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야고보서 헬라어 성경말씀] 행함이 있는 믿음의 성도(약 1:19-27)

엘벧엘 2021. 12. 1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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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말로만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행동을 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교회 안에서나 세상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의 성도(약 1:19-27)

 

19절 호스테 아델포이 무 아가페토이 에스토 파스 안드로포스 타퀴스 에이스 토 아쿠사이 브라뒤스 에이스 토 랄레사이 브라뒤스 에이스 오르겐

=====1:19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테'는 명령법이라기보다는 직설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obertson). 만약 야고보가 명령법의 의도로 사용했다면 4:4처럼 '오이다'('알다')의 명령형 '오이다테'를 사용하였을 것이다.그러므로 '이스테'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알고 있는 거듭난 사실에 대한 인정이나 권고 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를 권면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현상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꾸준히 지속되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Ropes).

    말하기는 더디 하며 - 이것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Burdick, Tasker).

    성내기도 더디 하라 -  본문은 일반적으로 분노, 증오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의(義)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20절 오르게 가르 안드로스 디카이외쉬넨 데우 우 카테르가제타이

=====1:20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행한 권면에 대한 근거임을 나타낸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 성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해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삶에 위배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위이다(Burdick, Tasker, Moo).

21절 디오 아포데메노이 파산 뤼파리안 카이 페릿세이안 카키아스 엔 프라우테티 엑사스데 톤 엠퓌톤 로곤 톤 뒤나메논 소사이 타스 프쉬카스 휘몬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  야고보는 본문에서 다시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조건을 언급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이며, 이미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어 버리고'의 '아포데메노이'는 '옷을 벗어 버리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세심하게 자신을 살펴 마음속에 있는 모든 탐욕과 정욕 등을 내어 버려야 함을 시사한다.  그렇지 않고 부주의할 경우 쉽게 악에 빠지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파리안'은 본래 '옷에 붙어 있는 더러운 때'를 의미하였으나 종종 '몸에 불결하게 생긴 상처' 등을 말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모든 도덕적인 악을 가리키는 것으로(Manton, Martin)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뤼파리안'을 떨쳐버려야 함을 권면한다.'넘치는 악'(페릿세이안 카키아스)에 '페릿세이안'은 '충분한', '남은 것'을 뜻하는 단어로 흘러넘치는 것을 가리키며 '카키아스'는 '악한'의 뜻보다는 '위선', '더러운 욕망'을 의미한다(Calvin, Lenski, Lightfoot). 이것은  앞서 언급된 '뤼파리안'과 동의어로  중복된 표현을 통해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도덕적인 악을 버려야 함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Martin).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 본문은 구원의 수단으로 '마음에 심긴 도'를 말한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책임감 있게 말씀에 응답해야 하며 그것을 실제로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Burdick, Martin).

22절 기네스데 데 포이에타이 로구 카이 메 모논 아크로아타이 파랄로기조메노이 헤아우투스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단지 듣기만을 좋아하는 자는 나태한  자이며 자신 속이는 자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한다. '행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타이'는 '아사'('행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윤리적 측면의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포이에타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생활로써 증거하는 자를 의미한다(롬  2:13, Calvin, Adamson).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도를 듣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말씀을 들은 자는 그것을 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다(마 7:21).

23절 호티 에이 티스 아크로아테스 로구 에스틴 카이 우 포이에테스 후토스 에오이켄 안드리 카타노운티 토 프로소폰 테스 게네세오스 아우투 엔 에소프트로

=====1: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 야고보는 본절에서 도를 듣고 행치 않는 자를 거울을 보는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노운티'는 경솔하게 힐끔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서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Burd-ick, Martin). 당시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나 희미한 모습으로 비칠 뿐 확신이 없음을 나타낸다(Ad-amson). 이는 단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열심히 주의하여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음을 시사한다(Mayor).

24절 카테노에센 가르 헤아우톤 카이 아펠렐뤼덴 카이 유데오스 에펠라데토 호포이오스 엔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곧 잊어버리거니와 - 본절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이 마치 희미한 거울을 주의 깊게 살펴서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였지만 거울을 떠나면 자신의 모양을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행함이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론적인 지식으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다. 말씀은 오직 듣고 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야고보는 '보고'(카타노 에센), '가서'(아펠렐뤼덴), '잊어버리거니와'(에펠라데토)의 단순 과거형을 사용하여서 진리의 말씀을 희미하게 듣고 나서 실행치 않는 자가 곧 말씀을 잊어버리고 다시 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25절 호 데 파라퀴프사스 에이스 노몬 텔레이온 톤 테스 엘류데리아스 카이 파라메이나스 후토스 우크 아크로아테스 에필레스모네스 게노메노스 알라 포이에테스 에르구 후토스 마카리오스 엔 테 포이에세이 아우토 에스타이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있는 자 - 본절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에 대한 설명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야고보와 수신자가 유대 지향적인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Burdick), 구약 시대의 율법과 대조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복음'을 의미한다(렘 31:33, Moo, Tasker). 구약 시대의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강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율법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유로운 것이다(요 8:32; 고후 3:16). 이것은 제도를 통하여 법적 구속력을 지닌 모세의 율법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확실하게 드러난 실체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율법의 특징은 첫째로 택하신 자들을 진리와 자유로 인도하는 것에 모순과 결합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특징은 자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구속력을 지녀서 억지로 지키게 하는 것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Burdick). 한편  '들여다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스'는 몸을 구부려서 보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것이 '대충 힐끔 보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나(Hort) 본문에서는 문맥상 '주의 깊게 관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Tasker, Burdick, Martin).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  '듣고 잊어버리는 자'(아크로아테스 에필레스모네스)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글자대로는 '망각을 듣는 자'란 뜻이다. 야고보는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알라'('그러나')를 사용하여 '실행하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실행하는 자'란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못해도 그 행할 것을 위해 심사숙고하는 자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Manton). 한편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을 '율법을 행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할 경우 율법을 지키는 그 일로 인하여 만사가 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행하는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 행위 자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26절 에이 티스 도케이 드레스코스 에이나이 엔 휘민 메 칼리나고곤 글롯산 아우투 알르 아포톤 카르디안 아우투 투투 마타이오스 헤 드레스케이아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 신약성경에서 본문에만 나오는 '경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레스코스'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다'에 해당하는 '드레오마이'에서 유래된 듯하다(Robertson). 이는 예배의 외적인 모습 즉 기도, 구제, 금식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렇게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이 말에 대해서 자제하지 못할 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 '재갈 먹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리나고곤'은 '재갈'을 의미하는 '칼리노스'와 '이끌다'의 뜻인 '아고'의 합성어이다. 이는 재갈 먹이지 않는 말을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Lenski) 남을 비방하거나 악담하는 것을 제어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혀를 절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이렇게 말과 행위가 틀린 경건은 위선자들에게서 오는 헛된 것이다(마 6:2,16).

27절 드레스케이아 카다라 카이 아미안토스 파라 토 데오 카이 파트리 아후테 에스틴 에피스케프테스다이 오르파누스 카이 케라스 엔 테 들립세이 아우톤 아스필론 헤아우톤 테레인 아포 투 코스무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이것이니라 - 본절은 경건의 정의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경건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경건한 삶은 내적인 모습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헬라어 '파라토 데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평가 방법으로 사람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 함은 경건의 구체적인 한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러움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미안토스'는 '더럽히다'의 '미아이노'와 부정 접두어 '아'가 합성된 형용사로서 후에 의미가 변천되어 '정결한(카다라)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로 보아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이란 표현은 의미상 동의어 중복으로 강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종교 예식에 있어서 기독교든 이교도든 정결하고 흠 없는 제사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초대 기독교 사회에서 바리새인에 의해 지속되었었다(마 23:25; 막 7:3, Ropes). 야고보는 본절에서 내적인 경건 생활에서 비롯되는 외적인 경건 생활의 모습에 대해서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  본문에서는 특별히 두 부류의 대상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그 외의 다른 부류인 나그네나 병든 자, 갇힌 자 등을 제외시키지는 않는다. 이들은 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마 25:40) 구제 대상들이다(Ropes). 한편 '돌아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프테스다이'는 문자적으로 '보러 가다', '조사하러 가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교제를 나누기 위한 돌아봄보다는 극히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돌아보는 것을 시사한다(갈 5:6, Burdick).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 야고보는 '세속'(코스무)이라는 단어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통한 죄악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Le-nski, Burdick). 이는 사도 요한이 잘 쓰는 표현 방법으로(요일 2:16) 이웃 사랑은 물론 자신 스스로가 죄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화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건한 자의 삶에 있어서 이웃 사랑과 자기의 거룩한 생활과 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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