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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장 복음 성경말씀] 다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겔 3:22-27)

엘벧엘 2022. 12. 17.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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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다시 나타났다.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에게 임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패역한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유다 백성이 타락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 이 시대는 어떠한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여 영혼을 깨우지만 귀를 닫아 버리고 듣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지만 외면하고 있다. 하나님은 마지막 종말을 향하여 가는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 복음을 준비하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전하게 하신다.

 

다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겔 3:22-27)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친히 자세하고도 중대한 사실을 보여 주었으며, 많은 사명을 띠고 가는 그 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지시를 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에스겔의 이스라엘의 큰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정이 아주 다르게 나타남을 발견한다. 그의 일은 우선 그의 소명의 화려함에 비해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Ⅰ. 여기서 에스겔은 더욱 자세한 지시를 받기 위해 물러난다. 에스겔이 마지못해서 가는 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에 대한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철저한 신념을 갖지 못했던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예견하고 있던 어려움에 대해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새로운 환상을 은총으로 보여 주심으로써 그에게 생기와 활력을 더해 주시려 하신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에스겔을 "들로" 불렀다(22절).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에스겔과 함께" 어떤 "이야기를" 하려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초라한 포로요, "인자" (人子)에 불과한 사람과 함께, 아니 죄를 지은 사람에게 이와 같이 친밀하게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겸양을 보며, 이러한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더욱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낼 때에, "분한 마음으로 갔고," 이번에는 그는 그의 일을 행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런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사이의 이런 축복받은 교제는 그리스도의 중재에 힘입고 있음을 시인하자.

여기에서는 홀로 있음의 유익을 보게 된다. 또 그것이 묵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됨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만 함께 있기 위하여 세상을 물러나는 것,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말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다. 선한 사람은 에스겔의 경우처럼 홀로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들" 에게로(15절) 나아가기보다는 자발적으로 "들로 나아갔다." 왜냐하면 들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과의 어떤 교제보다도 이런 일을 우선 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들로 나아갔으며," 거기에서 그는, 그가 "그발 강가에서 보았었던 것과 동일한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은 장소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과 이야기하기 위하여" 들로 그를 불렀으나,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에스겔에게 베풀었다. 즉,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기의 "영광"을 보여 주었다(23절). 지금은 그런 환상을 기대할 수 없지만,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 "주의 영광을 보고," "주의 성령에 의해서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에 못지않은 은혜가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이런"명예를 가진다." "너는 주를 찬양하라" (고후 3:18).

Ⅱ. 에스겔은 여기에서 당분간 가르침을 계속하지 말라는 제재를 받는다. 에스겔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서 "엎드렸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장엄함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 이 에스겔을 일으키기 위하여 그에게 "임했을 때" 에스겔은 제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영이 매우 놀라운 사실을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에스겔을 당장 중요한 광장으로 보낼 것이며, 그의 동족에게 사랑을 받게 하며 에스겔과 그의 메시지를 그의 동족들이 받아들이게 하며, 에스겔은 자기 앞에 열린 행운의 넓은 문을 가지며,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대담하게 열게 하기 위해서 말씀의 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에스겔에게 말해진 것은 이런 기대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다.

1. 에스겔을 공중 집회에 보내는 대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라고 지시한다.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24절). 에스겔은 공적인 집회에 나타나서는 안 되며, 설사 에스겔이 이런 공적인 집회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에게 주목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존경도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또 그것은 에스겔과 그의 형제들 모두에 대한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에스겔은 그가 자기 형제들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요,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냉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공적인 집회에 나가는 것을 금했다. 우리가 선택한 일이 때때로 우리에게 심판(징벌)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선생들이나 그들의 백성들이 혹은 양편이 모두 엄숙한 집회(예배)에 무심하게 될 때, 하나님이 선생들을 외딴곳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에스겔은 자신을 폐쇄해야 했다. 그것은 마치 에스겔이 그의 집에 갇힌 것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갇히게 되며, 에스겔이 다음 장(章)에서 말하는 예루살렘의 포위의 징후를 보이기 위해서이다. 에스겔은 "그의 집안에 감금되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의 더 깊은 뜻을 발견할 것이며, 그가 밖에 나갔을 때 사람들에게 말해야 할 여러 가지 것을 습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유다 장로들이" 그를 방문하여, 때로는 "그의 집안," "그의 앞에 앉아서" (8:1) 그의 무아지경의 증인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에스겔이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이셨던 모든 일을 말한" 것은 11장 25절에 가서야 비로소 있었던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연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그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해야 하며, 때때로 그들의 집에 틀어박혀서 독서와 명상에 열중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그들은 모든 자들에게 유익함을 줄 것이다.

2. 하나님은 에스겔을 보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리라고 보증해 주는 대신에, "이스라엘인들이 너를 줄로 동여맬 것"이라는(25절) 사실을 말해 준다. 그것은 다음의 어느 한 뜻이리라.

(1) 그들이 에스겔을 범인으로 취급한다. "이스라엘인들은 그가" 평화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라고 취급해서 형벌을 주기 위해서 "동여맬 것이다." 그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했기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서도 여전히 예언자들을 박해한다.

(2)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들은" 에스겔이 정신을 잃고 있을 때 "그를 동여매려" 할 것이다. 그들은 에스겔의 광폭한 행동을 그가 미친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이다. 군대 장관들은 예후에게 말하기를 "무슨 까닭에 이 미친 사람들이 너에게 왔느냐?" 하고 물었다. 총독 베스도는 "너는 네 정신이 아니구나" 하고 바울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구주인 예수에게도 그와 같이 말했다(막 3:21). 아마도 이것이 에스겔이 자신을 집안에 은폐시켜야 되는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에스겔이 미쳤다는 구실로 그를 동여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그들 가운데로" 나오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저들을 학대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나가는 것을 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에스겔의 입을 여는 대신에, 하나님은 그를 침묵하게 했으며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에스겔은 상당한 기간 동안 벙어리가 되었다(26절). 바벨론에 사로잡혀온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즉 "만약에 우리가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우리의 혀가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 (시 137:6). 에스겔은 누구보다도 더 예루살렘을 기억한다. 그러나 아직 그의 "혀는 그의 입천장에 붙어 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에스겔이 파송된 "백성들은 패역한 족속"이며, 그렇기에 그들은 "책망자"를 둘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그들에게 교훈과 훈계를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충고나 훈계를 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에스겔이 그들에게 대담하게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매우 패역했기" (2:7)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드러나자, 에스겔이 이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침묵을 지켰으니, 그들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뉘우치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뉘우치게 하는 방편을 빼앗긴다. 만약에, 오랜 시련 후에, 책망자가 귀먹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왜 책망자는 벙어리가 될 수 없겠는가? 만약에 에브라임이 "우상에 연합되었다면," "그를 외롭게(alone)할 것이다."

"너는 벙어리가 되고, 책망자가 되지 말지니라"는 말씀은 만약에 에스겔이 벙어리가 아니었다면, 책망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의미한다. 만약에 에스겔이 적어도 말할 수 있었다면, 그는 악한 자의 악을 고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말할 때에," 그리고 에스겔을 통해서 말하려고 계획했을 때는, 그가 "입을 열 것이다" (27절).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비록 잠시 동안은 침묵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오면 입을 다시 열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사역자들에게 말할 때는, 자기가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하기 위해서 사역자들의 귀를 열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응답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입도 열어 주신다. 모세가 그의 백성들에게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너울을 썼었지만, 그가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갈 때는 그 너울을 벗었다(출 34:34).

4. 때가 되어서 그가 다시 사람들에게 말하게 될 때 그에게 성공을 보중해 주는 대신,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 문제를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었다. 에스겔은 그 문제에 대해서 당황해서는 안 되며, 그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그대로 되게 버려두어야 한다. "들을 자는 들을 것이다." 그는 그 말씀을 들음에 의해서 위로를 얻을 것이다. 그 말씀을 "듣는 자는," "그의 영혼이 살 것이며," 그 말씀 "듣기를 꺼려해서 듣지 않는 자"는 영혼의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만약에 네가" 그 말씀을 "비웃으면," "너는 홀로 그것에 대해 고통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이나 그의 예언자가 이것으로 인해서 손실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죄인을 견책하는 그의 임무를 충실히 행할 때 보상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은 죄인을 견책하는 임무를 행하지 않는 예언자를 책망함으로써 그의 정의를 빛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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