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로마서 광복절 주일설교말씀] 나의 민족을 위하여(롬 9:1-13)

엘벧엘 2022. 8. 2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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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민족을 위하여(롬 9:1-13)

 

자기가 속한 국가나 민족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입장이 있습니다. 한 가지의 극단을 민족지상주의라고 할 수가 있다면 또 하나의 극단은 민족이 없는 세계주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민족지상주의란 자기 민족에 대한 맹목적이고 편견적인 집착에 근거한 것입니다. 세계 역사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민족주의는 대부분이 국수주의로 발전해 갑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가 통치하던 나치 독일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인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유대인 대학살을 감행했고 그 결과로써 민족과 민족 사이에 대대적인 전쟁을 초래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이 민족지상주의와 대조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극단이 있다면 그것은 민족 없는 세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족주의의 피해를 극복해 보려는 이상주의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 시도가 성공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뿌리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는 세계주의적 시도가 실패한 대표적 사례가 있다면 소련의 경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얼마전 사회주의 체제의 구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결과는 민족주의적 국가에로의 핵분열 현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건강한 민족관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열방들과 이 세상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나를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기 민족 사회에 복음적이고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가 있어야 하겠다는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세계주의자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의 부르심은 세계를 향한 것이었고 그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그의 일차적인 소명은 자기 민족이 아닌 세계의 모든 열방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단 한 번도 자기 민족, 자기 조국을 망각한 일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선교여행을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에게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고 있는 로마서의 일차적인 독자도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편지를 띄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었던 진한 민족애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8월을 맞게 되고 우리 민족의 유월절인 8.15를 맞이하게 되는데 오늘 우리의 민족사는 대단히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교차로에 서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인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애의 본질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규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민족 구원에 대한 소원을 볼 수가 있고 동시에 바울 사도의 민족 구원에 대한 믿음을 볼 수가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 사도의 민족 구원에 대한 책임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사도의 민족 구원의 소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1절)

로마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인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구원론을 전개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구원이 없이 살고 있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악의 참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본질을 8장까지 전개했습니다.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구원 얻은 성도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버림을 받지 않고 궁극적으로 승리하고야 만다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영광을 확신하면 할수록,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나같이 이 영광스러운 구원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내 친구와 형제와 골육과 이웃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울 자신도 자기의 골육과 친척, 더 나아가서 자기 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스라엘 동족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1절에서 두 가지의 단어로 자기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한 단어는 근심이란 단어이고 또 하나는 고통이라는 단어 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단어 앞에는 각각 큰 근심’,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 큰 근심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치지 않는 지속적인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민족에 대한 구원의 문제였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

여기서 바울이 원하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로마서 101절을 보시면 명백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10:1). 바울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이, 자기의 골육, 친척, 친구, 형제가 구원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 원했느냐 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소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끊어진다’ 라는 말을 주목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대단한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

로마서의 8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동일한 끊는다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했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같은 단어가 9장에 들어와서는 어떤 의미로 써지고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형제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또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내 이웃과 내 민족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소원한다는 의미로 써져 있습니다. ‘끊어진다라는 단어를 쉽게 표현한다면 내가 대신 지옥에 갈지라도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가야 할 지옥을 내가 대신 간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형제들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면 나는 차라리 그것을 소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암 부스는 그 시대의 영국 크리스천들이 왜 전도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답답해했습니다. 복음을 알고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이웃들의 영혼에 대해서 무관심한 그 시대의 크리스천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어느 날 하나님, 영국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눈을 열어 지옥을 볼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면 우리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붙들고 목놓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암 부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베풀어 준 놀라운 은혜를 간증해야 하며 동시에 이 구원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경험해야 할 지옥의 참상을 계속적으로 생각해 보는 일이다.”

바울 사도는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내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다. 그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것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 이웃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는 끊을 수 없는 자이지만 내가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들이 가야 할 지옥을 대신 갈지라도 내 희생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나는 그들의 구원을 소원한다.” 아마도 이 고백을 하면서 바울은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자주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했기 때문에 교인들이 싫어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고 부정적이라고 압력을 가해서 마침내 목사님께서 사임을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 새 목사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교인들은 새 목사님을 통해서 새 메시지가 나올 것을 기대했었는데 마침 오신 새 목사님도 가장 좋아하는 설교의 제목이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교인들이 꼭 같은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들으면서도 목사님을 쫓아낼 생각을 안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상해서 묻기를 먼저 목사님께서 지옥 설교만 한다고 해서 목사님을 바꾸었는데 왜 새로 오신 목사님께서도 지옥 설교를 하는데 가만있느냐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대답하기를 전에 지옥을 설교하던 목사님은 매우 담담하게 때로는 위협적으로 설교를 했는데 이번에 오신 목사님은 지옥 설교를 하시긴 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설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의 모든 영혼을 책임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 골육, 친척, 형제, 나와 가까이 피부를 맞대고 살게 된 사람들을 향한 어떤 부담과 책임감을 느끼신다면 오늘 바울의 고백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그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느끼고 있는 이 기쁨과 환희를 그들이 느낄 수가 있다면, 그들이 이 구원의 삶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내가 차라리 지옥을 경험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 안타까운 자기의 사랑하는 민족을 향한 민족 구원에 대한 바울의 소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얼마나 우리 주변의 이웃들과 형제들을 향하여 바울 사도와 같은 부담을 갖고 있을까요?

 

둘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민족구원에 대한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아무도 나를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한번 구원받은 성도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구원의 자리에 세워 그들을 향한 계획을 완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백과 함께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던 청중들 가운데 자연히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번 선택하셨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지금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하고 살고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라는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9장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두 번째 부분인 9장과 10, 11장은 바로 유대인의 구원 문제와 하나님의 주권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민족에 대한 구원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다스리고 주관하는가 하는 주권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맞습니다. 오늘 내 민족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고 메시아를 등지고 살고 있으며 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간섭하셨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내 민족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광을 경험하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내 민족에 대한 구원을 믿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고백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권론과 함께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예정론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우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바울은 여기서 개인의 예정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관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정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즉 한 개인이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느냐 아니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민족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4절과 5절에서 먼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던 종교적인 특권들을 열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신앙적으로 축복하셔서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4-5).

어떤 특권들을 열거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 아니라 나중에 양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고 많은 축복의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거기다가 육신으로 말하자면 메시아도 유대민족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런 굉장한 축복을 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버리실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민족의 역사를 섭리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6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종교적인 언약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백성들과 언약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 민족을 선택하셔서 메시아를 주시고 이 민족을 위대하게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현재의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 때문에 폐기될까요?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난해한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너무 지나치게 묵상하다가 완전히 잘못된 분들도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3)

어느 두 신학자가 이 구절을 가지고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한 신학자가 말하기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할 수가 있단 말이냐?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했더니 다른 신학자가 말하기를, “너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다음 부분인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야곱의 일생을 보십시오. 사랑받을 만한 일을 했습니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야곱,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자기의 아버지까지도 속였던 야곱을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이 사랑했다는 이 뜻이 무엇일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한다면 이 말씀은 야곱이나 에서, 개인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맥 전체를 통해서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대표자로서의 야곱과 에돔 민족을 대표하는 대표자로서의 에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에서를 결코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축복하십니다. 물론 야곱의 가계를 통해서 메시아를 주시고 특별히 그 가계를 사용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에서를 저주하시거나 버리신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문맥에서 나오는 미움사랑의 단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사용하는 소위 히브리의 문법적인 시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다른 예를 복음서에서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도리를 가르치실 때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으신 나머지 정말 여러분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와 자기 목숨을 미워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두 개의 상반되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강조하려는 한 단어를 부각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반대의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그의 최고의 사랑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한다면 내게 있어서 부모와 형제와 처자를 사랑하는 사랑은 상대적으로는 미운 정도밖에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도 에서를 문자 그대로 미워하셨다거나 혹은 에돔의 자손을 미워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가계와 이스라엘 자손을 특별히 쓰시려는 계획을 가지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였습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는 지금 왜 이 얘기를 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편지를 쓰던 그 시대에 있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런 행실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도 전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특별히 이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잘하느냐 못 하느냐의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이 백성을 계속해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백성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속한 내 민족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내 민족을 지금까지 간섭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어느 날 이 민족 속에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다시 우리 민족에게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베풀어 주시고야 말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구원에 대한 바울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영기 장로님은 가나안학교에서 훈련을 시킬 때마다 큰소리로 이런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나는 애국가를 주신 것이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는다. 이 민족이 똑바른 정신으로 애국가만 부를 수만 있다면 이 민족은 산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 역사를 지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가 있다면 이 민족은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바울 사도와 동일한 심정으로 우리의 표류하는 역사 그리고 불안한 역사의 현장에서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하는 민족, 이 나라 이 겨레,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이 전개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민족 구원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본문에서 이 민족 구원에 대한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원할 때 그 소원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책임의 감당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소원은 소원으로 끝나고 맙니다. 예컨대, 통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민족의 한 맺힌 소원인 통일, 우리는 얼마나 이 통일을 부르짖으며 소원해 왔나요? 그러나 아직도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통일이 우리의 역사 속에 정말 실현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통일을 위해서 어떤 책임 감당과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가지고 민족의 통일을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기류가 생겼습니다. 독일의 통일 이후에 몸살을 앓는 통일 후유증의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통일 비용이 너무 비싸다. 통일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정말 통일을 소원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신중히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통일을 진심으로 소원한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통일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 전체가 지금보다 살고 있는 수준보다 반쯤 줄여야 할 것을 결심해야 하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민족 역사의 슬픔인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통일의 조국을 성취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원은 말하지만 책임의 자기에서는 회피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북한 땅의 민중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또한 그들의 육체적인 굶주림 못지않게 더 커다란 굶주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굶주림입니다. 적어도 북녘 땅의 내 사랑하는 겨레의 95% 이상은 저들의 생애 속에서 단 한 번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를 들어보지 못한 민중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안타까운 모습으로 육체의 굶주림보다 더한 굶주림으로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제일 자랑스럽게 사용하기 좋아하던 말은 우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집, 우리 식구, 심지어는 아내도 우리 아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나라”등 그만큼 우리에게는 공동체 의식이 소중했습니다. 그러다가 서구의 개인주의 문명이 들어오면서 우리는 어느 사이에 이기적인 민족으로 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라는 의식은 우리 가정 바깥에는 적용이 안됩니다. 한국 사람이 공공의식이 없는 이유는 자기 집만 벗어나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휴가철에 도처에 버려진 쓰레기, 자기 집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우리의 집 안에서만 적용됩니다. 집 바깥에는 절대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도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들의 구원 문제를 위해서는 기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파트의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의 구원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들은 내 골육이 아닌가요? 그들은 내 친척이 아닌가요? 그들은 내 형제가 아닌가요? 그들은 내 이웃이 아닌가요? 바울의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내 골육과 친척의 구원을 위하여는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에게 있어서 그 마음속에서 지울 수가 없는 두 가지의 단어가 있었다면 하나는 복음이고 또 하나는 민족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틴 루터에게 누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사상(주의)은 무엇입니까?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죽기까지 복음주의, 나는 죽기까지 독일 주의”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코스모폴리탄이요,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세계선교를 꿈꾸었던 바울 사도 그러나 동시에 그 가슴속에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자기의 조국, 자기의 골육, 자기의 친척, 자기의 이웃을 향한 이 애타는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 골육이, 내 친척이, 내 형제가, 내 이웃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이것을 소원한다.” ,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우리 민족, 우리 역사,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이런 구원의 부담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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