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9장에서는 하나님과 쟁론해도 무익하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과 쟁론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에 모든 것이 옳다.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만 짓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복음 말씀을 주셨다. 이런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정욕적인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 쟁론의 무익성(욥 9:11-24)
성 경: [욥9:11] 헨 야아보르 알라이 비로 에리에 비야할로프 비로 아빈 로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본문은 4:15, 16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경험과 유사한 일면을 지닌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체득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을 체험하지 못했다. 바로 여기에 욥의 고난의 심각성에 있었던 것이다. 즉, 욥은 가중되어 가는 고난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앙적 회의에 대한 질문을 쏟아놓으면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간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계속 주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욥의 문제의 핵심은 친구들과의 갈등도, 육체적 질병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 관심이 있었는 바,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었다. 그러나 42:5에서 보듯 결국 욥은 하나님과 만나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앙적 회의를 청산하게 된다.
성 경: [욥9:12] 헨 야히토프 미 이쉬베누 민 요마르 엘라이브 마 타아세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 아마도 욥은 자신의 자녀와 소유를 잃은 것(1:13-19)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본문은 1:21에 나타난 욥의 신앙 고백, 즉,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고백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은 직후에 여호와의 주권(sovereignty)을 고백했는 바, 그 사건 이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현시점에서 그 같은 신앙을 재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사 45:9; 렘 18:6). 그러므로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을 회의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왜'(why) 자신이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데에 그의 고뇌가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 앞부분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인간(또는 넓게는 전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성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만물의 완성자이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실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 통제하실 권리도 갖고 계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역사(works)에 대해 철저히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토기장이 비유에 나타나는 토기장이(하나님)와 토기(인간)의 그것과 내용상 동일하다(사 45:9).
성 경: [욥9:13] 엘로하 로 야쉬브 아포 타하토 샤하후 오지레 라하브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 여기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엘로하'는 욥기에서만 42회 쓰인 말로써 욥이 참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한 것이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한번 작정하신 일은 결코 변개시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은 유동적이지 않고 결정적이다. 특히 악인에게 임하는 심판과 징계는 더욱 그러하다.
라합을 돕는 자 - `라합'은 원어상 `교만', `강팍함', `완악'등을 뜻한다(사 3:5;14:4).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것을 `바다의 괴물'(7:12; 사 51:9)로 여겼다. 성경에 따르면 이것은 야훼 하나님에 의해 정복되어 쫓겨난 것으로 나타난다(26:12; 시 89:10;사 51:9).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계 12: 3-12). 그러므로 `라합을 돕는 자'는 사단에 동조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무리 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인간만이 아니라 사단을 추종하는 모든 악의 세력도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성 경: [욥9:14] 아프 키 아노키 에에네누 에비하라 디바라이 임모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여기서 `대답하다', `변론하다'에 해당하는 용어는 공히 법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욥은 여기서 하나님을 재판관, 자신을 재판을 받는 자로 보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비유를 간접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욥을 시험하고 심판하는 권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욥 자신은 그것에 대해 하등 항변할 권리를 가지지 못함을 나타내준다. 또한 지금껏 하나님께 탄원과 질문을 쏟아부었으나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한 욥이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토로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성 경: [욥9:15] 아쎄르 임 차다키티 로 에에네 리미쇼피티 에트하난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본절에서 욥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를 통절히 고백한다. 즉 인간이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공의로우신 전능자임을 토로한다. 이러한 욥의 자세는 지금껏 보여준 욥의 태도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친구와의 변론 과정에서 욥은 여러 차례 자기 의(self - righteousness)를 피력하였기 때문이다(6:24, 30). 그러나 욥의 자기 의에 대한 주장은 행동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측면에서 그 자신이 범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본절의 내용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을 피력한 것으로서 욥자신도 그러한 죄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재판장 앞에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다만 그분의 은혜만을 간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욥9:16] 임 카라티 바야아네니 로 아아민 키 야아진 콜리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부르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라'는 단순한 부름이 아니라 법적인 소환(a legal summon)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사 59:4). 전절(15절)에 비추어 볼 때 본문은 욥이 하나님을 심판자로, 그 자신은 그분의 공평한 판결을 촉구하는 재판받는 자로 보고 있다.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 아마 욥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구원)이 속히 주어지지 않자 이러한 표현을 한 듯하다. 따라서 본문은 구원을 속히, 그리고 간절히 촉구하는 욥의 애절한 심경의 토로로 해석되어야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비신앙적 행태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성 경: [욥9:17] 아쎄르 비시아라 이슈페니 비히리바 피차아이 힌남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욥은 아직까지 자신이 까닭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욥이 재난을 처음 당했을 때부터 줄곧 그의 신앙 의식을 괴롭혀온 난제였다.
성 경: [욥9:18] 로 이티네니 하셰브 루히 키 야시비아니 마미로림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 연속되는 수난에 대한 과장법적 표현이다. 가중되는 재난으로 말미암아 욥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계속되는 불행의 연속(7:3-6; 13-19)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 경: [욥9:19] 임 리코아흐 아미츠 힌네 비임 리미쉬파트 미 요이데니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 2, 14절과 마찬가지로 본문에도 법정적 분위기가 강하게 배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전권(全權)을 소유하고 계시는 심판자이시며, 인간은 그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 내지는 원고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재판을 번복할 권능도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를 법정에 불러낼 권한, 곧 소환권조차도 없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아마 욥은 지극한 고난을 체험하는 기간 동안에, 자신은 단지 미천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재난 앞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히 느꼈던 것 같다.
성 경: [욥9:20] 임 에치다크 피 야리쉬에니 탐 아니 바야이키셰니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욥은 절대적,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자신도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죄인임을 고백했었다(2절). 그러나 그는 사실적. 구체적 측면에서는 특정한 범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고백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자기 확신도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면서부터는 흐려져간 것 같다. 즉, 욥은 재난을 받기 이전까지는 늘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 또한 경건한 의인으로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고난의 강도가 심해지고 그것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질책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욥은 고통의 나날(1:21; 2:10)속에서 때로는 구원을 갈망하고, 또 때로는 불평과 원망을 토로하는, 이른바 신앙적 `씨름'(창 32:24)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신앙을 확인시켜 갔다.
성 경: [욥9:21] 탐 아니 로 에다 나피쉬 에미아스 하야이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욥이 말하는 자신의 처지]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자신의 병세에 회의를 느끼고 체념적으로 한 말이다.
성 경: [욥9:22] 아하트 히 알 켄 아마리티 탐 비라샤 후 미칼레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욥이 말하는 자신의 처지]
일이 다 일반이라(아-하트 히이) - 문자적인 의미는 `그게 모두 동일하다'(It is all the same)이다. 이는 선악이 공히 똑같이 대우받는다는 의미이다. 나름대로 경건에 대해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욥 자신이 재난을 받자 이러한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성 경: [욥9:23] 임 쇼트 야미트 피트옴 리마사트 니키임 얄리아그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욥이 말하는 자신의 처지]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 - 이는 욥이 그의 가축과 자녀를 창졸간에 잃어버린 사건(1:13-19)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무죄한 자의 고난 - 여기서 욥은 자신의 고난이 그의 범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곧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하시는(22절) 하나님의 주권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무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변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욥의 이해는 다분히 현상적, 다면적인 경향이 짙다. 왜냐하면 제반 현실사에서 악인의 흥왕과 의인의 고난이 자주 목도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그것이 의인과 악인을 동일한 수준에서 위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인의 흥왕을 묵과, 허용하실 뿐이다. 이는 사단의 활동을 하나님께서 일시적, 제한적으로 허용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12; 2:6).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 역시,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에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숨겨진 공의를 온전하게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 경: [욥9:24] 에레츠 니티나 비야드 라샤 피네 쇼피테하 이카세 임 로 에포 미 후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욥이 말하는 자신의 처지]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 22절에서 욥은 이 세상의 공의와 질서가 왜곡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의인의 고난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곧 냉소적이며 무자비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보았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욥은 본문에서 더욱더 신랄하게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털어놓고 있다.
[에베소서 헬라어 성경 주석말씀]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엡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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