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말씀 강해

[예레미야애가 3장 복음설교말씀] 환난 당하는 자의 의무(애 3:37-41)

엘벧엘 2022. 12. 1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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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장에서는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말씀한다. 예루살렘 통치자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송사를 억울하게 했다. 이런 것들이 폐단이 되어 결국 환난을 당하게 되었다. 유다 백성의 환난은 자기들이 했던 행동의 대가였다. 사람은 자기가 행한 대로 받는다고 했다. 성도는 자기의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복이 오고 저주가 온다. 인간은 자기가 행동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환난 당하는 자의 의무(애 3:37-41)

 

앞 절에서 우리는 괴롭힘을 받는 자들에게 베풀어진 위로를 살펴보았었다. 그리고 위로의 단맛을 맛보았다. 여기에서는 괴로움을 받는 상태에서 우리가 위로를 기다리면서 행할 규정된 의무가 있다.

Ⅰ. 우리는 어느 때에라도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우리에게 닥친 모든 재앙 중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깨달아야 한다(37, 38절). 여기에는 우리가 고난 중에서 우리의 영혼을 조용하게 하고 거룩하도록 도울 위대한 진리가 놓여 있다.

1. 사람의 행동은 무엇이나 그것들을 다스리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만일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어떤 일을 설계하고 성취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논을 따르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한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어떤 권력이나 성공도 가질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길을 궁리한다." 그는 계획하고 하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한다(약 4:13). 그러나 그가 계획한 것과는 다르게 "여호와께서 그의 걸음을 지도하신다." 그리고 그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것은 먼저 하나님의 손길과 그의 의도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면 성취되지 않는다(시 16:9; 렘 10:23). 갈대아인은 말하기를 그들이 예루살렘을 파괴하리라 하였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이는 그들이 그것을 말한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고, 그들에게 그것을 하도록 위임하셨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사람은 다만 위대하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기계일 뿐이고, 이 낮은 세계의 정부에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일하며 하나님 없이는 그들의 어떤 계획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자.

2. 사람의 기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명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즉 높으신 자의 입으로부터 화와 복이 나오지 아니하느냐? 그렇다. 확실히 화와 복은 하나님께로서 나온다. 원문에 있어서는 더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이 화와 이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정하시고 명하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 확실히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보편적인 진리를 특별히 적용하여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은 그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가 건강한가? 또는 병들었는가? 부요한가? 가난한가? 우리의 설계는 성공하고 있는가? 방해당하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의 판단은 그로부터 나온다. 주께서 주시고? 또한 거두신다." 그는 태초에 그가 하신 것처럼 빛도 짖고, 어둠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하신 일은 그 입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렇게 쉽게 효과적으로 그의 모든 목적은 이루어진다.

Ⅱ. 우리는 어느 때에라도 우리 위에 놓인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불화하여서는 안 된다(39절).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원망하랴?" 여기서 예언자는 그가 앞 장에서 불평한 것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이 몰인정하고, 엄격하신 분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다. "나는 노하여지기를 잘하는가? 왜 나는 이렇게 안달이 나는가?" 급하게 하나님께 대하여 투덜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꾸짖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 나온 구절에서 그가 주장한 하나님의 통치와 우주적인 섭리라는 교리로부터 그는 이 결론을 이끌어낸다.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하여 원망하랴?"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에 대항하여 우리는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시 39:9). 그들의 고난을 비난하는 그들은 그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질책한다. 포로에서 고난당하는 이들은 그들의 모든 고난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할 것은 우리의 불평(호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항하여 불평을 내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여기에서 강조된 이유는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을 사람으로 나타내 보자. 사람이 원망할까? 사람! 우리는 사람이다. 사람은 이성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사람은 위를 보고 앞을 보아야 한다. 이 두 방법은 우리의 불평을 잠잠하게 하기에 충분한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다. 그들을 손상시키는 모든 것들 때문에 울부짖는 아이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고, 신이 아니다. 종속하는 자요, 주(主)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요, 자신을 만든 이가 아니다. 우리는 유한하다. 우리는 순종하고 복종하여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고 천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같이 고난으로부터 자유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슬픔이 없는 세상의 거민이 아니고, 슬픔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의 거민이다. 우리는 사람이고, 마귀가 아니다. 우리는 마귀와 같이 비참하고, 도움이 없고, 소망이 없는 상태에 있지 아니하고, 그들이 갖지 아니한 우리 자신을 위로할 무엇을 가지고 있다.

2.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날마다 죽기는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통하여 아직도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원망하리요?" 아니다. 인간은 삶의 어떤 재앙이나 무거운 짐으로 인한 불평보다도 삶을 인하여 감사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목숨은 연약하고 몰수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자, 살아 있는 자, 그들은 찬양" 하고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사 38:19). 생명이 있는 한 거기에는 희망이 있다. 일들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원망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들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고무할 것이다.

3. 우리는 죄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원망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죄의 형벌이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불의가 받아야 할 것보다는 훨씬 적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원망할 이유를 거의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은 약하고 비이성적인 사람의 폭력을 사용하여 그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시지마는 그의 압박받는 백성이 대대로 생각했던 것처럼 폭력을 장려하시지는 않는다(합 1:13). "어찌하여 궤휼 한 자들을 방관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적들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상처받고 압박받는다. 그리고 예언자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한다.

(1) 만일 사람이 군사력으로 그들을 해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찬성하지 않으신다. 그는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지 않으시며" 갇힌 자의 부르짖음에 주목하시고, 또한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승인하지 아니하신다. 아니 그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신다. 눌린 자들을 짓밟는 것이나, 사로잡히고 곤경에 빠진 자들을 짓누르는 것은 야만스런 것이다.

(2) 만일 사람이 법이라는 미명을 붙여서 그들을 상해한다면, 법의 집행이라는 것으로 가장하고서 만일 그들이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여" 무엇이 그의 정의인지 알 수 없게 한다면 또는 정의에 이를 수 없다면 그들을 구제할 길이 없다. 만일 그들이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면," 그리고 잘못된 결정을 하고, 거짓 판단을 하면 그들로 하여금 다음 사실을 알게 하라. 그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신다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35절) 그것은 하나님의 통찰 안에 있고, 그의 눈 아래 있으며 하나님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이 그러한 것을 알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을(잘못된 재판)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인 것이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다." 그들은 가장 높은 자보다도 더 높으신 이가 감찰하신다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자들에 대한 자기들의 권위를 남용함으로써 자기들을 다스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권위를 경멸한다(전 5:8). 그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하는 것을 승인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암시한다. 재판을 굽게 하고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바로잡기 위하여 그들을 사용하신다 할지라도 그는 곧바로 나중에 이같이 행한 자들에게 엄격히 계산하실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이들이 잘 되는 것을 한동안 허락하고,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그의 목적을 수행하신다 할지라도 그는 이들의 악행을 승인하지 않으신 다는 것에 유의하자. 그러므로 의인은 주로부터 연단을 받기는 하지만, 세상과 함께 저주를 받지는 아니할 것이다.

Ⅲ. 우리는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고통이 우리 위에 놓이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1. 우리 자신에 대한 심각한 성찰과 우리 과거의 삶에 대한 반성.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찾고, 시험해 본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 자신을 도피시키고, 숨겨서 변장하고 있는 범죄자를 찾아내고, 그다음에 죄를 범했는지 아닌지를 시험해 본다. 양심으로 하여금 찾고, 시험하는 두 가지 일을 하게 하라. 그리고 양심으로 하여금 신실하게 다루고, 부지런히 찾아보게 하고 공평한 심판을 하도록 위임하라. 우리의 행위를 시험해 보자. 그것들로써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사할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의 사악이 우리를 징계한다(잠 19:3).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옳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의 통치자이다. 그는 불복종을 응징하여 그의 통치하시는 명예를 지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가?" 그러할진대 원망하지 말자. 우리가 하여야 할 다른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불평하는 대신에 회개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해된다는 증거로서 우리는 그의 거룩하신 뜻에 우리 자신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가?" 그러므로 복종하는 것이 지혜요, 채찍에 입 맞추는 것이 지혜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께 반대하여 걸음을 걷는다면 그는 우리를 일곱 번도 더 벌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판단하실 때, 그가 이기실 것" 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우리 자신을 조화시키면 우리는 우리의 희미한 소원으로서가 아니고, 우리의 걸음걸이로 말미암아 한 특별한 걸음에 의해서가 아니고, 우리들의 방식들, 우리가 목적하는 것들, 우리가 나아가는 법칙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성질들을 판단하는 목적을 겨냥하고 찬성할 수 있으며, 그 목적들 또는 그 규칙들을 향한 우리의 삶의 기질들을 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판단해야 한다. 우리의 상태를,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우리의 행위를 생각하는 것은 시기에 적합한 일이다(학 1:5). 신통치 않은 것은 회개하고, 미래를 위하여 고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고난의 목적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공적인 재앙의 시대에 우리의 할 일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찾고, 시험하는 일임에 반하여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헐뜯고, 그들을 비난하기가 쉽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할 일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 각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나는 공적인 화염에 무엇을 기여하였는가?" 그러면 우리 각자는 하나를 고칠 수 있고, 그 후에는 모두가 고쳐질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회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를 싫어하신 하나님께로 그리고 우리가 떠나가버렸던 그분에게로, 우리를 소유한 분이요, 통치하시는 분인 하나님께로 회개와 개혁으로 말미암아 돌아가자. 우리는 그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를 저버린 이후 그는 결코 우리와 함께 잘 있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에게로 돌아가자." 이것은 앞의 부분을 수반하며 그의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악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행위를 조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윗이 취한 방법이었다(시 119: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Ⅳ.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헌신의 정염(情炎)으로 우리의 지극한 사랑과 봉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41절). 우리가 괴로움 중에 있을 때

1. 우리는 우리 위에 무한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논의의 여지없이 우리 위에 주권을 가지신다. "하늘이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는 다투게 되어 있지 않고,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그로부터 자비를 받을 것을 기대하고, 믿으면서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에게 "우리의 손을 들자" 속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기도할 때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몸짓, 때로는 이것 대신으로 시 141:2를 사용하기도 한다.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그것은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것과 그 자비를 받을 우리의 준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3.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기도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말로써 우리의 정신을 쏟아내어야 할 때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그리고 다른 예배에서 보시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 없이 드리는 희생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만일 내부적인 느낌이 외부적 표현에 다소라도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같이 하나님께 향하여 영혼을 드는 것이다(시 25:1).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께 함께 있기를 원하는 영혼을 자극하는 헌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리로 가는 길을 배우고, 그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여호수아 3장 성경 좋은 말씀] 요단 강변의 여호수아 설교(수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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