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말씀 강해

[전도서 3장 강해 설교말씀] 인간사의 가변성(전 3:1-10)

엘벧엘 2022. 12. 1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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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3장에서는 하나님이 정한 때에 대해서 말씀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정한 때가 있다. 그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그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이 정한 때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루가 똑같은 날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이 정해진 시간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이 부를 때 가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인간사의 가변성(전 3:1-10)

 

이들 성구가 나타내고자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변화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시간이 자아내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인간 생활의 여러 조건은 각각 무척 판이하며 또한 무차별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날(日)과 해(年)가 윤회하듯 끊임없이 그런 일을 지나치며 산다. "생의 바퀴"에서는(약 3:6) 하나의 수레바퀴 살대가 맨 꼭대기에 오는 때가 있는가 하면 가장 아래쪽으로 오는 때가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들고 나는 만조와 간조가 있으며 부단히 차고 기우는 만월과 신월이 있다. "이 세상의 유행"은 하나의 극단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변화" 해가며, 이제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때와 철을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최고의 권력에 의하여 변경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으며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가오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지정돼 있는 것을 변경시키는 일은 우리 권한 안의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형통할 때 편안해야 하면서도 왜 안심해서는 아니 되는지의 이유로써 등장한다. 즉 우리는 변화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으며,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 [제일 낮은 계곡이 최고의 산정(山頂)에 접합된다] 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편안해야 하는 이유도 된다. 그가 권면한 대로(2:24),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겸손히 의존하여 "우리가 수고한 낙을 즐기되 희망으로 한껏 고개를 쳐들지도 말며, 두려움으로 풀 죽지도 말고, 한결같이 평정된 마음으로 모든 사태를 맞아들여야 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한 일반적 명제가 기록되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다"(1절).

1. 상호 간에 극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형세가 순환함에 따라 각기 제 차례를 찾아 활동하게 될 것이다. 낮은 밤에게 제 자리를 양보하며, 다시 밤은 또 낮에게 제 자리를 내어 준다. 여름인가 하면 곧 겨울이 되고 겨울인가 하면 머지않아 여름이 될 것이다. 모든 목적은 그것을 이룰 때가 있다. 아무리 청명한 하늘에도 구름은 낄 것이니, 기쁨 뒤에는 슬픔이 따라오는 법이다. 극히 구름이 많은 하늘도 쾌청하게 될 것이니 즉 태양은 구름 뒤로부터 뛰쳐나올 것이다.

2. 우리에게는 극히 우연한 것처럼 보이고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로 보이는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예견(豫見)에서 정확하게 결정된 일이며, 그 시간까지도 정확하게 정해져 있어서 한 순간도 앞당겨지거나 연기될 수 없다.

Ⅱ. 개개 사실의 귀납에 의한 그 명제의 증명과 해설이 있다. 그 사례들은 보름과 초하루 사이에서 항상 차고 기우는 달의 공전 주기의 날수대로 그 수가 스물여덟 개다. 이 다양한 변화들 중 일부는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이고 일부는 인간의 의지에 한층 더 의존하고 있지만, 모두가 다 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천하에는 모든 것이 이처럼 변화무상 하나 천상에서는 모든 것이 불변하는 상태에 있으며, 이들 사물에 대한 계획도 불변하다.

1.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이 일들은 신의 계획에 의해 결정된다. 정한 시각에 우리가 태어났듯이 정한 때에 우리는 죽어야 한다(행 17:26). 본문에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나 살 때는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자들도 있다. 살 때는 너무나 짧아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즉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듯이 다시 살아날 때도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때는 무덤 속에 누워있는 자들이 기억함을 입는 때이다(욥 14:13).

2.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에 심듯 하나님께서 민족을 "심을 때가 있고," 또 이를 위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도록 하시려고 그곳에 "심어져 있던" 일곱 민족을 "뽑아 내실 때"도 있다.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불의가 가득 차서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 대해서도 역시 "뽑아버리고 멸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때가 있었다(렘 18:7, 9). 사람들에게도 일 년 중 한 때, 저희 일생 중 한 때는 "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심었던 것"이 열매가 없고 쓸모가 없을 때에는 "그것을 뽑아 버릴 때"인 것이다.

3.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 널리 퍼져 모든 것을 황폐시키는 때는 "죽이는 때"이다. 그러나 그가 자비의 길로 돌아오시는 때는 "그가 찢으신 것을 치료하는 때요"(호 6:1, 2) 그가 "백성을 환란"케 하신 후에 그들을 위로하시는 때이다(시 90:15). 가혹한 방법을 사용하는 게 지배자의 지혜가 되는 때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층 온건한 방침을 취하고 부식제가 아닌 완화제를 적용하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다.

4. "헐 때와 세울 때"가 있다. 가정이나 재산이나 나라를 "헐 때"는 그것이 너무 성숙하여 멸망하는 때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돌아와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무너뜨린 것을 재건할 "때"를 찾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울 정한 시기"가 있었다(시 102:13, 16). 사람들이 가옥을 "헐 때"가 있고 장사를 그만둘 때가 있으며, 따라서 "세우는 일"에 분주한 자들은 "헐 때"가 있는 것을 예기(豫期)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하나님의 섭리가 "울고 슬퍼하도록" 요구하는 "때"가 있다. 인간의 지혜와 온순한 마음씨는 이 요구에 순응하여 일반적인 재난과 위험의 시기에 "울고 슬퍼"한다. 그러한 때에 "웃고 춤추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사 22:12, 13; 겔 21:10). 그러나 한편 하나님께서 명랑함을 명하시는 때가 있으니, 그때는 "웃고 춤추는 때"이며 우리가 "마음의 기쁨과 마음으로 그를 섬기도록" 기대하시는 때이다. 애도와 통곡의 시기가 웃음과 춤의 시기보다 먼저 나와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인데, 이것은 우리가 처음에는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되고 그다음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6. "돌을 던져 버릴 때"와 "돌을 거둘 때"가 있다. 요새를 철거하고 헐어버림으로써 생긴 "돌을 던지는 때"는 하나님께서 국경에 평화를 주셔서 더 이상 그것들이 필요 없는 때이다. 그러나 성채(城砦)를 쌓기 위하여"돌을 거둘 때"가 있다(5절). 실로암에 있던 망대처럼 오래된 탑이 무너지고(눅 13:4) 성전까지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당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국세를 떨치게 되어 탑들과 전승기념비가 세워질 때도 있는 것이다.

7. "안을 때가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다. 우리 친구가 진실함을 발견하는 때는 우리가 그 친구를 "안는 때"이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거나 진실하지 못할 때는 그를 꺼리게 되어 포옹을 삼가는 때이다. 그럴 때에는 그를 피하고 멀리하는 것이 사려 깊은 행동이다. 이러한 포옹은 고린도 전서 7장 3 - 5절과 요엘서 2장 16절에 설명된 대로 흔히 부부간의 포옹에 적용된다.

8. "찾을 때와 잃을 때"가 있다. 기회가 미소 짓는 때는 돈을 벌고 승진하고 값싼 흥정을 얻고 많은 이익을 보는 때이며 지혜 있는 자가 "찾는 때"이다. 그가 세상에 나가 일하고 자기 가족이 불어갈 때나 그가 한창때를 맞아 번영하며 사업을 영위하는 때는, 그가 분주할 때이며 햇볕이 비취는 동안 건초를 만들 때이고 기회를 활용해야 할 때이다. 자기 손에 재물이 있는 때는 지혜와 지식과 은혜를 "얻을 때"이다. 그러나 그는 나중 소모할 때가 올 줄 예견해야 할 것이니, 그때는 자기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할 때이다. 아니, 쉽사리 획득할 수 있었던 것들이 쉽사리 흩어져 버리고 꽉 붙잡아 둘 수가 없는 때, 즉 "잃을 때"가 올 것이다.

9. "지킬 때"가 있으니 그 때는 우리가 이미 획득해 놓았던 것을 사용하는 때이며, 양심을 걸고 모험하는 일이 없어도 지킬 수 있는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도록 요구하는 때 곧 "버려야 할 때"가 올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고수하려고 한다면(마 10:37, 38)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리 양심을 그르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앙의 파선을 당하느니 보다 가진 모든 것의 파선을 당하는 것이 차라리 나으므로 그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또는 요나가 탄 배의 선원들이 바다로 짐을 내던진 때와 같이, 우리 자신에게 대한 사랑이, "우리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것을 던져 버리도록 요구할 때가 올 것이다."

10. 큰 슬픔을 당하는 경우에 하듯이 의복을 "찢을 때"가 있으며, 그 슬픔이 끝났다는 표시로 다시 그것을 "기울 때"가 있다. 우리가 행하였던 것을 철회할 때가 있으며 우리가 취소하였던 것을 다시 행할 때도 있다. 성 제롬은 이것을 유대 교회의 파멸과 복음 교회의 형성으로 해석한다.

11. "침묵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는 "때"가 있고, 우리 지혜가 되고 우리 의무가 되는 때가 있다. 곧 그것은 악한 때요(암 5:13), 우리가 말하는 것이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이 되는 때요, 우리가 잘못 얘기할 위험 속에 있는 때(시 39:2)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교화를 위해 말해야 할 때도 있으니, 그때는 침묵이 의로운 주장을 배신하게 되는 때이며, 입으로써 하는 고백이 구원을 이루게 되는 때이다. 말해야 할 때와 잠잠해야 할 때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분별 중 큰 몫을 차지한다.

12. "사랑할 때"가 있으며 우호를 나타내고 자유스럽고 명랑해야 할 때가 있으니 그 때는 즐거운 때이다. 그러나 "미워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으니, 그 때는 우리가 좋아하던 자들과 모든 친밀감을 끊어버릴 명분을 보게 되는 때요, 사랑의 감정이 용납하기 싫어하는 혐의를 둘 만한 이유를 발견함으로써 사랑을 보류해야 하는 때이다.

13.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칼을 빼어 들고 삼키리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전쟁의 때"가 있으며, 사람들이 정의와 자기 권리의 유지를 위해 칼을 빼어 드는 "전쟁의 때"가 있으며, 열방들이 전쟁을 즐겨 전쟁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의 때"를 희망할 수도 있다. 그것은 여호와의 칼이 칼집에 들어가는 때이며, 그가 "전쟁을 휴전"시키는 때이며(시 46:9), 종전이 되고 사방팔방에서 평화를 원하는 추세가 보이는 때이다. 전쟁은 언제나 계속되지는 않으며, 이런 측면에서 어떤 평화도 영원한 평화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이처럼 이 모든 변화에 있어서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다른 한 가지와 대조시키는데, 이는 우리가 "마치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기뻐하고, 마치 울지 않는 것처럼 울도록 하게 하려 함이다."

Ⅲ. 이러한 관찰에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있다.

1. 만일 우리의 현재 상태가 그런 영고성쇠의 변천에 복종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에서 우리의 몫을 기대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좋다는 것들도 아무런 확실성이 없고 계속성이 없기 때문이다(9절). "일하는 자가 무슨 이익을 가지느냐?" 완성되리라고 생각하고 심으며 세웠던 것이 그토록 빨리 또 확실하게 뽑히고 헐린다면 그가 심고 세우는 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모든 수고와 염려는 사물 그 자체의 가변성이나 그 사물에 대한 신의 계획의 불가변성을 변경시킬 수 없다.

2.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시험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로 "우리가 수고하는 일에는" 아무 이익이 없다. 물건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때에라도 우리에게 거의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한 섭리의 처분을 정당하게 사용한다면 그 일에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10절). "하나님이 인생들에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것은 그 일을 통해 우리는 행복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단련을 받고" 다양한 사건의 단련을 통해 여러 가지 은혜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변화에 의한 시험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심을 소유하게 하려는 것이며, 그로 훈련을 받고 "비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빌 4:12)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에 유의하라.

(1) 인간의 자손들 사이에서는 아주 많은 수고와 고생을 볼 수 있다. 이 세계를 신고(辛苦)와 슬픔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2) 이 수고와 고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할당해 주신 것이다. 그는 이 세계가 우리의 안식처가 되도록 의도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편안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으셨다.

(3) 많은 자들에게는 이 수고와 고난이 선물이 된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주듯, 하나님은 인간에게 유익하게 하시려고 이런 것을 주신다. 이 노고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영원한 안식을 소원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우리가 계속 활동하고 언제나 해야 할 일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빈둥거리며 놀라고 보내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변동은 우리를 어떤 새로운 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우리는 변화 그 자체보다도 이 새로운 일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구원의 확신 성경공부자료] 예수님을 증거 하는 생활(고린도후서 5장 17-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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