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로마서 3장 성경 복음 설교말씀] 다 죄 아래 있다(롬 3:1-18)

엘벧엘 2022. 9. 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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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죄 아래 있다(롬 3:1-18)

 

영국에서 한 청년이 장난 삼아서 London의 유명인사 20명을 뽑아서 명단을 만든 다음에 일제히 똑같은 시간에 꼭 같은 전문을 발송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 났으니 속히 피신하기 바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인사 20명이 같은 시각에 일제히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분명합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한 말씀을 그대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위대한 복음의 책인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그 첫 장에 먼저 찬란한 헬레니즘의 문화 위에 건설된 대 로마제국의 국민을 향하여 그 죄악을 폭로합니다. 로마인의 죄악은 그 당시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모든 이방인들의 죄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자랑했던 문화, 그들이 자랑했던 정치, 그들이 자랑했던 그 사회와 상관없이 그들이 얼마나 깊은 불신앙과 부도덕의 죄악 속에 침륜되어 있는가를 고발했습니다. 이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그다음에 로마서 2장에 들어가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이들은 로마인이나 헬라인에 비해서 매우 도덕적이고 또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논증하고 고발했습니다. 이것이 2장의 내용입니다.

이제 3장으로 들어왔습니다. 3장에서 바울은 일종의 유대인, 혹은 헬라인, 로마인을 망라한 죄에 대한 결론을 내립니다. 3장의 결론의 요약을 우리는 39절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면 어떻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선언하였느니라다 죄 아래 있느니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바울 사도는 3장에서 그가 어떻게 이 결론에 도달하게 된 관점을 두 가지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모든 사람이 다 예외 없이 죄인일까요?

첫째는, 죄인이 아니라는 변론이 성립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만날 때에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종교적일수록 전도를 해 보면 그들이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죄인이라는 딱지가 그 사람의 자존심이나 혹은 종교적인 자존심을 매우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서 거룩한 죄인의 자존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장에서 바울 사도가 유대인의 죄악을 고발할 때, 나는 하나님의 선민이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유대인의 죄악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었을 때 유대인들이 느꼈던 심정이 아마도 이런 사람들의 심정과 동일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방인들과 같은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3장의 서두에서 그들이 죄인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항변하고 있는 유대인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일종의 가상적 변론으로 전개합니다. 그는 아마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에게서 이와 같은 질문을 사실상 들었고 바울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똑같은 답변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그들이 죄인 됨을 지적했을 때 우리가 이방인과 꼭 같은 의미에서 죄인일 수는 절대로 없다고 항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변론의 근거를 우리는 세 가지로 크게 요약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 특권을 그들은 변론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3장의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만약 이방인과 똑같은 죄인 된 사람이라면 유대인이라는 특권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할례의 유익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사실상 바울을 향해서 던질 수 있었던, 그리고 실제로 바울이 직면했던 질문일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2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바울은 유대인에 주어진 신앙적인 특권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라는 것을 바울이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꼭 이런 얘기를 덧붙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게 된 것은 놀라운 특권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신들은 이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바울은 그들에게 던지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만 해도 플래시 라이트(손전지)가 매우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에 산을 행군하는 군인들에 있어서 그들이 손 전지를 지급받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들에게 손전지가 주어져서 불을 켜서 어두운 밤길을 행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 손전지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손전지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용하지 않거나 혹은 사용할 줄을 모른다면 그 주어진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토라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이 굉장한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특권이 당신들의 삶을 하나님이 기대하는 삶으로 만들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항변의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후에 이 백성들을 통해서 행하시고자 하는 많은 언약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될까요? 이 민족을 통해서 이루시겠다고 언약하신 그 하나님의 계획들과 약속들은 어떻게 될까요. 무효화될까요? 그렇다면 그 약속들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은 바로 이 문제를 3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오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서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미쁘심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성실성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 백성들을 통해서 하시겠다고 하신 그분의 계획들은 무효화되는 것일까요? 바울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하신 대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실성을 높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하신 대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실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정당화해 주지는 결코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에게 제기했던 또 하나의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선의 도구로서 그들이 쓰임을 받고 있다는 근거로 그들이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항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 번째의 논변은 일종의 궤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울과 얘기를 하면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앙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고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고, 또 그들 가운데도 많은 악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코너에 몰렸습니다. 그러니까 궤변을 제의합니다. 이 궤변은 일종의 소피스트적인 궤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하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상대적으로 나타났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욱 드러날 수가 있었다면 우리의 악함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 수가 있느냐는 논거입니다. 그것이 5절과 7절과 8절을 통해서 계속됩니다.

그러면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오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여러분 우리는 비슷한 논리를 통일교의 교인들을 만나서 전도해 보면 그런 궤변을 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통일교의 교인들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반론합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계획이고 예정이라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룟 유다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가룟 유다의 반역과 배신까지 사용하셔서 십자가의 구속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반역과 배신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쉽게 얘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어떤 이상한 친구가 제가 못마땅했던지 강단으로 뛰어 올라와서 제 안면을 있는 그대로 가격을 하고 때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제가 워낙 철면피가 되어서 까딱하지 않고 형제여, 저기 가서 앉아요. 나는 형제를 용서할 수 있어요. 끝까지 설교나 듣고 얘기하십시다라고 아주 태연하고 담대하게 제가 그 사람을 받아 주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여러분이 꽤 감동을 받으시겠지요? 그 사람이 나를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흥분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하여 용서하고 오래 참고 용납하는 인격수양의 도구로 삼았다면 그것은 저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저를 때린 사실이 정당화될 수가 있을까요? 물론 여러분들이 우리 목사님 대단하시다고 감동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악행까지 사용해서 내 인격수양의 도구로 또 주께 영광을 돌리는 사건의 도구로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저를 이유 없이 때린 행위는 정당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똑같은 논리를 여기서 전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그 불의한 것이 용서될 수가 있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결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이 그들이 이방인과 꼭 같은 죄인으로 분류될 수 없다는 모든 변론이 무효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죄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과 꼭 같지는 않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는 변론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가 없다면 그 많은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죄인입니다. ‘다 죄 아래 있느니라라는 성경의 엄격한 판단과 하나님의 선언 앞에 누가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그들이 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를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죄인 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문을 10절에서 12절까지 읽어보시면 우리의 죄인 됨에 대한 일반적 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의인도 없고 구도자도 없고 선인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대적인 비교에서는 의인도 성자도 있을 수가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관점일 뿐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의인도, 진정한 구도자도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자고로 서양에서는 사람들이 가장 우상적인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이 세 가지의 종류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의인이요, 두 번째는 위인, 세 번째는 성자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위인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대신 구도자란 개념으로 바울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세기까지만 해도 구도자들-진리를 찾는 자들을 위대한 사람(위인)으로 삼았습니다. 구도정신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는다든지 진리를 찾는다든지 위대한 가치관을 추적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까지만 해도 구도자는 굉장한 위인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바울의 선언 앞에 즉각적인 이런 반박이 가능합니다. “아니, 수많은 철학자들이 신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수많은 종교인들이 진리를, 절대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입니다. 칼. 바르트(K. Barth)라는 신학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상이다. 사람들은 우상을 찾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했습니다. 철학자들이 찾고 있는 대상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들의 지성의 만족을 위한 신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범속한 사람들은 단순히 자기들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에 불과합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 그리고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 여러분이 찾고 있는 하나님은 그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단순한 우상일까요?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찾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한 우상을 찾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세 가지의 단어를 신용하지 않는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Africa의 람바레네의 성자 슈바이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우리에게 빛을 던져 준 위인인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원주민과 끊임없이 불화와 갈등을 겪었으며 자기가 치료하는 환자들로부터 매우 냉정적인 사람이며 그들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슈바이처의 다른 전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경의 권위를 격하시킨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던 전기들도 있는 것을 아시는지요. 이것이 슈바이처의 다른 면모입니다.

우리가 미국 여행을 할 때에 어린아이들을 가진 부모님들은 예외 없이 디즈니랜드를 찾습니다. 우리는 Florida에 가서 Disney World를 방문할 때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어린이에게 꿈을 준 Walt Disney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에 대한 신화적인 많은 아름다운 자서전들이 써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Mark Elliott라는 사람이 Walt Disney에 관한 새로운 전기를 썼습니다. “평생을 FBI의 비밀요원으로 지냈고 유대인에 대한 각별한 편견을 갖고 반유대주의 운동을 벌였으며 철저한 알코올 중독자로서 밤을 지새우면서 괴로워했던 사람”-그의 이런 다른 얼굴을 여러분은 접하셨는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씀하시며 성경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선언 앞에, 이 하나님의 진단 앞에, 이 창조주와 심판자의 진단 앞에서 누가 예외임을 말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만약 참으로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일 것입니다. “나의 죄악성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 속에 있는 부패성-칼빈의 말처럼 전적으로 부패한 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래도 내 안에 있는 연약성과 아직도 존재하는 부패성을 알기에 끊임없이 성령의 지배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한 훈련 속에 살아가는 훈련의 사람”- 이런 사람은 제가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의 사람입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 이런 죄인들에 대한 일반적 서술을 했던 바울은 13절에서 17절까지 죄인들에 대한 구체적 진단을 시작합니다. 이 진단의 내용을 간단히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다음은 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세요. 그러면 죄인 됨이 스스로 자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고 있는 말소리를 끊임없이 들어보세요. 다듬어진 말 말고 무의식 속에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어보세요. 거기에 섞여 나오는 사람들의 진실을 보세요. 사람들의 행동을 보세요.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여기 그들의 언어 속에 그들의 행동 속에 나타난 사람들의 죄악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3절부터 17절까지 바울 사도는 특별히 두 가지의 죄악을 집중적으로 고발합니다.

첫째는 언어의 죄악이며 둘째는 행동의 죄악입니다. 왜 바울 사도는 언어의 죄악을 먼저 말할까요? 언어는 마음의 거울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어느 사이에 내 속에 나를 증언하는 그 말들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읽어 보시겠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언어의 통로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관찰해 보시면 먼저 목구멍을 얘기하고 그다음에 혀, 입술, 입 순서로 언어가 나오는 통로를 추적한 것입니다. 시작이 목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열린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방에 가보면 그 무덤의 입구가 한국처럼 흙으로 덮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입구를 돌로 막아 놓습니다. 중동 같은 열사의 뜨거운 사막지방에서 그 속에 있는 시체가 얼마나 썩는 냄새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돌을 굴려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속에서 썩는 악취냄새가 풍겨 나옵니다. 여러분, 이따금씩 같지 않은 말, 더러운 말, 한심한 말, 짜증과 미움과 시기와 불평과 중상을 쏟아 놓고 있는 사람들의 입을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겉으로는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지만 속으로는 항상 또 무덤 열렸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다음에 사도 바울은 행동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대표적으로 행동의 죄악을 말하면서 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까요? 그 다음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여기서 파멸이라는 단어는 파괴라는 단어로 다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며 하는 일이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어떤 사람을 살인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러나 나 때문에 가슴 상하고 나 때문에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 때문에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고 나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상처를 주어서 피를 흘리게 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요. 사람들은 인간을 생산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매우 위험한 파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날 인간의 문명이 이룩해 놓은 거대한 산업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자연계가 파괴되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이 산업화의 대가로 지불하고 있는 끔찍한 고통의 세계를 여러분 지켜보십시오.

지난번 우리가 수질오염사태를 겪었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뿌린 씨를 우리가 거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문명과 건설의 이름으로 우리가 파괴해 온 이 잿더미, ‘인생 그가 가는 그 길에 파멸이 있고 고생이 있다는 말씀이 사실이 않은가요? 마지막 절은 그 이유를 지적합니다. 사람들이 언어에 있어서 행동에 있어서 이 죄악속에 빠진 자명한 죄인 됨의 이유를 마지막 절에서 지적합니다. 18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저희의 눈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내 존재를 지배하고 있었더라면 사람들은 다르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오십시오. 오늘 이 말씀 앞에 예외일 수 없는 죄인 됨을 주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보여 주셨다면 그 하나님 앞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신가요? 그러나 두려우신 심판의 하나님이 동시에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복음을 알고 계신가요? 바울은 지금 이 복음을 말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놀라운 조화가 십자가의 사건인 것을 아시나요? 죄인들이 피할 곳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십자가 앞입니다. 옛날 구약성경에 자신의 죄를 인하여 나갈 길이 없었던 그 사회 속에서 용납될 수 없었던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의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이 도피성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마다 용서를 받습니다. 새로운 삶을 경험합니다. 십자가는 도피성입니다. ‘다 죄아래 있느니라라는 선언 앞에 예외일 수 없는 나, 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었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그의 피를 흘려 나의 죗값을 지불하신 십자가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 주님 앞에 오십시오. 거기에 용서가 있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 이 주님 앞에 와서 그분이 주시는 용서와 그분이 베푸시는 새 생명을 체험하고 ,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날 용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 속에 주님을 향하여 삶을 바꾸게 된 이 은혜, 이 경험,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 저와 여러분의 경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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