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말씀 강해

[요엘 2장 주일설교말씀] 금식을 통한 회개의 권면(욜 2:12-17)

엘벧엘 2022. 12. 2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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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2장에서는 금식을 통한 유다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죄를 지은 하나님 백성이 금식하면서 울며 통회하고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이런 기회를 날려 버리면 하나님은 심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이때 회개하여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금식을 통한 회개의 권면(욜 2:12-17)

 

우리는 여기서 간절한 회개의 권면을 읽게 되는데 이것은 앞에서 묘사된 위협적 심판에서 유도된 것이다."그런즉 너희는 이제라도 여호와께 돌아 오라." 이것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1. "이 심판은 너희로 죄를 깨닫게 하며 너희 죄에 대해 겸비케 하며 너희로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충성으로 환원시키기 위해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심판의 목적과 의도에 부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으시는 것은 우리를 회개시키고 우리를 본정신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2. "그와 같이 함으로써 너희는 심판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 현재 네 형편은 몹시 악화되어 있다. 그러나 너는 그렇게 함으로써 형편이 더 악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아니, 만약 네가 이 방도를 받아들인다면 네 형편은 곧 훨씬 호전될 것이다." 여기에는 은혜로운 초대가 베풀어지고 있다.

Ⅰ. 개인적 회개가 촉구된다. 이것은 각자의 영혼에 작용하는 회개를 말한다. "온 땅의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며 그 아내들도 따로 애통한다" (슥 12:12). 하나님의 심판이 널리 발효될 때에는 각자가 공동 간청에 대한 자기 몫(쿼타)을 이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공동의 범죄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기 잘못을 고치며 자기를 위해 애통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모두 고침을 받게 되며 하나님의 애곡자로 발견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우리가 여기서 촉구받는 일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회개라는 게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늘 요구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는 회개를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한다.

(1)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해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을 노엽게 해 드렸다는 것을 미안해하고 죄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에게 자해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는 범죄함으로써 우리 판단과 이익을 그르쳤다. 회개에는 슬픔과 수치에 대한 외적 표현 곧 금식과 우는 것과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 괴로움으로 인한 눈물은 그 괴로움을 가져온 죄에 대한 눈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내적 감명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슬픔의 외적 표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회개에는 중심으로부터의 애통이 따라야 한다. 내적 감동이 외적 표현의 근원이 될 때 슬픔은 저절로 외면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는 말씀이 뒤따라 나온다. 이것은 그 시대의 풍습대로 옷을 찢는 일이 부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옷을 찢는 것은 자기들의 죄악에 대한 큰 슬픔의 표시였고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자신에 대한 거룩한 분노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옷을 찢는 행위로 충분하기라도 한 듯 회개 중에 쉬지 말라. 너희 옷을 금식일과 고행일에 맞추려느냐 보다 너희 심령을 거기에 맞추려고 더욱 애를 쓰라. 아니, 너희가 마음을 찢지 않는다면 너희 옷은 조금도 찢지 말라. 상징은 나타낼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상(事象) 없는 상징 즉 알맹이 없는 표적은 장난이며 조롱이며 하나님께 대한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을 찢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실 것이다(시 51:17). 죄 때문에 우리 마음이 심히 괴롭고, 우리가 죄로써 하나님을 얼마나 욕되게 했으며 우리 자신을 얼마나 훼손했는지를 생각하고 마음이 찢어질 때, 그리고 우리가 죄에 대한 혐오감을 품으며 죄의 원리를 일소하려고 간절히 원하며 결코 죄 된 행위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라야 우리는 마음을 찢는 것이며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으시고 자비로이 우리에게 내려오실 것이다.

(2)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께로 전향해야 한다. 우리는 죄와 불화할 때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오게 된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12, 13절). 우리를 우리 하나님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금식과 애통도 아무 가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우리 의무요 이득이라는 것을 철저히 확신하며 우리가 그에게 등을 돌렸던 일을 충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확고부동한 결의로써 그의 영광을 우리 목적으로 삼으며 그의 뜻을 우리 규칙으로 삼으며 그의 은총을 우리 축복으로 여길 때라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셈이 된다. 본문은 우리 모두에게 이 일을 명령하고 촉구하며 속히 이 일을 행하라고 초대한다.

2. 이 백성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며 마음을 다해 그에게로 돌이키기 위해 사용되는 설득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죄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죄로부터 마음을 찢을 때는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갈 준비가 되며 그에게 전적으로 헌신할 준비가 된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받지 않으실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 사실을 참작하자.

(1) 우리는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선한 신이심을 확신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우리 죄를 벌하심에 있어 그가 정당하고 의로우셨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몰고 간다. 그러나 이것뿐만은 아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회개하는 우리를 받아들이 심에 있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다는 것이다. 이런 자비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셔서 죄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돌이켜 살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자기를 거슬러 노하게 하는 자들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원하는 자에게는 인애가 크시다. 이 표현은 여호와께서 인자함과 자기의 모든 영광으로 모세 앞을 지나시면서 그 이름을 반포하실 때 사용하신 말씀이다(출 34:6, 7). 그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마음을 바꾸신다는 말이 아니라 죄인의 마음이 변화될 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방법이 변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판결은 번복되고 율법의 저주는 제거된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일어나는 회개야말로 진실한 회개이며 순수하고 복음적인 회개이다. 우리는 그 자비를 거슬러 범죄 했으면서도 절망 중에 있지는 않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올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인자는 우리로 하여금 더 대담하게 계속 죄를 짓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회개를 유발하는 데 가장 강력한 유인(誘因)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시 130:4). 면책 행위(자비에 의한)는 권리 박탈 행위(정의에 의한)로 겁먹고 물러났던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

(2) 우리가 회개하면 죄로 상실하고 박탈당했던 복을 다시 받게 될 것이라고 바랄 만한 이유가 있다(14절). 하나님은 마음과 뜻을 돌이키실 것이며 이전에 행하셨듯 우리를 계속 대적하진 않으실 것이며 우리를 위해 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죄를 뉘우치고 의무의 길로 그에게 돌아가자. 그렇게 할 때라야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대한 심판을 뉘우치고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돌아오실 것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기대하는 태도는 몹시 겸손하고 정숙하다. "주께서........ 하실지 누가 알랴?"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의심스럽게 표현된 것은 백성의 엉뚱한 생각과 안일한 마음을 억제하고 그들을 자극하여 거룩한 경계심과 활발한 회개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수 24:19 참조). 또는 이 의문형 표현의 이유는 그들이 즐겨 기대하는 것이 현재적 심판의 제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그가 현세적 심판을 제거해 주실지는 자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우리와 화해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이런저런 고난을 제거해 주실지의 여부는 의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절반의 가능성만으로도 우리는 힘을 얻어 회개해야 한다. 현세적 복락에 대한 약속은 왕왕 "혹시"라는 말로 성립된다. "너희가 혹시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다윗은 죄를 용서받는다. 그렇지만 아이는 죽을 것이다. 그때 다윗은 아이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면서 여기에서와 같이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실지 누가 알까?" (삼하 12:22)하고 말했다. 니느웨 사람들도 이런 것을 고려하여 회개하고 개심했다(욘 3:9).

[2] 기대의 내용은 경건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시기를 바란다. "그 뒤에"라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막 떠나가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대신 아무 축복이라도 만족하겠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뒤에"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의 쟁변을 그치신 뒤 축복을 내리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복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전제와 소제"이다. 땅의 소산물은 복이라고 불린다(사 65:8). 이는 그 소산물들이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하며 또 우리에게 필요한 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들 복을 박탈당했었고 그동안 그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제물이 하나님의 제단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제사장이 공궤 물을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풍요가 돌아올 것을 전망하고 위안을 얻는 것은 전제와 소제를 하나님의 제단에 풍성히 갖다 놓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식탁에 고량진미와 금준미주가 풍족하게 배설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 제단의 풍요로움을 보는 것이 더 큰 소원이었다. 이와 같이 히스기야도 자기 병 회복을 희망하면서 "내가 여호와의 전(심판의 보좌나 중신 회의장이 아니라)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뇨?" 하고 말했다(사 38:22). 하나님의 규례를 마음껏 풍성히 향유한다는 것은 국가 번영의 본보기 중 가장 귀중한 것이며,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라는 것을 주목하자. 만일 하나님께서 소제와 전제의 축복을 주신다면 그것은 다른 축복들을 데리고 올 것이며 그들을 성별 시키며 편안하게 하며 안전히 지켜 줄 것이다.

Ⅱ. 그들은 국가적 회개를 하도록 촉구받는다. 이 회개는 국가적 행위로 성회에서 행해져야 했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서로의 분발 그리고 인근 열방의 각성을 위해서였다. 인근 나라들은 유다의 국민적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비를 얻으려면 어떤 자격을 구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었고 그 국가적 회개를 찬양하는 증인이 될 터였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성회는 어떻게 소집하는가?(15. 16절) 앞에서 그들은 전쟁의 경보를 울리기 위해 나팔을 불어야 했으나(1절) 이제는 강화 조약을 위해 나팔을 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적당하다고 판단되기만 하시면 자기 백성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그들을 불러 모으라. 금식일을 정하라" 고 말씀하신다. 율법을 따라 연간에 많은 절기가 정해져 있었으나 금식일로 지키는 날은 일 년에 단 하루 즉 속죄일 뿐이었다. 그날은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그 의무에 충실하기만 했다면 다시는 금식일을 지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기 때문에 종종 금식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1장 14절 말씀이 여기에 되풀이되고 있다.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라. 미리 거룩한 준비를 위해 시간을 정하라. 그리고 저들로 준비를 잊지 말게 하라. 아무리 큰 자라도 면제시키지 말며 장로들과 재판장들과 관원들을 모아라.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빠뜨리지 말며 소아와 젖 먹는 자까지 다 모으라." 소아가 이해력이 생기면 곧 종교적 집회에 데려 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그들을 일찍부터 마땅히 행할 길로 훈육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직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젖먹이를 성회에 데려 와 금식시키는 목적은 젖 달라고 보채는 유아의 울음을 통해 그 부모가 감동을 받아 죄를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죄를 그 자손에게 마땅히 갚으실 수 있었으며 젖먹이의 혀가 입천장에 붙도록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애 4:4).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유아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 자녀들도 긍휼히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욘 4:11). 신혼부부도 이 일에서 면제받을 수 없었다.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라. 그들로 여느 때처럼 성장하거나 장신구를 걸치거나 환락에 빠지게 하지 말고 어느 이웃보다 진중하고 슬픈 마음으로 금식의 의무에 전념하게 하라." 개인의 기쁨은 고난 때문이든 죄 때문이든 공공의 슬픔에 항상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2. 그날의 일은 어떻게 수행되는가?(17절)

(1) 여호와께 수종 드는 자 곧 제사장들은 총회를 주재하며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입이 되고 하나님께는 백성의 입이 되어야 했다. 평상시에 중재 역할을 하던 자들이 아니면 누가 그 틈 사이에 서서 여호와의 노를 돌이킬 것인가?

(2) 그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직분을 행하여야 했다. 그곳은 그들이 희생 제시를 수종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드릴 제물이 없거나 거의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곳에서 영적 제사를 드려야 했다. 백성들은 거기서 제사장들이 그 조상 야곱처럼 울며 씨름하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이 경건한 심정을 갖게 되어야 했다. 목사들은 남을 감동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 일들에 자신이 먼저 감동되어야만 한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자신의 충성 때문에 죽음을 당한 곳도 낭실과 제단 사이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보배로운 피를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그 때문에 경고된 심판을 돌이키기 위해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그들은 기도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에다 말씀을 두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받은 바 말씀을 자기들의 기도에서 부연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탄원해야 했다.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공의에서는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 구원은 그의 자비에서 나온다. 그들은 "여호와여, 우리를 의롭게 만드소서"라고 말할 수는 없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의 변은 "여호와여, 우리는 징계를 받아 마땅하며 징계를 필요로 하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우리 징계를 감하소서"라고 해야 한다. 죄인의 탄원은 "선하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자기들의 탄원을 끌어내야 했다(" 저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특히 그들의 환난 가운데서 손상받는 하나님의 영광을 탄원의 재료로 삼아야 했다. "여호와여,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마옵시며 기근의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그토록 오랫동안 열국의 영광으로 경애되던 가나안 땅으로 열방의 조롱거리가 되게 마옵소서. 열국들로 저희를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주의 기업이 이처럼 빈한해지며 생존할 능력도 없어질 때에는 열국들이 쉽사리 저들을 주관하게 될 것이다. 이방인으로 저희를 속담과 비방 거리로 삼지 말게 하소서. 이스라엘인처럼 가난하고 거지 같다는 말이 생겨나지 말게 하소서." 인근 국가 사이에서 신망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기도할 만한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욕되게 할 교회의 수치는 특히 두려워하고 저주해야 할 대상이다.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게 마옵소서. 이방인은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던 하나님,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신뢰하던 신이 어디 있느뇨 하고 말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거짓 신들에게 대해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신 32:37)고 질타하신다.

산헤립도 이처럼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고 뽐낸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대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고 말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자기 전에 계시는 것이 확실한 때문이다(시 115:2, 3; 11:4).

[예레미야 3장 히브리어 성경말씀] 유다 백성의 회개 촉구와 축복(렘 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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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도 회개해야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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