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D.M. 로이드존스 설교] 복음의 빚진 소명

엘벧엘 2024. 3. 3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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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존스 설교 중에서 복음의 빚진 소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하는 은혜를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빚진 소명

 

우리에게 진리가 있으며,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 소명-복음의 우주적인 제시-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런 외족 혹은 일반적인 소명이 모든 이들에게 제공되지만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자들로 남아있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또한 남아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어떤 새로운 구분이 분명하게 들어옵니다. 따라서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입니다. 이런 두 집단 사이에 있는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제가 보기에 모든 사랑에게 주어진 복음의 소명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효과적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로 언급되었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집단은 자신들이 주님을 다시는 듣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떠나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아직 떠나지 않은 다른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7-68). 한 집단은 불신하며 집으로 돌아갔고, 다른 집단은 완전히 동일한 것을 들었으면서도 주님과 함께 남아서 더 듣기를 원했고 그것을 즐겼습니다. 이런 차이는 무엇이 만들었을까요? 이런 방법으로 신자들의 경우에서 말씀은 효과적이었고 그 말씀을 거절한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효력있는 소명에 대한 성경의 진술

이것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외적 소명에 더하여 이런 효과적 소명이 있다는 것과 구원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효과적인 소명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확립하는 성경 말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첫째, 로마서 8:28-29은 바로 이것에 대한 위대한 진술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바울은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그렇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구원받은 자들을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 진술이 바로 효과적인 소명입니다.

둘째, 고린도전서 1:2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시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그들은 단순히 성도들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반복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리고 주목하십시오 -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어리석음인데, 바로 이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을 사도로 다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셋째,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주어진 위대한 진술을 봅시다. 그는 그리스도인 신자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넷째, 요한복음 645절에서도 다음과 같은 진술을 봅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이런 정보를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그것과 더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즉 성령님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을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적인 역사는 이런 이들에게만 발생합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께 왔던 자들은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았던 자들,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자들 뿐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적인 진술입니다.

63-65"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주님께서는 계속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런 말씀에 더하여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그들은 외적 소명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였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중거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르침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껍질, 즉 외적인 말씀만 가지고 있었을 뿐 영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계속 이렇게 증거 합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이런 자들에게 내적 소명을 주시지 않았기에 그들은 주님께 올 수 없었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내적 소명을 받은 다른 이들은 남아서 그것을 즐거워했습니다.

다섯째, 에베소서 1:17.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달리 말하자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지식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또한 빌립보서 2:12-13절에서도 바울은 동일한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내적인 사역을 행하시며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행할 수 있습니다.

다른 진술

이것을 완전하게 진술하는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용어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아 그 결과로 분리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교회라는 용어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 자체가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인한 어떤 것이 있다는 진술을 성립하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그 동일한 메시지가 다른 이들에게 갔으며, 그 결과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교회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외적소명과 내적소명이 차이

외적인 부르심과 이런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 대답은 이런 부르심은 내적, 영적 부르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외부로부터 어떤 사람을 부르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모든 사람을 부르는 외적인 소명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에 더하여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며 효과적인 소명이 되는 내적인 소명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소명과 내적이며 영적인 소명 사이에는 이런 대조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필 다음 단계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그렇게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들 내부에서 있는 역사 때문이라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왜 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절대적으로 본질적입니다. 이런 내적인 역사가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증거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절).

자연적인 사람들-"육을 따라 난 자들"-은 성령의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들을 미련하고 따분하며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런 성령의 일들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여 그런 일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이것이 마지막 주장입니다-"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이것은 매우 강력한 진술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은 타락의 결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적대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룰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제가 볼 때 이것이 바로 최후의 진술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그분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에 있는 유명한 진술을 봅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려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딤전 3:16). 그리고 특히 이런 면에서 그렇습니다. 여기에 자연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바로 영적으로 이해되고 판단되며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1절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발견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죽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어떤 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진술들은 소명-외적이며 일반적인 복음의 소명-이 효과적이 되기 이전에 성령의 내적 사역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입증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효과적이며 내적인 소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리고 이것은 성경 구절들의 빛으로 볼 때 참으로 필수적임이 틀림없습니다. 영혼 안에서의 성령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서의 성령님의 직접적인 작용입니다. 구원은 직접적이며,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며, 그리고 기적적입니다.

사람들에 있는 성령의 작용은 깊은 곳에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들과 힘들을 단순히 밝혀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내부의 영혼에서 우리 안에서 영적 행동의 새로운 원리를 창출하시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이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 그리고 이런 모든 정치가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우리가 그것을 완전하게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자연적인 지식인이라도 이것을 받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바로 '자연인'이기 때문입니다.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 삼위일체에 관한 현저한 교리, 성육신과 대속의 모든 교리 등에 관한 이 놀라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적 진리이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연인에게 그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도행전 6:14절에서 한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다른 많은 사람들이 들었던 것처럼 그녀도 들었습니다. 사도는 앉아서 말씀을 설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외적인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 즉 주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과 그 사실들의 의미를 전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의 모든 것을 전했고 들었던 사람들 중에 루디아란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 역시 이것을 들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혹은 공적 예배시간에 많은 이들이 선포되는 복음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중 많은 이들이 불신의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고 불신자로서 죽어갑니다. 그런데 루디아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주목하십시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말씀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그들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거나, 혹은 자신의 책에 무엇이나 쓰거나 시를 암송하거나 혹은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복음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에 주목할 때까지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루디아는 무엇에 주목했습니까?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여셨다."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역사인데, 그 결과로 그녀는 주목했고, 복음을 보았으며 그것을 영접했습니다. 외적인 소명이 내적인 소명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것이 효과적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믿었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녀의 집 역시 그리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합니다-그녀의 마음을 여셨던 분은 바로 주님이셨고 그것이 바로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녀는 결코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한 원리를 심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 생애 처음으로 이런 영광스럽고 놀라운 진리를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나의 의지에 역사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분께서는 우리를 때리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구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 않으심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내 의지에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원하고 즐거워하고 나아가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인도하시며, 설득하시며, 내 의지에 그런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복음의 소명이 효과적이 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하며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실 때 그 역사는 효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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