1-6) (0) | 2021.12.16 |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베드로후서] 예수님 재림의 확실성(벧후 1:16-21) (0) | 2021.12.16 |
[야고보서 헬라어 성경말씀] 행함이 있는 믿음의 성도(약 1:19-27) (0) | 2021.12.11 |
[헬라어 성경말씀 히브리서 강해] 성육신하셔서 고난받은 예수(히 2:1-10) (0) | 2021.12.11 |
[빌레몬서 헬라어 성경말씀]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바울의 부탁(몬 1:15-25) (0) | 2021.12.11 |
[헬라어 성경 좋은 말씀 디도서]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 말씀(딛 1:10-16) (0) | 2021.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