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 내사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구원자이며 나의 구속자가 됩니다. 또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의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창조자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속자와 창조자이신 예수님(골 1:9-17)
9절 디아 투토 카이 헤메이스 아프 헤스 헤메라스 에쿠사멘 우 파우오메다 휘페르 휘몬 프로슈코메노이 카이 아이투메노이 히나 플레로데테 텐 에피그노신 투 델레마토스 아우투 엔 파세 소피아 카이 쉬네세이 프뉴마티케
=====1:9
이로써...우리도 듣던 날부터...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여기서부터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 기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에바브라의 귀환과 골로새에 대한 소식의 청취에서 강하게 동기된 것이다. 바울이 에바브라를 통해 들은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상황,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열매 맺는 생활을 하는 것도 있었지만, 다소 불안한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대해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불만이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 - 공동번역은 이를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번역하고 있다. 분명 '지혜와 총명'은 성령의 역사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 성령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아는 것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에피그노신'에서 '알다'는 피상적인 인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을 뜻한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요구,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 온전한 지식이다.
10절 페리파테사이 휘마스 악시오스 투 퀴리우 에이스 파산 아레스케이안 엔 판티 에르고 아가도 카르포포룬테스 카이 아욱사노메노이 에이스 텐 에피그노신 투 데우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 본문은 당시 교회들에서 사용되었던 정형화된 격언과도 같은 것이었다(엡 4:1 ; 빌 1:27 ; 살전 2:12). '주께 합당히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의 필연적인 전개라고 할 수 있다(9절). 이것은 기독교의 지식이 지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행실을 지향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범사에 기쁘시게 - '주께 합당히 행함'은 구체적으로 '주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기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스케이안'은 거의 아부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미리 알아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에게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모종의 반대 급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 '열매를 맺게'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도의 삶이 계속해서 열매 맺는 것 임을 말해준다.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과 더불어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의 구체화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 '하나님을 아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같은 의미일 수 있으나 전자가 후자보다 더 깊은 영적 성장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11절 엔 파세 뒤나메이 뒤나무메노이 카타 토 크라토스 테스 독세스 아우투 에이스 파산 휘포모넨 카이 마크로뒤미안 메타 카라스
=====1: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주께 합당한 삶, 그리고 열매 맺는 삶을 넘어 하나님의 권능을 골로새 교인들이 체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으로 향하고 있다. 본문의 '능하게 하시며'는 현재형으로, 성도에게 발휘되는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영광의 힘'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더듬어 올라갈 수 없는 초월적 영역에서 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덤의 예수를 일으킨 능력이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다.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 '견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넨'는 정해진 목표 지점을 향해 고난을 무릅쓰며 정진하는 것을 뜻하는데, 경주자가 총력을 기울여 달려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는 말이다(히 12:1). 결국 '견딤'은 유혹과 저항을 물리치고 한 곳 목표만을 향하여 묵묵히 달려가는 것을 뜻한다. 또한 '오래 참음'은 무거운 짐에 눌리거나 실패를 당하여도 좌절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리킨다. 분명 '견딤'과 '오래 참음'은 즐거움과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기쁨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바로 '영광의 힘'을 좇아 오는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한다.
12절 유카리스툰테스 토 파트리 토 히카노산티 헤마스 에이스 텐 메리다 투 클레루 톤 하기온 엔 토 포티
=====1:12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 '기업'에 대한 언급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영토를 분배받았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것이 하나님의 옛 백성들에게 주어진 '육적인 기업'이라고 한다면,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분깃은'영적인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카노산티'는 근본적으로 '충분하게 하다', '적절하게 하다'는 뜻으로 갖추어진 자격을 의미한다. 이 자격은 인간이 자생적으로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것인 바 자격 없는 자를 회개시켜 빛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본절의 요지는 '감사'이다. '감사'는 '열매 맺음', '자라남', '능하게 됨'에 이어지는 신앙의 중요한 덕목으로 성도의 필연적인 삶의 양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격을 주며 장차 받을 영적 기업까지 허락하셨으므로 감사는 그 은혜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13절 호스 에르루사토 헤마스 에크 테스 엑수시아스 투 스코투스 카이 메테스테센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투 휘우 테스 아가페스 아우투
=====1:13
흑암의 권세 - 이는 앞절의 '빛 가운데서'와 대조된다. 이러한 대조는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에 나오고 쿰란의 문서들에서도 발견되는 개념이나 바울이 여기서 그들의 개념을 빌어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악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흑암'과 '선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빛'의 대조는 보편적인 인간 세계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흑암의 권세'는 일찍이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 직전에 체포되셨을 때 예수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바(눅 22:53), 그 세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성도들을 탄압하거나 오도하는 인간들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들의 배후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비가시적인 사단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사랑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란 뜻이며 '나라'는 종말론적이고 영토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골로새 교인들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며(요 3:3-5)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장차 기업으로 받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전혀 배제할 수도 없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며 반드시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미래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미 현재에 도래해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 나라는 지금 성도들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14절 엔 호 에코멘 텐 아폴뤼트로신 디아 투 하아마토스 아우투 텐 아페신 톤 하마르티온
=====1:14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구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뤼트로신'은 '값을 지불하고 어떤 대상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 매여 종노릇 하던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취하였음을 말해준다(롬 3:24, 25 ; 엡 1:7 ; 히 9:14, 15).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15절 호스 에스틴 에이콘 투 데우 투 아오라투 프로토토코스 파세스 크티세오스
=====1:15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고후 4:4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했고 예수 자신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선언하기도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분명한 현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실체, 본성, 그리고 영원성에 있어서 성부와 그리스도가 완전한 동등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최초로 창조된 피조물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아리우스(Arius A.D. 256-336)는 본절을 근거로 그리스도도 피조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본문은 결코 그렇게 이해될 수 없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본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요 1:1, 2 ; 8:58 ; 히 1-3 ; 10:5-9). 본문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시간적으로 만물의 창조 이전에 존재하였고 그런 만큼 만물에 대한 우월성을 갖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16절 호티 엔 아우토 에크티스데 타 판타 타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카이 타 에피 테스 게스 타 호라타 카이 타 아오라타 에이테 드로노이 에이테 퀴리오테테스 에이테 아르카이 에이테 엑수시아이 타 판타 디 아우투 카이 에이스 아우톤 에크티스타이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 '그에게 창조되되'에서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창조의 실재적 주역임을 말해준다. 본절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에게서 나왔고 그를 위하여 존재하며 그를 향하고 있다(요 1:3 ; 히 1:2).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 - 이는 골로새 교회 이단자들의 사상 체계에서 뚜렷이 부각되었던 천사 계급에 관한 암시인 듯하다. 본문을 천사들 중에도 등급과 위엄의 차이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천사들의 계급이 아니라 천사들 조차도 그리스도의 창조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며, 이로써 당시에 퍼져 있던 천사 숭배가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해주는 데 있다(Vaughan).
17절 카이 아우토스 에스틴 프로 판톤 카이 타 판타 엔 아우토 쉬네스테켄
=====1:17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이는 다소 철학적인 표현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는 만물의 통일의 원리이며 모든 창조물을 유지하는 분임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는 온 우주에 혼돈 대신 조화를 가져다주는 응집의 원리이신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가 피조 된 세계의 외적 질서의 중심이 되심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할 때 본질적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헬라어 성경 강해 골로새서] 골로새 성도를 칭찬하는 바울(골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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