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 고난과 능욕을 당했지만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위탁받았기 때문에 자신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열심히 전하여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살전 2:1-12)
1절 아우토이 가르 오이다테 아델포이 텐 에이소돈 헤몬 텐 프로스 휘마스 호티 우 케네 게고넨
=====2:1
바울은 앞장의 내용을 연결하는 등위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를 사용함으로써 본장을 시작하고 있다. 이는 본장 1-16절의 내용이 1:5-10절 내용의 확대임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본장이 단순히 동일한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장에는 바울의 복음 전파 이면에 악한 동기들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적대자들(거짓 사도들, 유대주의자들, 영적 열광 주의자들 등)에 대한 그의 변호가 함축되어 있다.
형제들아(아델포이) - 바울이 증거 한 복음을 부정하고 이를 방해하는 자들과는 달리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지칭한다. 이 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4 주석을 참조하라.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 '헛되지 않은'이란 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1) 혹자는 '빈 손으로 오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2) 혹자는 '거짓되지 않은' 혹은 '특별한 목적이 없는'으로 해석한다(Hiebert). (3) 혹자는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일행이 행한 사역의 결과를 가리킨다고 본다(Best). 이 중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네 게고넨'은 직역하면 '헛것으로 되지 않은', '공허하거나 무익하지 않은'이란 뜻이며, 완료형으로써 그 효능(效能)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복음 사역으로 인해 데살로니가 지역에 많은 개종자들이 나오게 된 사실을 시사한다. 즉 바울 일행이 열심을 품고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일은 분명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아울러 바울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다른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전해 들은 이야기로서 그것을 알고 있으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직접 경험한 자들로서 '친히'(아우토이) 알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절 알라 카이 프로파돈테스 카이 휘브리스덴테스 카도스 오이다테 엔 필립포이스 에파르레시아사메다 엔 토 데오 헤몬 랄레사이 프로스 휘마스 토 유양겔리온 투 데우 엔 폴론 아고니
=====2:2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줌으로 그로 인해 수익을 얻을 수 없게 된 주인에게 기이한 풍속을 전한다는 이유로 고소당하여 모진 매를 맞고(고난) 정확한 판결도 없이 옥에 갇혔다(능욕).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행 16:19-34을 참조하라. 바울은 빌립보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그토록 모진 고난과 인격적 능욕을 당하고서도 곧바로 데살로니가로 와서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증거 하였다. 빌립보는 데살로니가와 같은 마게도냐에 있는 성이고 바울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곧바로 갔으므로 당시 바울이 겪은 고난에 대한 소식은 데살로니가인들도 확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 바울은 언제 어느 곳에서 나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용기와 확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영적인 힘이었다.
많은 싸움 중에 - 바울이 당한 고난과 능욕은 그가 데살로니가에 왔을 때에도 끝나지 않았다(행 17:13). 거기서도 역시 전도할 때에 많은 싸움(고난)이 있었으며, 이 싸움은 특히 유대인들로 인한 것이었다. '싸움'의 헬라어 '아고니'는 운동 경기에서 경기자가 일등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며, 이 말에서 영어의 '고투'(苦鬪)를 뜻하는 'agony'가 파생되었다.
하나님의 복음(유앙겔리온 투 데우) - 바울은 1:5에서 자신이 믿음 가운데서 확신 있게 증거 한다는 의미로 '우리 복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복음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창시하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담대하게 복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증거하기 때문이었다(롬 1:1;고후 11:7).
말하였노라(에파르레시아사메다) - 이 말의 명사형 '파르레시아'('대담한 말')는 '판'('모든')과 '레시스'('말')의 합성어로서 원래 언론의 자유를 의미했으며, 여기서는 '숨김없이 말하는 것'을 뜻한다.
3절 헤 가르 파라클레시스 헤몬 우크 에크 플라네스 우데 엑스 아카다르시아스 우테 우데 엔 돌로
=====2: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으나 다른 좋지 않은 설교자들의 무리와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복음 전파의 동기가 순수함을 강조하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권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는 '파라'('곁으로')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 '돕기 위하여 불러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격려'의 뜻도 가지며, 여기서는 '권면'의 의미로 사용되어 궁극적으로 '복음 전도'를 나타낸다. 즉 바울은 그릇된 것을 전한다는 비난에 대하여 자신의 전도 내용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음을 변증하고 있다.
간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네스'는 '속임'(deceit)보다는 '오류'(error, NIV)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결코 오류가 없는 참 진리임을 나타낸다.
부정 - 이것의 헬라어 '아카다르시아스'는 당시 이교 사상들에게 만연하였던 '성적 부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바울도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비난받았음을 암시한다(Morris).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결코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음은 물론 복음을 전하면서 그러한 행위를 조장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궤계 - 이 말의 헬라어 '돌로'는 당시 소피스트(Sophist)나 마술사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마술적 속임수로써 부정한 이욕(利慾)을 채우던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바울은 거짓된 종교의 대부분은 어떤 열광적인 긴급성을 띠고 메시지를 선포하며 이로 인해 많은 이득을 취하나, 자신은 결코 거짓이나 부정에 근거하지 않으며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음만을 전파함을 강조하고 있다.
4절 알라 카도스 데도키마스메다 휘포 투 데우 피스튜데나이 토 유양겔리온 후토스 랄루멘 우크 호스 안드로포이스 아레스콘테스 알라 토 데오 토 도키마존티 타스 카르디아스 헤몬
=====2:4
오직(알라) - 이 말은 바울이 앞절에 열거한 것과 같은 이교도들의 중상모략에 대하여 더욱 강한 어조로 상세하게 변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 '옳게 여기심'으로 번역 된 '데도키마스메다'는 금과 은의 제련에 사용되는 말로서 시험을 통해 그 진가를 알아내는 것을 가리킨다(벧전 1:7).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후에 합격하여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위임되었음을 강조한다(행 9:1-31).'부탁을 받았으니'의 헬라어 '피스튜데나이'는 보통 '믿는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전도자로 신임하시고 복음을 맡기셨음을 뜻한다. 분명 복음은 신적 기원을 가진 것이기에(2절)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을 통해 그의 사신(使臣)을 선택하실 때에만 복음의 위임이 가능하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위임받은 복음 전도자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바른 태도를 가리킨다(갈 1:10). '기쁘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레스콘테스'에는 '남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 자신이 인기와 명예에 영합(迎合)하여 사람을 의식하며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기를 기뻐하였다(롬 1:1;빌 1:1). 한편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복음 전도가 진실된 것임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감찰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마존티'는 앞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와 같은 어군의 동사로서 '시험하다', '시험을 통해 인정하다'란 뜻이며,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포함하는 전인적(全人的)인 감찰의 의미를 갖는다.
5절 우테 가르 포테 엔 로고 콜라케이아스 에게네데멘 카도스 오이다테 우테 엔 프로파세이 플레오넥시아스 데오스 마르튀스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이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 '아첨의 말'(콜라케이아스)은 단순히 타인을 의식해서 하는 말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미리 계산에 넣어하는 말을 뜻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안도감을 주는 그럴듯한 말을 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탐심의 탈'에서 '탈'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파세이'는 '프로'('앞에')와 '파이노'('나타남')의 합성어로서 사물의 진상을 가리기 위한 '가면'을 뜻한다. 즉 겉으로는 복음 전파라는 허울좋은 구실을 내세우나 안으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위선적인 행위를 말한다. 전자(前者)가 외적 행위에 관계된 것이라면 후자(後者)는 내적 동기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 두 가지는 전도자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표준이다'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이 언제든지 영적 선을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결코 악을 자행하지 않았음을 말하며 이에 대하여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바울의 탐심 없음을 증명할 수 있음을 신뢰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진실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죄악 된 세상에서 때때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확고한 보증이라 할 수 있다.
6절 우테 제툰테스 엑스 안드로폰 독산 우테 아프 휘몬 우테 아프 알론
=====2: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자신과 같이 사도에 포함시킨다. 이는 본 서신의 서두에서(1:1) 이 세 사람이 다 같은 복음 사역의 동역자임을 밝힌 것처럼 동역자들을 향한 바울의 진실성을 보여준다. '사도'(아포스톨로이)는 '보냄을 받은 자','대리자'의 뜻으로 신약 시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던 용어이다. 성경에서 '사도'란 말은 (1) 세례 요한 때부터 주님과 같이 한 자 (행 1:21), (2) 주께서 친히 임명하신 자(마 3:14), (3) 주의 부활을 목격한 자(행 1:21)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때때로 바나바(행 14:4,14), 주의 형제 야고보(고전 15:7;갈 1:19) 등 넓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7절 뒤나메노이 엔 바르에이 에이나이 호스 크리스투 아포스톨로이 알르 에게네데멘 에피오이 엔 메소 휘몬 호스 한 트로포스 달페 타 헤아우테스 테크나
=====2:7
오직 -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도의 순전함과 진실성을 본절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 '유순한'(에피오이)은 종에 대한 주인의 태도나 신하에 대한 왕의 태도,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와 같이 하급자에 대한 상급자의 관대(寬大)한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따라서 바울과 그 일행이 존경받을 권리와 지배력의 행사를 버리고 마치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 '유모'(트로포스)는 '자기'(헤아우테스)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강조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자식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고 특별한 사랑과 노력을 쏟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바울 자신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그러한 사랑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지도하였음을 가리킨다.
8절 후토스 히메이로메노이 휘몬 유도쿠멘 메타두나이 휘민 우 모논 토 유양겔리온 투 데우 알라 카이 타스 헤아우톤 프쉬카스 디오티 아가페토이 휘민 게게네스데
=====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 '너희를 사모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히메이로메노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동사로서 간절한 마음의 깊이를 의미한다. 이 동사의 시제가 현재 분사형인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애정이 복음 전할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 바울은 그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권해준 선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말한다. 본절의 '목숨'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카스'는 '생명', '영혼'을 의미하나 이는 한 사람의 전인격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RSV는 본절의 '우리 목숨'을 '우리 자신을'(our own selves)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실라와 디모데를 포함한 바울 일행이 일심 단결하여 목숨을 내어놓고 전도하였음을 보여준다.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 바울은 그의 일행이 생명을 내어놓고 복음을 전한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온화한 어조로 말한다. 사랑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장 고귀한 덕으로서(고전 13:13),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요 15 :13). 한편 '즐겨함'의 헬라어 '유도쿠멘'이 미완료 과거형인 점은 바울 일행의 희생적인 사랑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9절 므네모뉴에테 가르 아델포이 톤 코폰 헤몬 카이 톤 모크돈 뉘크토스 가르 카이 헤메라스 에르가조메노이 프로스 토 메 에피바레사이 티나 휘몬 에케뤽사멘 에이스 휘마스 토 유양겔리온 투 데우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 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자신들이 많은 고생과 고난을 겪어가며 자활(自活) 생활을 한 것을 회상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바울이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하였다(8절). 물론 목숨을 준다는 것은 크고도 먼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증거로 가깝고도 쉬운 문제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였다. '수고와 애쓴 것'(톤코폰 카이 톤 모크돈)은 자신들을 희생함으로써 초래한 피로와 그러한 수고를 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외적인 많은 고난들을 강조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밤낮으로 손수 노동을 하여 자급 전도를 하였으니, 그의 일은 장막 만드는 것이었다(행 18:3). 바울의 이러한 솔선수범하는 자세는 교인들에게도 정당한 근로를 가르칠 수 있었던 모범이 되었다(4:11).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 이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으려 한 사실과 그의 사역에 추호의 이기심이나 탐심도 개입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처럼 자급 전도하였다(행 20:34, 35;고전 4:12;고후 11:8). 한편 바울은 전도자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말하였으나(고전 9:14), 그는 결코 전도함에 있어서 이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회심자들로부터 선물을 받기도 했고(고후 11:8)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는 빌립보의 형제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빌 4:16). 그러나 그는 어떤 선물이든지 복음의 확장에 도움이 될 때에만 받아야 함을 중요시하였다. 종일토록 복음을 전파한 바울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남은 시간을 손수 노동함으로써 그의 회심자들이 자신의 생활비를 보조하는 부담을 갖지 않게 하였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 '전파하였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케뤽사멘'은 전달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말을 가감(加減)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최선을 다해 그대로 전달하였다. 여기에 복음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확고한 사명 의식이 깃들어있다.
10절 헤메이스 마르튀레스 카이 호 데오스 호스 호시오스 카이 디카이오스 카이 아멤프토스 휘민 토이스 피스튜우신 에게네데멘
=====2:10
우리가...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 데살로니가인들이 바울 일행의 순수성을 이해하고 그들이 들은 복음에 계속 확고히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과 실라와 디모데의 수고를 말한다.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호시오스 카이 디카이오스 카이 아멤프토스)의 해석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거룩하고'는 하나님을, '옳고'는 사람을, '흠 없이'는 양자를 대상으로 하는 소극적 언급이다(Findlay, Frame, Clarkem, Gloag). (2) '거룩하고'는 하나님을, '옳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 일행의 행동을 가리키며 '흠 없이'는 그들 자신의 행동 자체를 의미한다(Bengel). 이와 같은 해석들은 커다란 차이를 지니지 않으나 가장 유력한 지지를 받는 것은 (1)의 견해이다(F.F. Bruce). 이렇게 볼 때 '거룩함'이란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옳음'이란 사람에 대한 올바른 행위를 가리키며, '흠 없이'란 이 두 가지의 소극적 측면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책망할 바 없는 단정한 생활을 가리킨다.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 바울은 자신들의 선교 사역의 순수성과 진실성에 대한 확고한 증인으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하나님을 내세운다.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일행의 외적 행동의 증인이요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의 내적 동기의 증인이 되심을 밝힌다(Lightfoot). 실제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진실된 전도의 모습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목격한 바이며,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신실하게 복음만을 증거 하였다.
11절 카다페르 오이다테 호스 헤나 헤카스톤 휘몬 호스 파테르 테크나 헤아우투
=====2: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 이미 앞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1, 2, 5, 9, 10절).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어머니 상(象)에서 아버지 상으로 바뀌 말한다. 앞에서 그는 데살로니가인들을 복음으로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말했으나 여기서는 그들의 잘못된 신앙의 상태를 바르게 교육하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강조한다(Chrysostom). 한편 모성(母性)과 부성적(父性的) 측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시 103:13;사 66:13).
권면하고 위로하고 - 두 단어는 거의 같은 뜻을 내포한다. 그러나 '권면하고'(파라칼룬테스)는 특별한 행동 지침을 충고할 때 사용되며 '위로하고'(파라뮈두메노이)는 그러한 행동 지침을 계속해서 따르도록 격려할 때 사용된다(Lightfoot). 바울 서신에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많아 사용되고 있다. 바울이 두 단어를 병행해서 쓰는 이유는 독자들에게 강하게 권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경계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메노이'는 보다 권위적인 어조가 담겨있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 이상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당위성을 내포한다.
12절 파라칼룬테스 휘마스 카이 파라뮈두메노이 카이 마르튀로메노이 에이스 토 페리파테사이 휘마스 악시오스 투 데우 투 칼룬토스 휘마스 에이스 텐 헤아우투 바실레이안 카이 독산
=====2:12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장차 다가올 나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과 더불어 성취될 나라이다(살후 1:5).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 사이에 있게 되는 기간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기간이다. 죽음의 세력이 완전히 무너지고, 시 110:1에 기록된 대로 사단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굴복하게 될 때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다(고전 15:23-28). 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자녀들이 유업으로 물려받게 되며 불의한 자들은 제외된다(갈 5:21;엡 5:5).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될 때 그의 영광도 함께 나타나게 되며 그의 자녀들은 그 영광에 같이 참여하게 된다. 바울은 롬 5:2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며, 롬 8:18에서는 '현재 고난이 장차 그들 앞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행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테인'은 문자적으로 '돌아다님'을 뜻하는 말로서 NIV에서 '생활하다'(to live lives)로 번역되었다. 이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관련된다. 즉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符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헬라어 좋은 성경말씀] 교회의 머리인 예수님(골 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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