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온전히 알아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회자나 성도가 서로 예수님 안에서 올바르게 행하여 서로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자랑이 되라(고후 1:12-18)
12절 헤 가르 카우케시스 헤몬 아후테 에스틴 토 마르튀리온 테스 쉬네이데세오스 헤몬 호티 엔 하팔로테티 카이 에일리크리네이아 데우 우크 엔 소피아 사르키케 알르 엔 카리티 데우 아네스트라페멘 엔 토 코스모 페릿소테로스 데 프로스 휘마스
=====1:12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진실성을 굳게 단언함으로써 자신이 성실하지 못하다고 하는 비난에 대해 윤리적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함'은 헬라어 '하기오테티'를 번역한 것인데 어떤 사본에는 '하플로테티' 즉 '솔직함'으로 되어 있어 학자들 간에는 전자가 본래적이라고 보는 입장과, 후자가 문맥상 본래적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갈린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이 바울의 윤리적 성실성을 주장하는 대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후자의 의미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바울이 '하기오테티'라는 용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솔직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철저한 솔직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 앞에서는 윤리적 측면에서 진술했다면 여기서는 신학적 측면에서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육체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대비되어 제시된다. '지혜'라는 말은 본서보다는 고린도전서에 많이 나오며 본문의 '육체의 지혜'에 해당하는 병행구로 '세상의 지혜'(고전 1:20;2:6;3:19), '인간의 지혜'(고전 2:5) 등이 나온다. '육체의 지혜'는 자신을 신뢰케 함으로 사리사욕에 빠지게 하기 쉽고 결국은 자기 파멸로 이끌고 간다(롬 8:5, 6). 이에 반해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 삶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끊임없는 보살핌이다(6:1).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역은 육체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양심의 증거 하는 바니 - 바울의 행위가 윤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온전한 것이었음을 그의 양심이 증거 한다. '양심'이라는 말은 당시 고린도 지방에 널리 사용되던 용어였을 것이다. 즉 고린도인들은 그들의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을 증언할 때 '양심'에 호소하였던 것이다(고전 8:7,10, 12;10:25,27-29).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양심'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그의 행위가 참되다는 것을 증언해준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자랑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공명심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잘못된 방식으로 자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올바로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의도에서 언급되었다고 한다(고전 1:31;고후 10:17).
13절 우 가르 알라 그라포멘 휘민 알르 에 하 아나기노스케테 에 카이 에피기노스케테 엘피조 데 호티 카이 헤오스 텔루스 에피그노세스데
=====1: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 본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의 서신이 진실하지 못하고 모종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적대자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것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서신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 외에는 다른 의도가 전혀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14절 카도스 카이 에페그노테 헤마스 아포 메루스 호티 카우케마 휘몬 에스멘 카다페르 카이 휘메이스 헤몬 엔 테 헤메라 투 퀴리우 이에수
=====1:14
본절은 다소 완곡어법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목회가 다소 어려움이 있음을 엿보게 한다. 즉 지금은 완전한 상호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래에의 기대를 바울이 본절을 통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 여기서 '대강'이라는 표현이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수를 나타내는지, 아니면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의 의미가 정확하다고 본다. 그들은 바울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온전히 알지 못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 이 날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될 날이다(5:10;고전 1:8;5:5;빌 1:6;2:16;살전 5:2;살후 2:2).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은 바울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심판의 날에는 바울의 진실됨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랑 너희의 자랑 - 이는 심판의 날에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간에 상호 신뢰의 관계가 형성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본 구절은 장래에 고린도 교인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임을 바울이 이미 믿고 있고 또한 그렇게 될 때에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은 바울의 피땀 어린 사도적 사역에 힘입은 것임(고전 4:4-10;11:1)을 암시한다.
15절 카이 타우테 테 페포이데세이 에불로멘 프로스 휘마스 엘데인 프로테론 히나 듀테란 카린 에케테
=====1:15
이 확신을 가지고 -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하여 그의 신실성을 비난하였던 고린도인들에게 먼저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존경과 애정의 관계성을 확인시키고 있다. 바울과 고린도 교인 사이에 생겨난 모든 오해들은 이 전제를 토대로 하여 풀어져야 했다.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 `두 번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듀테란 카린'에 대해서는 '두 번째의 은혜'(a second benefit)로 해석하는 견해와 '두 번의 기쁨'(a double pleasure)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고후 12:14를 보면 바울이 본절을 쓰는 시점 이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였으므로 전자의 견해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본절의 '먼저'라는 단어는 바울이 마게도냐를 가기에 앞서 고린도를 방문할 것임을 시사하고 16절 내용 또한 마게도냐 방문 전후에 각각 고린도 방문이 있을 것을 보여주므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바울은 마게도냐를 다녀가는 길과 오는 길에 두 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과 은혜와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16절 카이 디 휘몬 디엘데인 에이스 마케도니안 카이 팔린 아포 마케도니아스 엘데인 프로스 휘마스 카이 휘프 휘몬 프로펨프데나이 에이스 텐 이우다이안
=====1:16
너희가 보내줌으로 - 여기에는 배에 승선하는 곳까지 동행해 준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가는 길에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이 자기와 함께 동행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경영하였으니'(불로메노스)는 '계획을 했다'는 뜻이다. 최종 목적지가 유대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한 헌금(롬 15:26;고전 16:3, 4)을 가지고 가려고 계획했음을 보여준다.
17절 투토 운 불류오메노스 메티 아라 테 엘라프리아 에크레사멘 에 하 불류오마이 카타 사르카 불류오마이 히나 에 파르 에모이 토 나이 나이 카이 토 우 우
=====1:17
경홀히 있었겠느냐 - 앞절에 언급된 바울의 여행 계획이 변경된 것에 대해 고린도 교회의 바울 적대자들은 그것을 바울을 비난하는 빌미로 삼았다. 아마 그들은 바울이 진실되지 못하고 경솔하며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이다(12절).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이 자기에 대하여 그와 같이 비난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는 대적들의 비난과 중상(中傷) 가운데서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홀히'란 말과 두 번 거듭 언급된 '예', '아니'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적대자들의 비난에 대한 바울의 반박은 반어법적인 수사법으로 되어 있다. 바울의 어조를 살려 본문을 재해석하면,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경솔한 일이었습니까? 또는 인간적인 동기로 계획을 세워 편리할 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려는 줄 압니까?"(공동번역)가 된다. 바울은 '육체', 곧 자기 이익을 따라 임의로 계획을 변경하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고 성도들의 유익을 구하였다(2:1-3;행 16:6;고전 16:7).
18절 피스토스 데 호 데오스 호티 호 로고스 헤몬 호 프로스 휘마스 우크 에게네토 나이 카이 우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 '미쁘시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는 사업의 거래나 공적 의무의 수행에 있어서 `신실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란 뜻이다. 구약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명칭이기도 하다(신 7:9;사 49:7).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함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거하여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사 2:2-4;눅 1:68-79;고전 1:9), 이것이 바울의 신실함의 근거가 된다면 그의 신실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울은 매우 효과적이고도 담대(膽大)하게 자신을 변증하고 있다.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은 그의 여행 계획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까지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13절).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그의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 매사에 하나님의 종 된 자로서 신실함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헬라어 성경 강해 고린도후서] 고난에 임한 하나님의 위로에 감사(고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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