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마태복음 산상수훈 팔복 설교말씀] 온유한 자(마 5:5)

엘벧엘 2022. 5. 1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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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교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온유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이 땅에서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워서 하나님께 복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자(마 5:5)

 

설교자 : 김서택 목사

 

 얼마 전 한 여성 언론인이 일본의 특파원을 지낸 후 지은 ‘일본은 없다’라는 책은 주로 일본 사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저술된 책입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대단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일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볼 때에는 내어 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지난 번 월드컵 축구를 할 때 전 세계인들이 텔레비전 앞에 붙어서 자기 나라 축구를 열광적으로 응원하고 또 자기 나라가 이겼다고 해서 거리로 뛰쳐나와서 열광하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애국자인 것 같습니다.

 저는 과연 ‘국민성’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만 생기면 그것은 한국 사람들의 ‘국민성’ 때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물론 한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전에 한국 사람의 국민성을 조사한 한 미국 학자는 한국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도저히 정의가 내려지지 않고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환경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같이 좁은 땅덩어리에 그것도 끝임 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다 보면 예측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순발력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마 일본 사람들도 우리 같은 환경에 오래 살다 보면 우리나라 사람 이상이 될 것이며 우리나라 사람들도 전혀 외세의 침략이 없는 고립된 섬나라에서 오래 살면 일본 사람처럼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선진국 사람이라고 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좀 더 ‘길들여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질서와 규칙에 좀 더 길들여진 사람이 문명인이지 문명인이라고 해서 사람의 본성이 달라진다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안에는 여전히 교만하고 난폭한 기질이 있으며 음란하고 추악한 본성들이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문명화된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특성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국민성을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바로 이런 기질과 성품을 가진 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출생이나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성품의 변화 내지는 기질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런 기질이나 특성이 없는 자들은 아무리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한다 하여도 절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 천국에 들어간다는 개념.

 

 우리는 보통 천국이라고 하면 죽어서 가는 가장 복된 상태를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부르던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가로 더욱더 죽은 후에 가는 복락의 상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에게도 ‘당신은 죽어서 분명하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무슨 그런 교만한 말씀을 다 하십니까?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죽어서 심판대 앞에 가 봐야 알지요’라고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대개 우리가 생각해 왔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중심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다시는 고통도 없고 아픈 것이나 시달리는 것이 없는 상태를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하나님 중심의 나라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서 살지만 죽은 후에 더 완전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하여 3 단계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지금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과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천국은 우리 가 보는 물리적인 우주 너머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끔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물리적인 우주는 우리에게는 아무리 무한하다 해도 종이 한 장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물리적인 우주 뒤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 구성이 됩니다. 영토도 없고 군대도 없지만 말씀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토록 성령의 능력이 공급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백성들의 특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대로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의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온 우주를 회복하실 때입니다. 그때 그리스도는 악한 자들과 악한 영들을 모두 영원한 지옥에 넣으시고 우주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영원한 천국과 물리적인 천국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죽어 봐야 안다’고 말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기질 때문에 더 종교적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원래부터 기질 자체가 비사교적이고 무엇인가 혼자서 골똘하게 파고드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더 종교에 심취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안 후 그의 존재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삶에는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기 전의 그의 사람 됨됨이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의 그의 사람 됨됨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을 ‘거듭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율법사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직업 자체가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처럼 사람이 한번 태어난 후 두 번째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어머니의 배가 캥거루의 배처럼 되어 있다면 몇 번씩이나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생겨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기적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똑같은 사람이 전에는 전혀 하나님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다가 어느 한 순간부터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번에 제가 만났던 한 부인은 가족들이 그렇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는데도 불구하고 십 년 동안 버티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갑자기 하나님이 믿어지기 시작하더니 자기가 하나님께 얼마나 울면서 기도하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가끔 새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울부짖을 때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후 하나님을 부르는데 그런 소리를 내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무엇인가 눈앞을 가리던 수건이 벗겨진 것처럼 모든 것이 다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내 죄를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더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부인이 왜 갑자기 저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인이 기도원에 가면 운전을 해 주는데 그것은 함께 은혜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인이 이상해져서 교통사고 날까 봐 간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말하는  것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가끔 진정으로 변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습관에 따라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개 주위에서는 그런 분들이 믿음이 없다고 구박하기 쉬운데 절대로 구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얼마나 힘든 가운데 지금 애를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설교를 몇 달 몇 년 동안 빠지지 않고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은 자는 가치관이나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부터 거듭난 자가 어디 있으며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참으로 거듭나지 못했지만 신앙생활하려고 애를 쓰는 분들을 존경해주어야 합니다.

 좌우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적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알고 찾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주위에 어떤 분이 아직 전혀 신앙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구박해서는 안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박한다고 해서 거듭나게 될 성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사랑해주고 마음으로 이해해 줄 때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거듭난 자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사람의 특성을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임이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의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집에 들어가려면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담을 넘어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그는 도둑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두 가지 경험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는 자신의 부족함 내지 궁핍함을 체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을 보고 애통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바로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며 애통하는 자세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보면 그가 좁은 문을 통과해서 십자가 앞에서 죄 짐을 벗게 됩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니까 담을 넘어오는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 천국 길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느냐고 하니까 그들은 아무 상관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 가다가 어려움이 생기니까 다른 길로 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 없이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자신의 상태를 보고 애통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는 자는 담을 넘는 자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지위나 학벌 같은 것을 다 가지고 천국 길을 가려고 하는 자나 전혀 자신의 상태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예비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온유한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임이요’

 우리는 보통 온유하다고 하면 어떤 것을 생각합니까? 순하고 부드러운 것을 생각합니다. 보통 지독한 것의 반대가 온유한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 대하여 공격적이지 않고 악착같지 않은 것을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온유하다’는 것은 그런 천성적인 성품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래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승부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겨루기보다는 포기해 버리는 편을 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온유하다’는 것은 그런 천성적인 성품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후에 생긴 변화된 성품을 말합니다.

 우선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 것을 다 차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이 세상에 살면서 나의 모든 야망을 다 성취해보고자 합니다. 마치 이 세상은 주인이 없는 빈땅인 것 같습니다. 내가 노력하고 열심히 뛰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기 위하여 열심히 달음질을 합니다.

 제가 처음에 경영학을 배울 때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경영학이라는 것은 말이야 말을 타고 달리면서 아무 데나 말뚝을 박기만 하면 나의 땅이 되는 것이야“ 그대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정말 내가 경영학 공부한 것이 잘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는 대로 공부를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기업도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장사도 여러 곳에 분점을 개설하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잠자는 시간이 아깝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시간이 아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보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주인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고 해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마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여러 개의 그네를 차지한다고 해서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개의 기업을 가진다고 해서 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보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삶의 목표가 갑자기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보잘것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작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인생이 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짧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두 번만 방황하면 이미 나이가 오십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하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깨달을 때 나타나는 겸손한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듣던 말 중에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생은 너무 보잘것없고 하나님은 엄청나게 크시다’라는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더라는 말씀을 봅니다. 모세는 다른 사람이 어떤 식으로 나오더라도 온유한 자세로 그들을 설득하고 이기어내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실제로 하나님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며 하나님 앞에서 인생은 실로 작은 먼지와 같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림 속의 호랑이입니다. 자기가 나름대로 하나님은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앞에서 나는 없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온 세계라도 큰 물동이 속에 들어 있는 물방울 하나에 불과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하나님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나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하나님을 한번 경험하면 자신의 정체성에 심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전에는 내가 우주의 중심이었습니다. ‘천상 천하 유아독존’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한번 알고 나니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런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목표로 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알고 나면 목표 상실 증세가 나타납니다. 이제는 더 이상 꼭 승진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학위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약간 멍한 것 같습니다. 눈에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겠다는 독기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백성은 자기 힘으로 이 세상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들도 예전에는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실컷 살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허탈과 허무밖에 없습니다. 그는 만일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다시 책임지고 살아야 한다면 그 결과는 또다시 완전한 파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운전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운전하는 사람들이 대개 자기 운전 실력을 믿습니다. 그래서 대개 면허를 딴 지 1 년 정도되면 속력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고라는 것은 한순간에 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사고가 생기고 나면 핸들을 운전 더 잘하는 사람에게 맡깁니다. 한번 음주 사고를 크게 낸 사람은 아마도 다시 음주했을 때에는 핸들을 잡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발에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너는 더 이상 네 마음대로 돌아다니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제는 내가 시키는 말만 듣고 내가 지시하는 대로만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사자는 칼을 빼 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가나안 땅은 결코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음란과 우상 숭배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룩한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의 힘으로는 그곳의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만 듣고 따라가면 아무리 죄악 된 곳에서도 죄에 빠지지 않고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잘 받고 돈을 잘 버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승리하는 것은 죄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정직을 지키고 음란하고 추악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한 순간 한 순간을 지켜주시고 생각을 지켜주시며 우리의 마음속에 자꾸 새 마음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시라”

 세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바로 보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의 대개의 사람들은 마음속에 칼을 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한번 우습게 보이면 그다음부터 계속 나를 우습게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부드럽게 보이지만 속에는 언제나 칼을 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잘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허물을 그런 식으로 따지신다면 나는 죽어도 몇 번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의 잘못에 분노를 느낀다 하더라도 사실 나는 그 사람의 일부분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내가 모르는 장점도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나에게는 나쁜 짓을 했지만 그를 좋아하는 그의 가족들에게는 그가 여전히 소중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에 대해서 옳고 그름은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하여 그 사람 인격 전체를 평가하는 일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대에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일 부분밖에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다른 사람 인격 전체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거저 작은 부분에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 한 두 가지를 가지고 상대방의 인격 전체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선악 간에 판단하실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니까 온유한 것입니다.

 

 3.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임이요.

 

 우리에게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약싹 빠르고 욕심이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러분 투기하는 곳에 한번 가 보십시오. 어리숙한 사람들은 거기에 발도 붙여놓지 못할 것입니다. 전부 눈이 번쩍이고 단 하나의 정보라도 남들보다 더 빨리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결국 좋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선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알고 난 후 이전에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목표와 새로 발견한 하나님의 뜻 사이에 혼동과 갈등을 겪기 때문입니다. 마치 전에는 텔레비전 화면이 하나로 보였는데 이제는 둘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무지무지하게 고생을 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거의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절망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방황하는 동안에 모든 것을 다 놓치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동안에 이론적이던 하나님의 진리가 실제적인 진리로 변하면서 진리가 잉카네이션 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삶으로 체득된 진리는 바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하나님께서 내용을 잘 알 수 없는 한 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꿈을 열심히 형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형들은 더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으로 애굽에 노예로 잡혀가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만 가지고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형들은 그를 더 미워했고 더 잔인해졌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꿈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낮아질대로 낮아져서 종으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요셉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애굽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애굽 사람들은 요셉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이 한평생 고민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과 현실 사이의 엄청난 차이였습니다. 분명히 말씀에는 그가 가족들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 있는데 현실은 그가 먼 외국에 노예로 잡혀와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한평생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갈등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시대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가족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는지 고민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의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인 지식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가 없습니다. 명문대 출신들이 사업이나 어떤 큰 일을 하는데 실패하는 이유가 자기 혼자 똑똑하지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지혜나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많이 방황하고 때로는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간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의 말을 들으면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서 그도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실제로 물을 먹이는 것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물가에 데려갈 뿐 아니라 먹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영적인 설득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해서 다른 영혼을 많이 얻는 사람이 당장 많은 땅을 차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다른 것들은 정말 잠깐입니다. 모든 것은 유행을 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건강 프로그램을 가지고 요란하게 인기를 끌던 사람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전혀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유행을 타게 되어 있습니다. 한때 유명하던 것이 한 시대가 지나면 거의 기억조차 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귀에 유명한 사람들이 한 시대만 지나면 거의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지나더라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소중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리 때문에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 사람입니다. 참으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장은 인기를 누리고 유명한 것 같지만 시대가 변하면 어느새 뇌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진정으로 오래오래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람이 귀한 줄 알고 사람 자체를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진리로 인하여 대가를 지불한 사람들이며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엄청난 고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모순된 세상에서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엄청나게 고민하고 방황했던 그 사람만이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이 많은 영혼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까?

 주님은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앞으로 없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기간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까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다 구원하시면 이 세상을 모두 뒤집어엎으시고 완전히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에서 죄와 싸우면서 영혼을 얻기 위하여 투쟁한 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 때 땅 한 평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를 상속하게 하십니다. ‘기업’이라는 것은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세든 사람이 집에 많은 돈을 들여서 인테리어를 했는데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가 투자해서 꾸민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에 한 분은 유치원용으로 건물을 임대해서 많은 돈을 들여서 꾸며놓았습니다. 그는 거의 투자한 돈을 건지지 못하고 나가야만 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줄 알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불타 없어질 세상입니다. 그냥 일정한 기간 세 들어 사는 것입니다. 물론 세든 집도 깨끗하게 사용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주인이 비워달라고 하면 나가야 합니다. 그런 집에 많은 투자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자기 집을 사면 그때 좋은 가구를 산다고 하면서 가구도 헌 가구 그대로 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 모두가 세 들어 사는 세상입니다. 어느 한순간이 되면 모두 다 집을 비워주고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새로운 땅에서 영원한 주인이 됩니까?

 바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지 않던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도 영혼을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자기의 것을 챙기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그 사람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될 때 자기 형제들을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하시면서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에게 줄 성질의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된 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참으로 온유한 자, 이 세상에서 다른 영혼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의 그 고난의 쓴잔을 마신 자, 이 세상에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권리를 아무것도 움켜쥐려고 하지 않았던 자, 이 세상에서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두려워지는 것이 과연 내가 다른 영혼을 위하여 버린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조급해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순서대로 앉게 한다면 과연 주님이 보이기나 하겠습니까? 너무나도 먼 자리에 앉아서. 저는 사도 바울을 보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앞으로 올 세상에서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슬기롭게 투자한 사람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는 바보 같았습니다. 그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중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이루어질 이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을 다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갔을 때 아브라함은 말했습니다. 너는 이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을 다 누렸기 때문에 거기서 고생하는 것이 옳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다 누려버리면 앞으로 올 세상에서 고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온유한 자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세상은 철거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할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을 사랑한 사람이며 가장 위대한 희생을 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 예수님 말씀] 애통하는 자(마 5:4)

 

[마태복음 산상수훈 예수님 말씀] 애통하는 자(마 5:4)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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