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베드로후서] 예수님 재림의 확실성(벧후 1:16-21)

엘벧엘 2021. 12. 1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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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반드시 재림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성경에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 있다면 주님의 재림입니다. 다른 예언들이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의 재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구름 타고 이 땅에 재림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거룩한 신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항상 복음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을 찾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원죄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영혼들을 찾아서 구원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온전한 믿음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재림의 확실성(벧후 1:16-21)

 

16절 우 가르 세소피스메노이스 뮈도이스 엑사콜루데산테스 에그노리사멘 휘민 텐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뒤나민 카이 프루시안 알르 에포프타이 게네덴테스 테스 에케이누 메갈레이오테토스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 본서에서 '능력'과 '강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안'은 일반적으로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24:3,27,37,39;살전 3:13;4:15;약 5:7,8;요일 2:28). 혹자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Spicq, Chase) 본절의 '파루시아'는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Bauckham, Green, Blum). 왜냐하면 베드로는 본 서신 전체에서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종말론적인 가르침 즉, 영광중에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3:4,12). 한편 '능력'의 헬라어 '뒤나민'은 '파루시아'와 연결되어 '영광'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마 24:30;막  9:1;13:26;눅 21:27, Bauckham). 그리스도의 능력은 재림하실 때 온 세계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된다(마 26:64;막 14:62;행 1:11;히 9:28). 그의 능력은 재림을 통해서 불법한 자와 적대자들을 심판하시고(살후 2:8;계 19:11-16) 그 나라를 온전히  완성하심으로(계  11:15-18) 드러나게 된다.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 '공교히 만든 이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소피스메노이스 뮈도이스'는 '지어낸 말', '허구', '우화', '신화', '거짓말'을 뜻하는 고대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복음의 진리와 대조되어 항상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딤전 1:4;4:7;딤후 4:4;딛 1:14). 베드로는 사도들이 전하여준 종말론적 교훈들이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사도들의 종말론적 권면이 수신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여 도덕성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종말론적 권면을 사실적이고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우화적으로 해석하였다(Bigg, Bauckham, Blum). 그래서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교훈을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재림 등 사도들이 전하여 준 교훈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주장한다. 한편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위엄을 친히 보았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위엄'은 신적인 권위와 장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목격한 예수의 변화산상 사건을 가리킨다(Green, Bigg). '친히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프타이'는 신비 종교들에서 사용된 전문 용어로써 가장 높은 경지의 신비를  경험하였음을 가리키는  말이다(Kelly, Green).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와 어휘들을 채택하여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다(Blum).

17절 라본 가르 파라 데우 파트로스 티멘 카이 독산 포네스 에네크데이세스 아우토 토이아스데 휘포 테스 메갈로프레푸스 독세스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에이스 혼 에고 유도케사

=====1:17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 '지극히 큰 영광'은 변화산상 사건의 구름과 연결된 히브리적 표현으로서(출 16:10;민 14:10;겔 1:4) 하나님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표현 방법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변화산상의 사건은 물론(마 17:1-9;막 9:2-10;눅 9:28-36) 구약의 시내산 사건(출 24:16)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본절에서 베드로는 시내산 사건이 아니라 변화산상 사건의 독특성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베드로는 변화산상 사건에서 계시된 예수를 모세와 같은 종말론적 예언자로 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왕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보고 있다(Bauckham, Blum).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내 아들'은 유대주의에서  메시아에 대한 진술로 해석한 시 2:7의 인용이다. 시 2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는 '아들'이라 불리며(7절) 시온산에서 왕으로 등극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적대 세력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8,9절). 초대 교회는 이런 시  2편을 예수께 적용시켜 예수께서 재림 때에 종말론적인 심판을 행사할 것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내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가페토스 무'는 메시아의 칭호로서 구약성경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유일한 자' 혹은 '독자'라는 해석으로(창 22:2, 12, 16)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시사하며, 다른 하나는 '선택된 자'라는 해석으로 (사 42:1) 예수께서 메시야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택받은 자이심을 시사한다(Bauckham). 한편 '내 기뻐하는 자'는 사 42:1의 인용으로 메시야 직분을 수행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선택하셨음을 시사한다(Green, Bauckham).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 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한편 '존귀와  영광'의 헬라어 '티멘 카이 독산'은 일반적으로 한 짝을 이루고 있는 단어이다(시 8:5;히 2:7, 9;벧전 1:7). '존귀와 영광'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예수의 변형된 모습의 영광스러움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igg, Windish).(2) 혹자는 하늘 음성에 의하여 예수에게 주어진 '위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Grundmann, Chase, Muller). (3) 혹자는 '존귀'는 음성을 통해서 예수에게 주어진 위엄을 의미하며, '영광'은 가시적인  변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yor,  Wand, Green, Kelly). 그러나 '존귀와 영광'은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는 이중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예수의 변형된 모습의 영광스러움에 아들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시는 존귀를 부여하셨다는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Blum).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한 영광을 입으셨으며, 하나님의 대리자인 왕으로서 종말론적인 심판과 통치를 수행할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암시한다(Bauckham).

18절 카이 타우텐 텐 포넨 헤메이스 에쿠사멘 엑스 우라누 에네크데이산 쉰 아우토 온테스 엔 토 오레이 토 하기오

=====1: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 '거룩한 산'은 구약 성경에서 시온 산을 의미하나 역사적으로 시온 산에서 예수께서 변형하셨다는 근거가 없다(Green). 그래서 오늘날 그 산이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부분 헤르몬 산이나 다볼 산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그 산이 어느 산이든지 간에 베드로가 그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산에 영광 가운데 임하셨고 예수의 신적 영광이 그 산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Bigg).

19절 카이 에코멘 베바이오테론 톤 프로페티콘 로곤 호 칼로스 포이에이테 프로세콘테스 호스 뤼크노 파이논티 엔 아우크메로 토포 헤오스 후 헤메라 디아우가세 카이 포스포로스 아나테일레 엔 타이스 카르디아이스 휘몬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 본절에서 '더 확실한 예언'은 구약  전체에 나타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의미한다(Blum, Bauckham, Spicq, Kelly, Grundmann).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들이 자신들이 체험하고 전하고 행한 일들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변화산상 사건이 구약의 예언자들이 미리 예상했던 예언의 성취로서 미래에 나타날  파루시아(재림)를 확실히 보증해줌을 진술한다(RSV, NIV, Bauckham). 한편 베드로는 '예언'을 '어두움을 비추는 등불'에 비유한다. '어두운 데'는 빛 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의미한다(사 9:2;엡 6:12). 그 예언의 말씀은 등불로서(시 119:105)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Blum).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 '날'은 재림의 날을 가리키며(Blum, Green)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계 22:16). 따라서 '날이 새어 샛별이...떠오르기 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를 의미한다. 한편 '너희 마음에'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본절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일어나는 계몽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ptre, Spicq, Grundmann, Kasemann). (2) 혹자는 본절이  종말론적인 진술이나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elkle, Kelly, Green). (3) 혹자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재림의 때에 초래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lum,  Bauckham).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20절 투토 프로톤 기노스콘테스 호티 파사 프로페테이아 그라페스 이디아스 에필뤼세오스 우 기네타이

=====1:20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베드로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들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사로이 풀 것'의 헬라어  '이디아스 에필뤼세오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1)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사람이 개인적으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NIB,  RSV,  KJV, Blum, Bauckham). (2)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예언자 자신의 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다(Calvin, Plumptre, Lumby, Green, NIV).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베드로는 당시 거짓 교사들이 성경을 임의로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2:1;3:16).

21절 우 가르 델레마티 안드로푸 에네크데 포테 프로페테이아 알르 휘포 프뉴마토스 하기우 페로메노이 엘랄레산 호이 하기오이 데우 안드로포이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이 사사로이 해석되지 않아야 되는 근거로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베드로의 진술은 성령의 이중적인 저작권을 암시한다. 즉 원저자이신 성령께서 영감을 통해서 성경 기록자에게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고전 14:37;딤후 3:16;딤후 3:10-17 주제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구약의 제자들도 역시 자신들의 예언이나 말씀이 자신의 뜻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삼하 23:2;렘 1:7,9). 그러나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재림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 자신이 표적이나 꿈, 환상을 통하여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16절).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하여 본절에서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신적 기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헬라어 성경말씀 베드로전서 강해]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벧전 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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