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헬라어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바울이 성도들을 칭찬함(살전 1:5-10)

엘벧엘 2021. 10. 26. 10:07
반응형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말로만 듣지 않고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님을 본받고 바울이 가르쳐 준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재림하시기까지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서 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바울이 성도들을 칭찬함(살전 1:5-10)

 

5절 호티 토 유앙겔리온 헤몬 우크 에게네데 에이스 휘마스 엔 로고 모논 알라 카이 엔 뒤나메이 카이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엔 플레로포리아 폴레 카도스 오이다테 호이오이 에게네데멘 엔 휘민 디 휘마스

=====1:5

  본절에서부터 2:16까지는 바울이 처음으로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상황을 회고한 부분이다.

   이는 - 접속사 '호티'는 앞에 있는 절을 받아 그 근거를 밝힌다. 즉 바울이 데살로니가인의 피택을 확신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신당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결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 복음 -'복음'이란  말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통하여 8회 나오는데, 이는 선포의 행위보다는 선포의  내용,  곧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쁜 소식을 강조한다. 한편 본문에서 소유격으로 되어 있는 '우리'라는 호칭은 대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복음을 전한 행위와 그 사람들을 가리킨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을 창시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부여받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이행하였다. (2)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필요로 하며 또 복음을 소유한 자들임을 암시한다.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 '말로만'은 성령의 감화시키는 능력을 동반하지 않는 설교를 의미한다.  이런 설교는 아무리 웅변적이고 수사적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지적인 의사 전달에 그치므로 청중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바울은 아덴에서 웅변적인  설교를  했으나 냉담한 반응을 체험한 적이 있었다(행 17:16-33). 그 후로 바울은 결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는 결의를 굳게 하였다(고전 2:4, 5).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 능력과 성령과 확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능력은 외적 현상이고, 확신은 내적 요소이며, 성령은 능력과  확신의 원동력이다. 첫 번째 요소인 '능력'(뒤나메이)은 '이적'(뒤나메이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력'(靈力)을 가리킨다(Van Leeywen). 이 말은 영어에서 '다이나마이트'(daynamite)로 번역되어  폭발하는 힘을 나타내며, 사람의 마음속까지 변화시키는 성령의 감화력을 의미한다.  복음이 전파될 때 인간들을 파멸의 세력에서 끄집어내어 새 생명 가운데 옮겨놓은 것은 바로 이 '능력'에 기인한다. 두 번째 요소인 '성령'(프뉴마티 하기오)은 앞에 있는 수어인 '능력'의 출처(出處)이다. 성령은 언제나 능력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실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능력을 체험한 자들은 궁극적으로 성도의 신분으로 변화된다. 세 번째 요소인 '큰 확신' 역시 성령의 활동하심에  기인한다. 본절에 '확신'으로 번역된 헬라어 '플레로포리아'는 문자적으로 '충만', '풍부'의 의미를 가지며,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 가운데 내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Bruce).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2:1-12에 나온다. 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내에 숨어있던 바울의 적대자들을 경계하고 있다(2:2, 5:3 : 5). 이들은 동방의 신비주의 사상을 가지고 자기들만의 독특한 교회를 세운 '시몬'(행 8:9)과  '엘루마'(행 13:8) 등으로서, 항상 말로써 사기적 수법을 행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복음의 진리 가운데 서지 못하도록 방해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자신이 전하여 준 능력의 복음과 성령과 큰 확신을 간직할 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6절 카이 휘메이스 미메타이 헤몬 에게네데테 카이 투 퀴리우 덱사메노이 톤 로곤 엔 들립세이 폴레 메타 카라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1:6

  바울은 이제 본절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이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바울과 그 일행의 신앙의 모범을 따랐음을 말하고 있다. 즉 전도를 받은 그들이 복음으로 인해 받은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 '환난'(들립세이)은 외적 환경에 의해 생기는 고통과 핍박을 의미한다. 데살로니가에는 처음부터 복음에 대한 반대가 강하게 일어났으며, 이러한 환난은 바울이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받은 환난에 대해서는 2:14과 행 17:1-10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환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었다. 혹자는 본절과 관련하여 '신자는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허락된 정도만큼 기쁨을 누린다'라고  말하였다(Lightfoot).

   도를 받아 - '도'(톤 로곤)는 '복음' 즉 '말씀'을 의미한다.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신실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복음을 받기 전에는 죄의 세력에 매이는 생활을 했으나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는 전혀 다른 삶, 즉 성령의 능력에 힘입은 삶을 살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의 순서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신앙은 주(主)를 믿는 것이나 신앙생활은 보다 앞선 성도를 본받는데서  향상된다.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증거 하는 자는 말뿐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서 모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만일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전도자의 삶을 통해서 성도의 삶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무의미한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신앙을 본받는 자들이 되었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  되었다. 한편 바울은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는 자들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다(고전 4:16;11:1;빌 3:17).

7절 호스테 게네스다이 휘마스 튀푸스 파신 토이스 피스튜우신 엔 테 마케도니아 카이 테 아카이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의  본이 되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인들도 전(全) 헬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B.C. 146년 이후 헬라 지경의 두 개의 거대한 주로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마게도냐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며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였다. 특별히 마게도냐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는 남방 유럽의 상업 중심 도시로서 이러한 지리적 조건에 의해 그들의 신앙을 더욱더 급속히 헬라 전 지역에 전파(傳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요인은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전하였다는 것에 있으며,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본이 되었다는 데에 있다.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튀폰'은 '찍어서 생긴 표', '일격을 가한 흔적'이란 뜻으로서 '똑같이 따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8절 아프 휘몬 가르 엑세케타이 호 로고스 투 퀴리우 우 모논 엔 테 마케도니아 카이 아카이아 알라 카이 엔 판티 토포 헤 피스티스 휘몬 헤 프로스 톤 데온 엑셀렐뤼덴 호스테 메 크레이안 헤마스 에케인 랄레인 티

=====1:8

 데살로니가 교회의 진보를 본 바울의 기쁨의 상태는 그가 그들을 칭찬하는  정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바울이 한 교회를 향하여 다른 교회들의 모본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곳은 오직 여기뿐이므로 그 기쁨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주의 말씀이...들릴 뿐 아니라 -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로부터 각 곳으로 전파된 사실을 지적한다. '주의 말씀'(호 로고스 투 퀴리우)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의 예언서에 자주 나오는 말로서 바울  서신에서는 본서(4:15)와 후서(살후 3:1)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는 바가 무엇임을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자신들이 선포하고 있는 말씀이 인간 지혜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신적 기원을 가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를 출발점으로 하여 온 헬라 경내에 계속 퍼져 나갔다. 한편 '들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케타이는 '소리를 울려낸다'는 뜻으로 계속해서 퍼져 나가는 반향(反響)을 의미한다. 이는 나팔 소리가 울려나가는 것처럼(Chrysostom) 또는  우뢰 소리가 울려나가는  것처럼(Lightfoot) 크고 분명하게 선포되는 것을 암시한다. 즉 복음이 데살로니가인들로  말미암아 온 헬라 경내에 힘 있게 전파된 사실을 말한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 바울은 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에 대해 자랑한 바 있다(고후 8:1-5). 그러나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그들에 대해 자랑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훌륭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9절 아우토이 가르 페리 헤몬 아팡겔루신 호포이안 에이소돈 에코멘 프로스 휘마스 카이 포스 에페스트렙사테 프로스 톤 데온 아포 톤 에이돌론 둘류에인 데오 존티 카이 알레디노

=====1:9

  저희가 -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위시한 각처의 교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 2:1 이하에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들어간 날은 그에게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비방과 훼방, 박해 등 많은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구체적  내용은 2:1-3 주석을 참조하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회개를 묘사한 말이다. '돌아와서'에 해당하는 '에페스트 렙사테'는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헬라어에서 '마음을 고침'을 의미하는 '메타노이아'(마 3:8)와 함께 회개를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이다. 그리고 '우상'(에이돌론)은 '신상'(행 7 :41)을 의미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대부분 헬라계 이방인으로 헬라의 다신교적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이었다. 이러한 우상 숭배에 빠져 방황하던 자들이 참 하나님에 대한 복음을 듣고 이제는 이전의 모든 생활( 우상 숭배 등)에서 돌이켜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날의 악습들에 대한 단호한 단절, 즉 생(生)의 근본적이고도 전인격적인 전환을 수반한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 - 이는 성경 전체에 편만한 사상을  반영한다(삼하  7:28;렘 10:10;단 2:47;롬 3:4;계 6:10). 하나님은 죽은 우상과 대조되는 살아계신 분이며, 허탄하고 비실재적인 것과 대조되는 참되신 분이다.

   섬기며(돌류에인) - 이 말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는 전심을 다해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감격을 나타낸다.

10절 카이 아나메네인 톤 휘온 아우투 에크 톤 우라논 혼 에게이렌 에크 네크론 이에순 톤 뤼오메논 헤마스 아포 테스 오르게스 테스 에르코메네스

=====1:10

 본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의 중요한 교리들이 제시(提示)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둘러싼 종말의 사건들이 강조되고 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도에서 역설한 바 있거니와 (행 17:3), 그들은 이를 그들의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다(행 2:24;3:15;13:30). 사실 초대 교회에서  언제나 강조하였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역사에 직접 기인하는 것으로서 벵겔(Bengel)은 이에 대하여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변증이다"라고 설파하였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 그리스도의 '재림'은 본서와 데살로니가후서의 중요한 주제이다. 바울은 재림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경계하였으나(살후 3:10, 11) 재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재림의 때는 아버지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하나(마 24:36), 분명한 것은 이때 신자의 구원이  완성되고 불신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4:13-17 주제 강해 '그리스도의 재림', 마  24:1-14 주제 강해 '성경 종말론의 관심과 그 해석상의 문제점' 참조) 한편 '기다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메네인'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용어로써 바울이 보통 사용하는 '아페크데코마이'(롬 8:19;고전 1:7;빌 3:20, '고대하다') 보다 훨씬 절실하게 소원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아나메네인'은 누군가가 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을 인내와 신뢰로써 기다림을 함축하는 개념이라고 말하였으며(Grimm-Thayer) 혹자는 끊임없이 기대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하였다(Findlay). 그리스의 부활로 말미암은 그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성도가 갖는 최고의 소망이며, 아울러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과 인내가 요구된다.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  '장래  노하심'(테스 오르게스 테스 에르코메네스)은 '오고 있는 진노'(the coming wrath, NIV)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뜻한다(습 1:14;요  3:36;롬 9:22;엡 5:6;골 3:6).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노하심'(에르코메네스)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확실히 이루어질 사건임을 나타낸다(렘 14:10;암 3:2;롬 1:18).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노하심 이전에 있어야 할 예언된 사건들이 그때 당시에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15, 16). 그러나 성도들은 이때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의  때라고  생각하여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한편 '건지시는'(뤼오메논)이란 말은 '노하심'과 동일한 용례로써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항상 현재적으로 예수께서 구원하실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 성경 강해 데살로니가전서] 선택받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살전 1:1-4)

 

[헬라어 성경 강해 데살로니가전서] 선택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살전 1:1-4)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보

el-bethel.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