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장 은혜 설교말씀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고 칭해 주셨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롬 4:1-13)
소위 현대적인 학문이 발달되면서 사람들은 한 분야를 연구하며, 한 단계의 연구를 마무리할 때마다 소위 논문이라는 것을 쓰게 되었습니다. 논문을 써 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논문작업에 있어서 실질적인 작업가운데 하나가 인용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논문이라는 것은 인용의 짜깁기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인용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나보다도 더 권위가 있는 사람들의 한 말이나 연구 결과를 인용해서 내 주장이나 나의 의견을 보완하고 강화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이런 학문활동의 경향은 설교하는 강단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시면서도 여러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는 습관이 도래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초기 야사에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돌아온 어떤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시골교회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이 분의 설교는 저 유명한 철학자나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엮어졌습니다. “발트는 말하기를, 볼트만은 말하기를...”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싸르트르는 말하기를, 키에르 케골은 말하기를, 니체는 말하기를...” 그리고 예배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이 많으신 장로님 한분이 목사님에게 소감을 피력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오늘 우리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매우 유식하게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두가지가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시자, “그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셨답니다. “그 첫째는 그 많은 분들을 인용하셨는데 목사님은 진작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한 번도 얘기하지 않으셨고, 둘째는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장로님이 말씀하셨다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권위가 있는 사람들의 인용구절이나 사례가 일반적 청중들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4장에 들어오면서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의 사례를 열거합니다. 그 사례를 인용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편지를 썼을 때 로마서를 받는 일차적인 독자는 바로 로마에 살고 있는 소위 유대인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유대인에 있어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 가장 권위 있는 사람 하면 누구를 들을 수가 있을까요? 바울사도는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 이 두 사람의 사례를 열거하면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함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의 의미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의 사례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를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라는 장소에서부터 팔레스타인(가나안) 땅으로 모험적인 이민을 성공시킨 사람이었습니다. 불모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의 첫 번째 개척을 시도한 뉴프론티어. 평생을 통해서 그의 삶 속에 결정적으로 지적할 수 없는 어떤 흠도 없었던 매우 도덕적인 사람. 단순하고 직선적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네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이 축복을 받았던 사람. 지상에서 가장 유익한 독특한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서 가장 숙명적인 아랍민족들의 동시조상이었던 이 사람, 동시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 많은 크리스천의 믿음의 조상으로 동시에 추앙을 받았던 이 사람 아브라함. 이런 아브라함을 소개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런 놀라운 이력서와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타당한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사람의 배경을 소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부여될 수 있는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이 모든 놀라운 타이틀과 화려한 삶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써는 하나님 앞에 절대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아브라함, 이 잘난 아브라함, 이 대표적인 아브라함이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었다면 여러분과 저 가운데 자신의 행위나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는 사람이 도무지 존재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 중의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율법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이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해 보시면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는 구체적인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구체적으로 그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쓰인 율법으로 전달했던 사람은 모세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나중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때에는 율법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분명히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13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러면 또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얘기를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종교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그 할례를 받음으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었다면 그것이 아브라함의 구원에 있어서 할례가 중요했던 한 조건이 아닐까요? 그러나 본문의 9절 이하에 보시면 바울사도는 무엇을 지적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창세기 17장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에 먼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9절과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된 것이 할례를 받음으로 써냐 아니면 무할례시냐? 정답은 무할례시입니다. 그는 할례를 받기 전에 그가 참여했던 종교적 의식과 상관없이 먼저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본문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대상에 그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았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의 대상이었던 하나님,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긍휼 때문에 그 구원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방편 혹은 채널에 불과합니다. 은혜의 뜻이 무엇이죠?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편에서의 일방적인 호의입니다. 본문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러므로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절을 보십시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제가 만약 제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재산이 다 떨어졌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할 수 없이 제가 어떤 공장에 가서 저를 하루만 고용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십만 원을 받았다고 해 봅시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제가 받은 십만 원은 삯입니까? 은혜입니까? 만일 그것이 노동의 대가로 받은 것이라면 그것은 여전히 삯입니다. 일한다고 했지만 저는 하루종일 공장에 와서 맴돌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장의 공장장이 제가 좀 아는 분인데 저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서 만약 그 돈이 없으면 꼼짝없이 굶을 수밖에 없는 우리 집안 식구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제가 하루종일 일을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저에게 하루가 지난 다음에 십만 원을 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것은 삯입니까? 은혜입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인 것입니다. 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만한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사람의 어떤 일도 어떤 선도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제가 이 일을 했기 때문에 이 일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은 마땅히 저를 받아주셔야만 합니다”라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할 수도 없고 해 봤자 우리가 해 놓은 그 일이 주님 앞에서는 별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일한 것이 없이 일을 할 수도 없었는데 그런 경건치 아니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그분을 우리가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못 접근하시면 나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더니 나를 무조건 의롭게 봐준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매우 불공평한 어떤 분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인일지라도 그분 앞에 나온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도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만 강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의 사건을 보시면 하나님이 어느 날 별이 빛나는 찬란한 밤에 아브라함을 바깥으로 이끌어내시고 아브라함에게 별을 세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 자손이 앞으로 이와 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한 명의 자식도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그 수많은 자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이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만 가지고는 아브라함이 저에게 자손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과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은 알 수가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그 설명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가 있냐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3장 8절을 보시면,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모든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복을 받습니까? 이것은 구체적으로 아브라함 그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자손들이 어떻게 인류에게 축복이 될까요? 갈라디아서 3장을 계속 읽어보시면 16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아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이 무조건 많은 자손을 둘 것이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자손 가운데서 한 중요한 자손이 올 것인데 그 자손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가운데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자신의 선행과 자신의 결심만 가지고서는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는 무력한 인류, 죄속에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가운데서 그리스도, 메시아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내용을 우리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네 후손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자를 보내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의 최선, 우리의 행함, 우리의 의가 아직도 우리를 구원하기에 무력하고 부족했던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메시아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함과 죄 사함이 가능할 것이라는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다른가요?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믿음이 아닐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장차 보내주실 메시아를 믿었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이미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죄악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3장으로 다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7절에 보시면 바울사도는 놀라운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리와 아브라함 사이에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감히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찌어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한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던 동일한 믿음이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 아브라함이 붙들었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똑같은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었던 아브라함,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그토록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함이 그를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었음과 동일함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는 줄을 믿으시나요?
■ 다윗의 사례
두 번째로는 다윗의 경우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었던 케이스를 예증하기 위해서 바울사도는 두 번째로 다윗의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면 하나는 아브라함이고 또 하나는 다윗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시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누구입니까?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것은 다윗의 별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진 목자였습니다.
그 백성을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다윗, 그는 위대한 경륜의 지도자였습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던 민족을 통일했던 위대한 통일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노래와 악기는 귀신들을 쫓아냈고 그 민족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백성들은 그의 시를 읽으면서 고난의 역사와 어두움의 터널을 승리로 지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그 수많은 시편의 대부분에는 다윗의 시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합니까? 이런 다윗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일까요? 오늘 우리가 강조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런 존경을 받아 마땅한 다윗도 그의 행위와 그의 업적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존경받는 지도자요, 대통령이요, 한 나라의 국부요, 역사의 위기에서 그 민족을 구출한 구국의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그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한 사람이었고 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십시오. 본문의 6절부터 보시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불법과 죄란 말이 나옵니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한 사람이었고 죄인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생애 가운데서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면 어느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자기 민족을 위협하던 골리앗에게서 자기 민족을 극적으로 구출했을 때, 그때 다윗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아니, 남과 북으로 나눠져 있는 한 민족을 그가 통일하고 국민들에 의해서 그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추대를 받는 순간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러나, 본문은 그때가 다윗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다윗의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윗의 불행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다윗은 내면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왕이요, 지도자요, 음악가요, 시인이요, 추앙을 받는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내면적으로는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이런 불행은 그 어느 날에 있었던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됩니다. 자기가 거느리고 있었던 부하의 처를 간음했던 사건입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빼앗었던 그 사건으로 다윗은 더욱 불행해졌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과 자리를 이용해서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그 사건을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완전범죄의 성공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후에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어졌고 노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의 다윗의 심정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고백이 시편 32편에 나타나 있습니다. 3절과 4절의 고백을 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자기 마음속에 경험하고 있었던 죄책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입니다. 이 견딜 수 없는 마음속의 안타까움과 갈등과 영혼의 황폐함과 육체적인 쇠약도 함께 있었음을 이 고백을 통해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기의 친구였고, 선지자였던 나단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 친구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와서 그가 지금 고독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기 불행의 원인에 직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해결되지 못한 죄였습니다. 비로소 그의 도움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그 순간,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용서를 확인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윗은 자기 생애에 처음으로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 행복에 대한 고백을 시편 32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 시편의 처음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허물의 사람을 얻고 그 죄의 가림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시작한 후 5절에 보십시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로마서의 본문으로 돌아오십시오. 4장 7절의 말씀이 시편 32편의 인용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라고 했는데 여기 중요한 단어가 둘이 나옵니다. 첫째는 사하심이고 둘째는 가림입니다. 사하신다는 단어는 본래 원어에서는 없앤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자기 죄가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기록을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갈등입니다. 둘째로 가림입니다. 죄인들은 자기가 죄를 범했다는 그 자체보다도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죄가 노출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합니다. 그래서 가려보려고 노력합니다. 닉슨도 감추어 보려고 하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요즘엔 클린톤대통령이 또 감추어보려고 하다가 화이트 워터사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핵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가리어지지 않습니다. 가릴 수 없는 죄문제, 없앨 수가 없는 죄문제.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의 죄를 완전히 없애 주실 수가 있다면, 그리고 만약 여러분과 저의 죄가 완벽하게 가려질 수 있는 방편이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음일까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 일 년 중의 가장 놀라운 날이 있다면 그것은 속죄일입니다.
이 속죄일날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상징적인 사건을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해마다 이 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이 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양이나 염소를 한 마리 선택합니다. 이 양이나 염소를 아사셀 양이라고 불렀습니다. 대제사장은 이 속죄양이나 염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다. 그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이 속죄양이나 염소에게 옮겨진다는 표시입니다. 그다음에 그 양으로 하여금 광야로 가게 합니다.
그러면 온 백성들은 그 속죄양이나 염소 한 마리가 광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주목하다가 드디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면 백성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집니다. 그것은 죄를 지고 그 양이 가는 모습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해서 어느 날 역사의 수평선에 등장한 예수님을 가리켜서 요한이 증언했던 인상 깊은 메세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의미를 기억해 보십시오.
이 속죄일날 제사장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을 합니다. 이번에는 양 한 마리를 가지고 장막 안에 들어가서 번제단 앞에서 그 양을 각을 떠서 잡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취해서 성소를 거쳐 휘장을 열고 지성소안에 들어가서 언약궤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언약궤란 상자였는데 그 상자 앞에 뚜껑이 있습니다. 그 뚜껑을 가리켜서 시은소, 혹은 은혜의 보좌(Mercy Seat)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그 언약궤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는 종종 언약궤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어보자마자 그들은 즉사를 당했습니다. 언약궤 속에는 3가지가 들어 있었는데 첫째는 깨어진 돌-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했음을 보여주는 돌이 들어 있었고, 또 하나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하나님의 권위 앞에 거역하고 도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만나였습니다. 이 만나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 광야를 행진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나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도리어 원망의 대상으로 바꾸고 있었던 범죄를 그들은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표적 3가지의 범죄-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린 범죄,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던 범죄, 하나님의 축복을 도리어 원망으로 바꾸고 있는 범죄였습니다. 다행히 이 범죄의 내용물을 담고 있는 언약궤의 뚜껑은 닫혀 있습니다. 닫혀 있는 뚜껑에다 대제사장이 피를 뿌립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피만 보입니다. 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1장이 시작되면서 사도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위하여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언약궤를 우리의 마음과 한번 비교해 보세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뚜껑을 열어 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보실까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그의 율법을 깨뜨린 범죄, 그의 축복을 원망으로 바꾸고 있었던 범죄, 그의 권위를 냉소적으로 경시하고 도전했던 우리들의 범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했을 때, 날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보혈로 피뿌림을 얻은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은 무엇밖에 보시지 않습니까? 피입니다. 여기 우리의 죄가 완전히 가려진 하나님의 완전한 처방을 믿으시나요? 진정 우리들의 죄가 그분 안에서 완전히 해결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처방을 감사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된 행복 - 그 행복이 당신의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성경주석 회개 말씀]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 말씀(마 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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