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에서는 이방인의 종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세상 만물을 신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입니다. 썩어질 것들을 신으로 섬기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겨야 합니다.
썩어질 우상에게 절하는 이방 종교(롬 1:18-25)
18절 아포칼륍테타이 가르 오르게 데우 아프 우라누 에피 파산 아세베이안 카이 아디키안 안드로폰 톤 텐 알레디안 엔 아디키아 카테콘톤
=========1:18
하나님의 진노. --- 시 7:11-12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심문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육안으로써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깨달을 수 없다. 그 이유는 ⑴ 그 진노의 나타날 때가 인간의 범죄 한 즉석이 아니기 때문이며, ⑵ 그 진노의 방식이 초자연적(超自然的) 간섭보다 자연법칙을 통하는 간접적인 것이 많기 때문이며(창 3:18-19, 4:12), ⑶ 그분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우심이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그 진노 아래서 그들의 심령이 늘 불안한 중에 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 이것은, ⑴ 불의 곧 부도덕한 일들을 행하노라고 진리(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눌러 둔다는 의미라고 함. ⑵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소유한다는 의미라고 함(이런 경우에는, “막는”다는 말 “카테콘톤”을 소유한다는 뜻으로 해석함). 이것은 종교적 의식을 말함이다. ⑶ 불의하게 진리를 막는다는 의미라고 함. 곧,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진리를 믿지 아니함이 부당하다는 뜻이다. 이 아래 문맥으로 보아서 이 해석이 적합해 보인다. 위의 세 가지 해석이, 모두 다 하나님을 알고도 신종(信從)치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경건치 않음과 불의 ---- “경건치 않음”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바르지 못한 태도(21-25)이고, “불의”는 인간에게 대해 바르지 못한 태도이다(26-32). 후자(後者)는 전자(前者)의 결과이다. 먼저 하나님을 바로 공경한 뒤에 사람에게도 덕을 세울 수 있다.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이 어귀에 대한 해석으로, ⑴ 하늘이란 말은 자연의 하늘로 간취되고 거기서 나타난 진노는 천연계(天然界)의 재앙(예컨대, 지진, 흉년)이라는 것으로 해석이 있고, ⑵ 하늘을 하나님의 성결성(聖潔性)을 표상(表象)하는 것으로 보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진노는 인간의 죄에 대한 그 성결성의 반항을 의미한다고 한다. ⑶ 칼빈은, 여기, “하늘”이란 것에서 그것의 광대 무비성(廣大無比性)을 취하여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편만성(遍滿性), 곧 인류 중 한 사람도 이 진노 아래 있지 않는 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19절 디오티 토 그노스톤 투 데우 파네론 에스틴 엔 아우토이스 호 가르 데오스 아우토이스 에파네로센
=====1:19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란 말은 “알려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저희 속에 보인 다함은, 곧 양심에 느껴져야 할 자연계의 놀라움을 가리킨다. 칼빈은 자연계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거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 죄가 많기 때문에 어두워져서 자연계를 앞에 놓고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는, 특수 계시(特殊啓示) 곧, 성경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20절 타 가르 아오라타 아우투 아포 크티세오스 코스무 토이스 포이에마신 노우메나 카도라타이 헤 테 아이디오스 아우투 뒤나미스 카이 데이오테스 에이스 토 에이나이 아우투스 아나폴로게투스
========1:20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 --- 출 33:20 ; 요 1:18 ; 딤전 1:16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본질을 말함이다. 이 보이지 않는 분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히 11:3에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될 것이 아니니라”라고 한다. 신앙은, 나타나지 않는 참된 신(神)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육적 시각(視覺)을 만족시키지 않으심이 오히려 정당하다.
능력. ---- 능력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능(能)을, 그 유지(維持)의 능, 그 심판의 능을 가리킨 것으로서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다.
신성. ---- 이는 하나님 자신 곧 그의 본질인데, 우리는 만물을 보아서 그것을 안다. 곧, 만물은 법리(法理)의 지배를 받아 성립되어 있다. 누가 만물을 무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랴? 무법하고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두고 보면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계의 이법성(理法性)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우연 시(偶然視)하며, 기계 시(機械視)하는 극단의 회의주의자도 자기 자신의 이법성을 회의(懷疑)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법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인겨(人格)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이법의 주재자 곧, 인격적신(人格的神)이 계심을 누가 부인하랴? 그 이유는 어떤 이법이든지 그것이 실시되려면, 그것의 실시자가 있어야만 되는 까닭이다. 인간은, 범죄 하여 암매 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천연 계시(天然啓示) 앞에서도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특수 계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모른다.
21절 디오티 그논테스 톤 데온 우크 호스 데온 에독사산 에 유카리스테산 알르 에마타이오데산 엔 토이스 디알로기스모이스 아우톤 카이 에스코티스데 헤 아쉬네토스 아우톤 카르디아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 인생은, 하나님을 아는 영혼의 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의식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는 자는 드물다. 그들은 참 하나님 아닌 자 곧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섬기니,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요 영화롭게 함이 아니다. 이는 마치 귀머거리 소경 된 어린아이가 그의 친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어떤 악한(惡漢)을 가리켜 자기 아버지라고 할 때에 그 아버지에게 무쌍한 욕이 됨과 같다.
22절 파스콘테스 에이나이 소포이 에모란데산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 인간의 지식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계를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지식은 피조물의 하나로 피조물 권내(被造物圈內)에 있어서 그 권외에 나가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 지식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다. 그러므로 그것이 스스로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것이 스스로 종교적 지혜를 낸다면, 거짓 종교, 곧 자율주의(自律主義)의 종교를 제조할 뿐이다.
우준하게. --- 누가 진실되어 셋을 가리켜 다섯이라고 주장하고, 일곱을 가리켜 아홉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다. LLRM와 같이 피조물(被造物)을 가리켜 창조자요, 심판자요, 또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무한히 어리석은 자이다.
23절 카이 엘락산 텐 독산 투 아프다르투 데우 엔 호모이오마티 에이코노스 프다르투 안드로푸 카이 페테이논 카이 테트라포돈 카이 헤르페톤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이 말씀은 시 106:20의 말씀과 흡사하니, 곧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라고 함이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거짓된 종교를 만들어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썩을 것으로 하나님의 썩지 않는 것을 대치하고, 피조물의 형상으로 창조자를 대치한다. 슐라테르(A. Schlatter)는 말하기를, “저희의 종교 행위는 진리를 거스리는 행위요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투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제 위에 소개된 두 가지 정반대의 대조를 자세히 생각해 보자.
⑴ 썩지 아니하는 영광과 썩어질 것. 하나님의 영광은 썩지 않으시는 영광이다. 영광이란 말은 구약에 모두 280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와 구원 능력의 나타남을 가리킨다(출 16:9-12, 24:15-18, 29:43, 40:34-35 ; 레 9:6, 23 ; 민 14:10, 16:19-20 ; 시 72:19, 96:3, 102:15-16, 138:4-5).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는 영적 지각으로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상은 거짓 것이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육안(肉眼)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 취급(偶像取扱)하려는 죄악이다.
⑵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을 인간 편에서 자기 형상대로 만드는 악해,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자기 형상(피조물의 형상)으로 신(神)을 만드니, 이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섬기는 자 되게 하려는 망동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 되는 인간의 뜻으로 하나님을 취급하는 망동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성결과 도덕을 지키지 않고 신을 불러서 복리(福利)를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진정한 경견이 아니다. 진정한 경건은 윤리적 종교 행위이다. 약 1:27에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였다.
24절 디오 카이 파레도켄 아우투스 호 데오스 엔 타이스 에피뒤미아이스 톤 카르디온 아우톤 에이스 아카다르시안 투 아티마제스다이 타 소마타 아우톤 엔 헤아우토이스 아우토스
=========1:24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인하여 노를 발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노는 인간의 악행을 그대로 버려 두심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고로, 내버림이 되어 모든 부도덕한 일을 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크로 솨이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죄악이 죄악을 낳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 없는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이다. 그것이 이교의 가져오는 표본이니, 곧 우상주의가 무서운 죄악들을 동반함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은 자연 심판으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종교를 바로 가지지 못한 것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때부터 이렇게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리델보스는 말하기를, “죄악은 세력인데, 그 세력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보호를 받는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은 음행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도 재설된다. 몸은 하나님의 전인데(고전 6:19), 하나님이 계신 동안은 그 몸이 깨끗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떠나시는 그때부터는 불결해질 수밖에 없다.
25절 호이티네스 메텔락산 텐 알레데이안 투 데우 엔 토 프슈데이 카이 에세바스데산 카이 엘라트류산 테 크티세이 파라 톤 크티산타 호스 에스틴 율로게토스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아멘
========1:25
이 귀절은 하나님의 진리와 우상의 거짓을 대조시킨다.
⑴ “하나님의 진리”란 것은 하나님 자신의 진실성을 가리킨다. 곧, 하나님은 참(眞)이란 뜻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도 이렇게 생가하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여러 가지 성질을 계시하시는 중에도 특별히 그의 진실성을 힘 있게 계시하셨다. 민 23:19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의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진실성 때문에 모든 영적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많이 말한다. ① 우리를 부르신 것이 그의 신실하신 성품으로 인한 것임, 고전 1:9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하였다. ② 신자 성화(聖化)의 확실성이 하나님의 진실성에 근거한다고 하였음. ③ 우리의 믿음이 그의 신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임.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라고 하였다(히 11:11). ④ 하나님의 진실은 약한 신자들에게 위로가 됨.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라고 하였다(딤후 2:13). ⑤ 하나님은 그의 진실성 때문에 신자들을 무모한 시험에 인도하시지 않으심.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간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하였다. ⑥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죄를 고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다(요일 1:9).
⑵ “우상은 거짓”것임. 우상을 거짓 것이라고 할 이유는 우상 숭배는 감각주의에 의하여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까닭이다. 우상 숭배는 감각주의를 만족시킬 예배 대상을 찾는다. 감각주의는, 영혼의 요구와는 정반대 되는 것을 즐기나니, 곧 유한한 물질세계에서 살 수 없다. 영혼을 물질로 만족시키려는 종교는 모순된 것이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는 사도행전] 가룟 유다의 죽음 회상(행 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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