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마가복음]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냄(막 1:16-28)

엘벧엘 2021. 12. 1.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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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안식일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교훈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게 됩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명령하여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빠져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영혼과 육체를 구원하는 분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냄(막 1:16-28)

 

16절 페리파톤 데 파라 텐 달랏산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이덴 시모나 카이 안드레안 톤 아델폰 아우투 발론타스 암피블레아트론 엔 테 달랏세 에산 가르 할리에이스

=====1:16

  갈릴리 해변 - 갈릴리 바다는 보통의 담수호(淡水湖) 중의 하나이지만 성경에서는 흔히 바다로 불리고 있다. 이는 다른 곳에서 '게네사렛 호수'(눅 5:1) 또는 '디베랴 바다'(요 6:1, 23;21:1)로도 불리고 있다. 이 아름 다운 바다는 길이 약 20km, 너비 약 10km, 수면은 해발-240m 정도이며, 가장 깊은 곳이 약 50m가량 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업이 번창했다. 그리고 이 바다 서쪽과 북쪽 해변에는 많은 읍과  어촌들이 밀집해  있었다(Josephus, Wars. III, x).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 예수께서는 갈릴리 전도에 있어서 최초로 이 어촌을 '지나가시다가'(따라 걸어가시다가) 갈릴리 어부 출신 형제인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부의 직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형제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요단강에서 이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바로 이 메시아라고 가르쳐 준 세례 요한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요 1:35-39).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개하였다(요 1:29). 따라서 그들 두 형제는 그때부터 예수를 따라다녔으며 인격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인격적 관심의 결과는 그들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게 된다(3:13;마 10:1 등).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 먼저 여기 제시된 '그물'(암피블레스트론)은 예수께서 비유 중에 흔히 거론하셨던 큰 그물, 즉 '예인망'(사게네)이 아니라 손 그물, 즉 '투망'(投網)을 가리킨다. 한편 마가는 안드레 형제의 모습을 매우 생동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이 손 그물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 도중에 예수께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 받은 사실을 현장감 있게 긴박감을 더하여  기술해 주고 있다.

17절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 이에수스 듀테 오피소 무 카이 포이에소 휘마스 게네스다이 할리에이스 안드로폰

=====1:17

 나를 따라 오너라(듀테 오피소 무) - 원문에서 '오너라'(듀테)는 말 앞에 '이리로...' 또는 '다라'(오피스)라는 부사어가 첨가되어 있는 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가 이때까지 살아왔던 그러한 방향으로 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이리로' 혹은 '이 새로운 방향으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의 이러한 부르심(calling)에는 '...되게 하리라'(포이에소)는 목적이 수반되어 있다. 즉 그분의 부르심은 허황되고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의 위대한 주역의 역할을 맡기시리라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예수의 부름에 응답하기만 하면 그들은 복음 전파와 구원 사역의 위업을 맡게 될 것이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 - 주님의 부르심은 부름 받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기보다 오히려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부르심이었다. 실로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들을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해내어야 하는 긴급한 임무를 맡기시기 위함이었으며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즉각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심판과 관련해서 '낚는다'는 말이 사용된 경우를 볼 수 있다(렘 16:16;겔 29:4, 5;38:4;암 4:2). 한편 본문의 '사람'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단수형으로 나와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나 흠정역에서는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안드로포이)이란 이 말은 단순히 갈릴리 주변 사람들이나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범 인류적이고 보편적인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Lenski).

18절 카이 유데오스 아펜테스 타 딕튀아 아우톤 에콜루데산 아우토

=====1: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 여기에서 '곧'(유뒤스)이란 마가의 표현은 긴급하고도 생생한 장면을 강조하는 특별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셨을 때에는 종말론적인 긴박성(緊迫性)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모든 삶을 과감히 청산(淸算)하고 주님을 따라나섰던 것이다. 진정 어부들에게 있어서 '그물'은 배와 더불어 그들의 생존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버리는 데에는 과감한 의지적 결단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한편 두 제자의 이 같은 즉각적 순종의 배후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의 절대적 능력과 권위이다. 실로 그분의 권위 앞에 모든 피조물은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빌 2:10).

   좇으니라 - 헬라어 '아콜루데인'은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의미상으로는 (1) 예수를 따르는 것, (2) 예수의 부르심에 자원하여 순복 하는 것, (3) 예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뜻한다(8:34;마 4:25;9:38 등). 이 말에 대한 문자적인 뜻을 세분하여 살펴보자면 '아콜루데인'은 접두어 '아'(여기서는 '일치', '닮음'이란 의미)와 '길'이란 뜻의 '켈류도스'의 합성어로서, '같은 길을 함께 가다'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즉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는 선포에 대한 증인으로서 주님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19절 카이 프로바스 에케이덴 올리곤 에이덴 이아코본 톤 투 제베다이우 카이 이오안넨 톤 아델폰 아우투 카이 아우투스 엔 토 플로이오 카타르티존타스 타 딕튀아

=====1:19

  조금 더(올리곤) - 이 부사는 마가의 세밀하고도 정확한 사건  묘사 기법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요한 -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 다음으로 중요한 제자들로서 이들의 어머니는 살로메였다(마 10:2 참조). 한편 여기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이름의 서열상에 있어서 야고보가 언제나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형으로  보인다. 후에 그는 12 사도 가운데 최초로 순교하게 되는데(행 12:2), 이에 비해 요한은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 교회를 파수(把守)하고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등 여러 서신들을 기록하였다. 한편 이들은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각적으로 주님과 밀접한 관계에 들어갔으며 사도로서의 훈련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소지(素地)는 얼마든지 있었다. 즉 그들은 마 13:55;요 6:42 등의 경우처럼 그들도 "이는 나사렛에서 온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왜 우리는 이 사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거부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을 더 큰  근거가  될 수 있었다(요 19:25). 실로 예수와 이종 사촌 간이었던 그들은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의구심을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예수의 형제와 친척들은 심지어 예수를 보고 '미쳤다'라고 하지 않았던가(3:21). 이러한 불리한 가정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위엄과 능력과 사랑의 부르심에 조금도 주저 않고 따라나섰다.

   그물을 깁는데 - 베드로와 안드레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던 와중에 부름 받은 것과 짝을 이루기나 하듯이 야고보와 요한은 다음 출어(出漁)를 위해 그물을 수선(修繕)하고 있던 상황에서 부름을 받는다. 실로 이것이 현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마가의 묘사 기법이다. 즉 그들은 어떤 종교적 분위기나 헌신의 순간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생업에 충실하고 있을 때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저녁 이후 시간에 고기를 잡고 낮에는 그물 수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본문을 베드로 형제의 소명 받음이 있은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Bultman).

20절 카이 유데오스 에칼레센 아우투스 카이 아펜테스 톤 파테라 아우톤 제베다이온 엔 토 플로이오 메타 톤 미스도톤 아펠돈 오피소 아우투

=====1:20

  곧 부르시니(카이유데오스에칼레센) - 예수께서는 마치 단거리 육상 선수의 그것처럼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긴급하게 두 제자를 부르셨다. 실로 예수의 선교사역은 이처럼 신속하고도 민첩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당신께서 항상 다가올 종말에 대한 기대와 예비를 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삯군들과 함께...버려두고 - '삯군들'에 대한 언급은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으로서 '삯군'(미스디오스)이란 임금(賃金)을 받고 고용된 일꾼들을 가리킨다. 적어도 이러한 삯군들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따라서 세베대의 가정이 비교적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삯군들이 있었기에 야고보와 요한은 주저함 없이 그들에게 아버지 돕는 일을 맡기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은 예수의 부르심에 의해 이전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온전한 헌신의 길에 나섰음에 틀림없다. 실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떠남의 결단이 요구된다(창 12:1-3). 이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마 19:29).

21절 카이 에이스포류온타이 에이스 카페르나움 카이 유데오스 토이스 삽바신 에이셀돈 에이스 텐 쉬나고겐 에디다스켄

=====1: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 '저희'라는 말이 원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들어가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이스포류온타이'가 3인칭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들은 예수와 예수께 선택된 처음  네 제자를 가리킨다(29절). 한편 '나훔의 동네'란 뜻을 지닌 '가버나움'은 호숫가에 위치해 있었고, 제자들이 부름 받은 갈릴리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특히 이곳은 다메섹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要地)이자 세관이 있던 곳으로써(2:14) 군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은 오늘날 갈릴리 해안 서북쪽에 있는 텔 훔(Tell Hum)으로 확인되고 있다(마 4:13 주석 참조). 그리고 예수께서 이곳을 공생애 사역의 주 활동 무대로 삼으신 것 가운데 한 이유는 바로  이곳이 세리 마태를 위시한 다섯 제자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바로 이때 안식일 예배 중 첫 번째 예배가 진행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때 안식일이 되기 전 금요일에 이미 회당 안으로 들어가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회당에...가르치시매 - 예수의 공생애사역의 시초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여기 '회당'(Synagogue)이라는 말은 한 지방에 모인 회중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이들 회중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회당의 기원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율법을 연구하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회당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유대인이 살던 곳이면 헬라 세계 어디서든지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회당은 유대교를 가장 오랫동안 지속시켜 준 제도가 되었으며 기독교 초창기에 복음도 이 회당을  근거지로 삼아 전파되어 나갔다(마 4:23;눅 4:16-30 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 참조). 한편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 회당에 들어가시자마자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묘사하는 '에디다스켄'은 미완료 동사로서 매  안식일이면 예수께서 이곳에 나오셔서 가르쳤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당시 가버나움 회당은  활짝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이곳을 초창기 복음 전파의 근거지로 삼고 계속적으로 가르치셨다. 물론 이때 '회당의 자유'는 회당 지도자들이 인정하는 방문 교사들 또는 권위 있는 선생들에게 허용되는데, 그들은 주로 그 회당에서 율법이나 선지서를 읽으며 그 읽은 바를 풀이하고 설교하기도 했다. 한편 그때 회당에서 이루어지던 의식은 오늘날의 예배 의식과 비슷한 것으로서 기도, 찬양, 성경 봉독, 그리고 랍비(Rabbi) 나이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한 설교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22절 카이 엑세플레스손토 에피 테 디다케 아우투 엔 가르 디다스콘 아우투스 호스 엑수시안 에콘 카이 우크 호스 호이 그람마테이스

=====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 '놀라니'에 해당하는 '엑세플레쏜토'는 '밖으로'를 뜻하는 '에크'와 '친다'를 뜻하는 '플레쏘'의 합성어로서, 이는 문자 그대로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 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를 의미한다. 본문의 의미는 그들이  순간적으로 놀라고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도 이렇게 표현되었다(마 7:28). 한편 청중들 편에서 볼 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토록 놀랍게 하였던가? 이에 대해  마가는 그 '교훈'(디다케)에 놀랐다고 보고한다. 이 '교훈'은 능동적  측면에서 가르치시는 행위 또는 방법을, 수동적 측면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각각 의미하는데, 본문은 이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 실로 목수 출신이었던 그가(6:3) 어떻게 그러한 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그들의 깊은 의문점이었으리라.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마가는 '교훈'이란 말에 덧붙여 특별한 이유, 곧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하는  설명 구를  달았다(마 7:28,29). 다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방법과 내용 및 서기관들의 가르치는  방법과 내용 사이의 차이점들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에(요 14:6;18:37) 반해 서기관들의 설교는 대부분이 와전(訛傳)된 것이었고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사변적(思辯的)인 것들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중대한 의미가 담긴 문제들, 곧  생명과 사망 그리고 영원에 관한 문제들을 제시하셨지만 서기관들은 하찮은 문제들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였다(마 23:23;눅 11:42). (3)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는 내용에는 체계가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탈무드(Talmud)경이 그렇듯이 서기관들은 자주 중언부언(重言復言)하였다(마 6:7). (4) 그리스도께서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례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셨지만 서기관들의 설교는 고류 하고 형식적인 데만 얽매여 있었으므로 메마른 심령들의 갈급함을 채워줄 수 없었다. (5)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자요, 그들의 영원한 축복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자로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사람에 대해 언급하셨다. 하지만  서기관들은 가장 중요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다. (6)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본 구절에 진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가  전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실행  능력을 겸비한 탁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요 8: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곧  아버지의 메시지요, 성경의 메시지다. 그러나 서기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그들의 스승들의 유전에서 온 것으로서 고작 스승들의 교훈을 인용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었다(7:8,13;마 15:2,3). 그들은 마치 깨어진 물통에서 물을 퍼내려고 헛되이 노력하였던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생수의 근원'(렘 2:13)이 되시어 자신으로부터 물을 공급하셨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당시 종교지도자를 이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의 차이는 근본적인 면에서 상이(相異)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듣고 백성들이 놀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23절 카이 엔 엔 테 쉬나고게 아우톤 안드로포스 엔 프뉴마티 아카다르토 카이 아네크락센

=====1:23

 마침(유뒤스) - 긴박감을 더해 주는 마가의 표현 기법이다. 곧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으로 회당 내(內)가 놀라움과 감동으로 가득 차 있던 바로 '그 시점'에라는 뜻이다.

   더러운 귀신(프뉴마티 아카다르토) -  본서에서 이 말은 11회 나오며, 누가는 이 말에 '귀신' 혹은 '마귀'라는 뜻을 가진 '다이모니온'을 부가하여 사용하고 있으나(눅 4:33;8:27;10:17등),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마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존재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 데 있다. 이 '더러운 영'은 선한 의지와 도덕성이 완전히 상실된 그야말로 악의 실체가 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의 갈릴리 사역 초두(初頭)인 바로 이 안식일에 진리 전파 장소 한가운데로 돌진해 온 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악한 영, 곧 마귀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일 3:8). 한편 더러운 귀신 들린 자의 첫 반응은 '소리질러'(아나크라조)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진리 전파 사역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눅 4:33).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 심지어는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즉 그들은, 귀신이란 정신병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정서적 불안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경우 혹은 정신 이상자와 간질병자의 경우로 나타나는 증세를 가정(假定)해서 칭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 구절은 귀신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명백히 규명해 주고 있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마귀)과 '귀신'참조). 이러한 귀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며 사람들에게 극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것이다(벧전 5:8).

24절 레곤 에아 티 헤민 카이 소이 이에수 나자레네 엘데스 아폴레사이 헤마스 오이다 세 티스 에이 호 하기오스 투 데우

=====1:24

  나사렛 예수여 - 문자적으로 '나사렛 사람' 혹은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서, 회당에 들어왔던 귀신은 예수에 대하여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큰 소리로 떠들어 대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으며 따라서 천한 신분을 가졌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메시아성을 부정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術策)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일반 사람들의 통념 속에서는 '나사렛'이라고 하면 경멸의 뜻으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종교, 문화적으로 선민적 특권을 누리던 예루살렘 및 유대 지경과는 동떨어진 이방의 초라한 고을이었기 때문이다(사 9:1,2). 이런 관점에서 심지어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언급하셨던 나다나엘까지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였던 것이다(요 1:46,47).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이 말은 귀신이 그 사로잡은 자의 성대(聲帶)와 입술을 사용하여 한 말로서 의미상으로는 '당신이 왜 우리를 괴롭히려 합니까'라는 뜻이다(마 8:29). 여기에서 귀신이 말한 '우리'란 복수형의 칭호에 대해 (1) 말하는 사람과 귀신을 함께 일컫는 이중인격을 함의한 말로 보는 학자도 있고(Robertson), (2) 이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그의 나머지 동료 귀신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W. W. Wessel). 이중 예수의 신성을 직시하고 또 그분에 대한 두려움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더 적절할 것이다. 실로 이 귀신은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지금 자신에게 닥칠 일이 다른 귀신들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였던 것이다. 즉 더러운 귀신은 예수의 일을 방해하려 했으나 예수 앞에서 예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귀신은 자기뿐 아니라 악령의 세계 전체에 닥친 파멸과 심판의 위기를 직감하고 공포와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호하기오스 투 데우) -  이는 23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프뉴마티 아카다르토)과 대조되는 말로서 원래는 하나님께 구별된 일꾼들, 선지자들을 가리켰으나 본문에서는 특별히 예수의 신성과 메시아성을 가리킨다. 이와 함께 예수에 대한  귀신들의 표현을 살펴보면 마 8:2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the Most High God)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모두 귀신이 어떻게든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보겠다는 자기 방어적 측면에서 한 고백으로서 그 모두가 진실한 진술이었다는 데 주목을 끌게 한다. 이 귀신은 예수의 '거룩한'(호 하기오스)신성을 이해했기  때문에 '불결한'(혹은 '더러운) (아카다르토) 본성을 갖고 있는 자신들은 그 앞에서 쫓겨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에 의해  이러한 용어가 무의식 중에 실토(實吐)되고 만 것이다(34절 주석 참조).

25절 카이 에페티메센 아우토 호 이에수스 레곤 피모데티 카이 엑셀데 엑스 아우투

=====1: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 예수께서 귀신을 상대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꾸짖는 것'이다. 이 '꾸짖다'(에피티마오)는 말은 '말로써 엄하게  경고하다'는 뜻 외에 '벌하다', '책망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그 꾸짖음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 실로 귀신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타협이나 회유(懷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다.

   잠잠하고...나오라 - 예수께서는 완전히 타락한 귀신에게서 자신의 메시아직에 대한 증거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귀신과 사단은 이 거룩한 증거에 끼어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잠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모데티'는 '피모오'의 부정 과거 2인칭 단수 명령형으로 원뜻은 '입에 자갈을  물리라'로서 더 이상 소리치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인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Robertson)는 '소에게처럼 입에 망을 덧씌울 것이라'는 말로서 번역하여 더욱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오라'는 명령 역시 더 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는 거부할 수 없는 엄한 명령인 것이다.

26절 카이 스파락산 아우톤 토 프뉴마 토 아카다르톤 카이 크락산 포네 메갈레 엑셀덴 엑스 아우투

=====1:26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스파락산 아우톤) -  이것은 마치 위경련을 일으키듯이 '발작하며 몸부림을 치게 하고'라는 보다  강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흠정역(KJV)에서는 이 구절을 '그때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상하게 하고'(And when the unclean spirit had torn him)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 4:35)와 모순될 뿐만 아니라 원문에 있는 경련으로 보아야 할 간질병(마 17:15)에 대한 언급도 없음으로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의 의미에 보다 근접해 있다. 어쨌든 귀신(사단)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귀신은 마지막 쫓겨나가는 순간까지도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것이 마귀의 본성인 것이다.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큰 소리'(포네  메갈레)란 어떤 크나큰 충격에 의해 강렬한 음성으로 내뱉는 비명을 가리킨다. 이는 그 사람이 받는 고통이기 이전에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야만 하는 귀신의 최후의 일성(一聲)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써 그 귀신은 그 사람의 인격과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것이다.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가운데 귀신 축출(exorcism) 기사를 첫 번째로 기록하였다. 이 이적의 기록은 마가의 복음서 기록 의도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 예수의 교훈(22절)과 이적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제시했던 것이다. 한편 교회사가 하르낙(Harnack)은 이 귀신 축출이 A.D.3C까지 초대 교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한 개인의 치유뿐 아니라 사귀(邪鬼)로 인한 공포에 휩싸였던 한 사회를 치유하는 크나큰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진정 이것은 귀신의 왕국을 멸절하시고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예수의 권능에 찬 역사의 단면이 아닌가(9:14-29, 주제 강해 '귀신 들림과  축사' 참조).

27절 카이 에담베데산 판테스 호스테 쉬제테인 프로스 아우투스 레곤타스 티 에스틴 투토 티스 헤 디다케 헤 카이네 아후테 호티 카트 엑수시안 카이 토이스 프노위마신 토이스 아카다르토이스 에피탓세이 카이 휘파쿠우신 아우토

=====1:27

  다 놀라 - 마가는 회당에서 일어난 생생한 모습을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또 하나의 극적인 동사를 사용하였다. '다 놀라',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담베데산'은 수동형이지만 능동의 뜻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매우 충격적으로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놀란 이유는 그들 모두 이제까지 경험해 왔던 교훈 및 이적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즉 22절에서 '뭇사람들이 놀란'것은 종래의 서기관들의 틀에 박힌 고루한 가르침과는 판이한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가르치심으로 인한 것이었고, 본 구절에서 '다 놀란'것은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명령에 귀신이 즉시 쫓겨난 사실로 인한 것이었다.

   서로 물어 가로되...어찜이뇨 - 차분한 어조로 '서로 말하여'(눅 4:36)라고 기록한 누가의 보고보다는 좀 더 긴장되고 호기심이 충천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어구(語句)이다.

   새 교훈(디다케 카이네) - 주님의 새로운 가르치심과 그로 인한 뭇사람들의 놀라움은 계속되었다. 실로 예수의 가르침은 진부하고  장황한 랍비의 교훈과는 완전히 판이한 것이었으며, 이는 마치 새봄의  꽃내음처럼 신선하고 '새로운'(카이네) 가르치심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여기 '새로운'(네오스) 것이 아니라 질적인 새로움을 말한 것으로 결국 예수의 '새 교훈'은 고루한 가르침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창조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으로 다가왔음을 연상케 한다. 특히 이 '새 교훈'은 '권세 있는'(카트 엑수시안) 교훈으로서 사람들의 심령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창을 열어 진리를 발견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교훈이었다. 한편 보통 대부분의  독법(讀法)에서는 '권위 있는'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읽는다.

28절 엑셀덴 데 헤 아코에 아우투 유뒤스 에이스 홀렌 텐 페리코론 테스 갈릴라이아스

=====1:28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예수 사역의 탁월성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가버나움을 뛰어넘어 갈릴리 온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누가의 보고와 관련시켜 본 장명을 연상한다면 '가버나움 근처의 갈릴리 도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눅 4:37 주석 참조). 한편 여기 제시된 '갈릴리 사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페리코론 테스 갈릴라이아스'에 대해서 '갈릴리'가 소유격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비단 갈릴리 지역뿐만 아니라 고보다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William  L.Lane)고 보는 이도 있다(마 4:24). 이처럼 예수의 소문은 가히 폭발적일 만큼 갈릴리 전역에  퍼져나갔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마태복음]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마 1:18-25)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마태복음]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마 1:18-25)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성육신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신약에서 마리아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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