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헬라어 성경 강해 데살로니가후서] 바울의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살후 1:5-12)

엘벧엘 2021. 10. 2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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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고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 믿음을 버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바울은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가운데 고통을 당하면서도 믿음과 신앙을 지킨 성도들에게 안식으로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까지 믿음과 신앙을 지키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바울의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살후 1:5-12)

 

5절 엔데이그마 테스 디카이아스 크리세오스 투 데우 에이스 토 카탁시오데나이 휘마스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휘페르 헤스 카이 파스케테

=====1:5

  이는 - 바울은 이 접속사를 사용함으로써 앞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5절 이하 10절까지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고자 하고 있다. 즉 본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함축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앞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전개하기 위한 전환점이 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 - 현재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자신들의 환난과 핍박을 악한 박해자들의 번영이라는 현실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참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시행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은 구약 선지자 하박국도 하나님께 가졌던 적이 있다(합 1:2-4). 그러나 바울은 미래에 각 개인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표'(엔데이그마)는 '분명한 표식', '증거'의 뜻으로 쓰인다. 즉 데살로니가에서 핍박받는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은 바로 그들이 장차 있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영광을 받는 증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극심한 핍박 속에서 지켜 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보증이 된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 본 구절은 앞 문맥과  동격 절로서 접속사 '이는'에 대한 수식적 설명이다. 본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참아낸다고 해서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나 공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엡 2:8, 9). 이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소유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보호해준다(벧전 1:5).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 본문은 현재 시제로서 과거의 고난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뒤따른다(빌 1:29). 이 고난은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당하셨으며(벧전 2:21-25),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도 당하고 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실제적이며 필연적인 것이다(요 16:33). 그런데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그들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받은 것이어야 한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된다(벧전 2:20).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그것이 정금보다 귀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이다(벧전 1:7).

6절 에이페르 디카이온 파라 데오 안타포두나이 토이스 들리부신 휘마스 들립신

=====1: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죄를 간과하지 않고 반드시 형벌하시고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신다. 이에 대해 레온모리스(Leon Morris)는 '이 진리는 어떤 철학적 견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에 뿌리박고 있다'라고 진술했다. '갚으시고'의 헬라어 '안타포두나이'는 '합당한 것을 돌려준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살전 3:9에서는 '보답할꼬'라고 번역되어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롬 11:35), 본문에서처럼 부정적 의미로도 사용된다(롬 12:19;히 10:30). 아무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報應)의  원칙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으로(히 10:30) 반드시 그들의 행한 악을 따라 갚으신다(롬 1:27). 그러므로 핍박받는 성도들은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여야 한다'(살전 5:15). 그뿐 아니라 더 적극적인 태도로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야 한다(벧전 3:9).

7절 카이 휘민 토이스 들리보메노이스 아네신 메드 헤몬 엔 테 아포칼륍세이 투 퀴리우 이에수 아프 우라누 메트 앙겔론 뒤나메오스 아우투

=====1:7

  우리와 함께 - 여기서 '우리'는 바울 자신과 실라와 디모데를 가리킨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그 외 동역자들도 그들과 같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고후 11:23-28). 그뿐 아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일체감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이 환난이나 안식에 동참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 '안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네신'으로 본래 팽팽하게 당긴 활의 줄을 원래의 상태로 느슨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역경에서 해방되다', '수고를 그치고 쉬다'는 휴식(休息)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바울은 그들이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결국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과정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다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Calvin). '저의 능력의 천사들'이란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들로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보내진 존재들이다(마 13:49;24:31;살전 4:16). 성경은 종말에 대한 묘사를 할 때 종종 심판과 천사들을 결부시켜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10절)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마  16:27, Gloag).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 여기서 '때'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때, 곧 대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위엄 가운데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이다. '하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라누'로 여기에서는 단순히 문자적으로 '공중'(air, 행 11:6), '하늘'(sky, 계 6:14)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heaven, 마 5:16;계 3:12) 곧 '하나님의 보좌'(마 23:22;막 6:41)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그곳에서 이 땅에 오셨고(요 3:13), 다시 그곳으로 승천하셨으며(벧전 3:22), 또다시 재림하실 때에 천사들을 대동하고 그곳에서 내려오실 것이다(마 24:30). 이것은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주고 있다(官村武天).  한편 '나타나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립세이는  일반적으로 '계시', '폭로', '드러냄'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종말론적 의미로서(롬 8:19;고전 1:7) 마지막 날에 감추었던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됨을 가리킨다(TDNT). 즉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비밀에 싸였던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숨김없이 밝혀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가 '불꽃 중에'  오신다고 진술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주권과  영광과  위엄을  나타낸다(출 3:2;사 66:15;계 1:13-15).

8절 엔 퓌리 플로고스 디돈토스 에크디케신 토이스 메 에이도신 데온 카이 토이스 메 휘파쿠우신 토 유양겔리오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 여기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이  말이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갈 4:8) 견해(Robertson). (2) 이 말이 이방인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누구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려는 은혜와 지식을 거절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Leon Morris).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 구절 다음에 사용된 접속사 '카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카이'가 일반적으로 '그리고'란 의미로 사용되지만 '즉'이란 의미로도 사용된다. 만약 '카이'가 '그리고'의 의미라면 첫 번째 견해가 타당하며 '즉'의 의미라면 두 번째 견해가 타당하다. 그렇지만 본절에서 '카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분명하게 단정 지을 수 없으므로 두 견해 모두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 - 여기에서도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 유대인 선동가들과 이방인 읍장들이라는(6절;행 17:5-9) 주장(Robertson). (2) 전반 절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병행 관계로 보고 앞 구절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들었지만 그 궁극적 계시를 무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Leon Morris). 그렇지만 앞 구절에서 설명한 바대로 접속사 '카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따라 본 구절의 해석이 달라지므로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 단정 지을 수 없다. 아무튼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의 종말적 계시를 거부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술함으로써 복음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형벌을 주시리니 - 본 구절은 히브리적인 표현법이다(Leon Morris). 구약성경에서 형벌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집행할 수 있는 그분의 전유물로 소개되어 있다(신 32:35). 그런데 그 형벌의 집행권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9절 호이티네스 디켄 티수신 올레드론 아이오니온 아포 프로소푸 투 퀴리우 카이 아포 테스 독세스 테스 이스퀴오스 아우투

=====1:9

  이런 자들이 - 여기에 쓰인 헬라어 '호이티네스'는 질적인  면을 나타내는 관계대명사로 '이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선행 절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 여기서 '주의 얼굴'이란 '주의 임재' 또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떠난다'는 것은 악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게 되는 영광과 기쁨으로부터 단절,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Alford). 또한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난다'는 것은 형벌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지금 악행 하는 자들이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그 영광 앞에서 그 힘이 무력해질 것을 시사한다. 주의 영광스러운 '능력'에 의해서 그들의 사악한 행동은 심판을 받고 주님으로부터 영원히 쫓겨날 것이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멸망'의 헬라어 '올레드론'은 '완전히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린다'란 의미로서 단순히 멸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몰락하여 삶의 의욕이 송두리째 박탈된 상태를 말한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삶에 대한 가치를 모두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마 7:23;8:12;눅 13:27). 한편 '형벌'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켄'은 단순히 범죄자에 대한 형벌을 가리키는 '콜라시스'나 감정에 치우친 형벌을 가리키는 '티모리아'와 달리 공의에 입각해서 충분한 심리(審理)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형벌을 가리킨다. 바울은 본 구절에서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공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0절 호탄 엘데 엔독사스데나이 엔 토이스 하기오이스 아우투 카이 다우마스데나이 엔 파신 토이스 피스튜우신 호티 에피스튜데 토 마르튀리온 헤몬 에프 휘마스 엔 테 헤메라 에케이네

=====1:10

  그 날에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 헤메라 에케이네'는 보통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사 2:11, 17). 성경에는 '그 날'의 시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직 '그 날'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으로(마 24:36) 언급되며 예수께서는 '그 날'에 대한 징조들을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24:3-51;눅 21:10-36). 한편 '그 날'은 악행 하던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날이 되겠지만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기쁨과 영광의 날이 될 것이다(7절;2:1;살전 4:17).

   강림하사 - 그리스도의 강림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므로 바울은 강림하시는 예수의 모습에 대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라는 묵시 문학적인 용어로 묘사하였다.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 '성도들에게서'와 '모든 믿는 자에게서'란 구절 앞에 헬라어 성경에는  '엔'(...안에서)이라는 전치사가 삽입되어 있다. 이대로 직역하게 되면 성도들이 영광을 반사(反射)하는 자가 될 것임이 강조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이 택한 백성의 삶  속에 거하시면서 그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신다(시 89:7). 더욱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의 영광이 너무도 찬란하고 놀랍기 때문에 기이히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행하신 일로 인하여 그날에 성도들은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갈이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그 영광을 소망하라는 암시와 함께 그들이 당하는 핍박과 박해 속에서 낙심치 않고 믿음 위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확신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11절 에이스 호 카이 프로슈코메다 판토테 페리 휘몬 히나 휘마스 악시오세 테스 클레세오스 호 데오스 헤몬 카이 플레로세 파산 유도키안 아가도쉬네스 카이 에르곤 피스테오스 엔 뒤나메이

=====1:11

  이러므로 - 본절은 헬라어 접속사 '에이스 호'를 사용하여 앞 문단 전체(5-10절)에 언급된 내용을 압축하면서 동시에 이후에 진술될 내용이 앞 진술의 결론적 교훈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에이스 호'는 '이 목적을 위해서'라는 뜻으로  직역될 수 있다. 골 1:29에도 이와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그들의 영적 상태에 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  나가며(엡 4:13-16),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는 신앙을 유지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에 있어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에 기초하여 간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구원을 얻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Thomas L. Constable). '부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세오스'는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서 복음의 특권을 얻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롬 11:29;엡 1:18)  본절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특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모든 선을 기뻐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안 아가도쉬네스'는 직역하면 '선의 욕구'란 의미로 성도들이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 중 한 부분이며(갈 5:22, 23) 올바르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활동적인 성품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 구절에 대해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 속에 있는 선한 의지를 일깨우셔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시는 것으로 해석한다(Leon Morris). 이 해석은 다음에 이어지는 '믿음의  역사'란  표현과 부합된다.

   믿음의 역사 - 살전 1:3에도 이와 동일한 표현이 나오는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가졌던 처음의 믿음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고 있다(Robertson). 믿음은 결코 정지(停止)하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인 행위를 동반한다(약 2:20-26). 이에 대해 혹자는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하나님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Leon Morris). 본절에서 '믿음의 역사'란 믿음을 통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맺은 열매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 바울은 앞에서 언급된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즉 모든 선한  성품과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모든 선한 마음과 믿음의 일 둘 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했다.

12절 호포스 엔독사스데 토 오노마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엔 휘민 카이 헤메이스 엔 아우토 카타 텐 카린 투 데우 헤몬 카이 퀴리우 이에수 크리스투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 본 구절은 어려운 문장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본 구절에 대하여 크게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하나님과  주'는 헬라어로 '데우'와 '퀴리우'인데 이 두 단어 중에  하나님 앞에만 관사가 사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이며 주(主)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될 경우 본 구절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Robertson). 혹자는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고유 명사처럼 관사가 없이 사용될 수 있기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서로 구분하여 해석하기도 한다(Leon Morris, Gloag).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 1절;2:16;살전 1:1;3:11 등에서 성부와 성자가 서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본 구절은 후자의  견해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노마'는 그리스도를 지칭할 경우,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위엄과 주권과  능력을 가리킨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여  복음을 전파했다. 또한 '너희 가운데서'란 표현은 그리스도와 성도 간의 밀접한 통일성을 나타내는 말이다(요 15:1-11).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성도들은 주안에서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것은 주께서 그들 속에 계시고 그들이 주 안에 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롬 6:11, 23;고전 1:5). 바울은 이러한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롬 4:16;11:5, 6;엡 2:5, 8).

[헬라어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핍박 중에 믿음을 지킨 성도 격려(살후 1:1-4)

 

[헬라어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핍박 중에 믿음을 지킨 성도 격려(살후 1:1-4)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면서 축복하고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것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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